소설리스트

99화 (99/120)

각종 해산물이 들어간 도빙무시와 제철 생선회.

새우와 제철 채소들의 튀김.

다양한 생선으로 만든 스시까지.

그야말로 일식을 총망라한 코스 요리들을 맛보며 기분 좋게 술을 걸치다 보니 제법 얼큰하게 취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안 씨, 괜찮아요?”

“괜촪습니다….”

윤지안이 취했다.

그것도 좀 많이.

처음부터 술잔을 비울 때마다 바로바로 채우길래 술이 굉장히 강한가 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저렇게 취할 거면 왜 그렇게 빨리 마시려고 한 걸까.

한 군데 딱 멈춰 있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도쥔 씌….”

“네?”

“아까 말하셨잖숩니까…. 하고 싶은 거 있음 말하롸고….”

“그랬죠.”

“생각놨숩니다. 하고 쉬픈 거….”

문득 궁금해졌다.

술에 취한 와중에 뭐가 그리도 하고 싶어서 저렇게 힘겹게 말을 꺼내는 건지.

그래서 웃는 얼굴로 물어봤다.

“그래서 뭐가 하고 싶은데요?”

“그…,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다뇨? 뭘?”

“그거….”

그게 대체 뭔데.

“고…, 고….”

고?

“고…ㅊ….”

콰당!

“…….”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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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을 마치고 술에 취해 뻗은 윤지안을 등에 업고 나오면서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영화관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향하는 길.

차분하게 내려앉은 밤공기를 맡으며 아쉬움은 더욱 심화되었다.

“밤은 이제 시작인데.”

오늘 그녀를 만나 만리장성을 쌓아야겠다, 다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밤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것 아닌가.

저녁을 먹은 뒤, 가볍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속도 까발리게 되고, 또 그러면서 속절없이 깊어지는.

밤이 깊어질수록 우리 사이도 점점 짙어져만 가는 그런 느낌을 원했는데.

“저녁 반주로 취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달릴 때 그만 마시게 말렸어야 했는데.

너무 자신 있게 술잔을 계속해서 내밀길래 술에 강한가 보다, 하고 생각한 게 패인이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니, 근데 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그렇게 연거푸 들이켰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술을 잘 마시는 것도 아니고, 바쁜 일이 생겨서 빨리 돌아가 봐야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기분이 좋아서 그랬나.”

만약 오늘 하루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주체하지 못하고 마신 거라면…, 그건 인정.

그랬다면 적어도 밤은 즐길 수 없게 됐을지언정 나쁜 하루는 아니게 될 테니.

터덜터덜 걷다 보니 어느덧 영화관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 키가….”

윤지안의 목에 걸어둔 작은 가방을 열어 차 키를 찾아 문을 열었다.

“끙차.”

일단 뒷좌석에 그녀를 눕혔다.

“으응….”

그 순간, 윤지안이 잠꼬대 비슷한 걸 하며 다리를 굽히는데 자연적으로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훤히 들여다 보이는 치맛속으로 보이는 검정색 팬티.

아주 잠깐 그 너머에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하다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사실 최근의 나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라고 불려 마땅하지 않나 싶다.

“예쁜 여자만 보면 주체를 못 하겠네.”

그것도 나와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더욱.

지금껏 억눌린 채로 살아온 것에 대한 반발심리라도 작용하고 있는 걸까.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겠다곤 했지만 이렇게까지 음란한 쪽으로만 나아가고 싶었던 건 아닌….

“아닌 게 맞나?”

모르겠다.

원래 남자의 욕망이란 게 대부분 그런 쪽으로 몰려 있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지.”

술에 취한 여자를 마음대로 보고, 만지는 건 범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찐득한 관계를 주고받은 연인 사이라면 또 모를까.

팬티가 잘 보이지 않도록 벌어진 다리를 적당히 오므린 뒤, 그녀의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집 주소를 알아야 데려다주든, 말든 할 것 아니겠나.

이를 알아보기 위해 신유정이 임나은에게 썼던 방법을 사용했다.

힘없이 늘어진 그녀의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의 잠금을 해제한 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거의 필수나 다름없는 배달 어플을 켜보았다.

역시나 적혀 있는 그녀의 주소.

“이거 신통하네.”

옛날에는 집 모르는 사람이 술에 취해 뻗으면 남자는 경찰서 앞에 던져두고, 여자는 모텔방에 재워놓고 나오는 게 국룰이었는데.

주소도 알았겠다, 곧장 대리기사를 불렀다.

“대리 부르신 분 맞으시죠?”

강남에 술에 취해 대리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뒷좌석에 널브러진 윤지안 때문에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타게 됐다.

적막한 차 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이렇게 가볍게 한잔 걸치고 돌아갈 때마다 대리운전 기사님께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게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내 삶이 변하긴 변했구나, 하고 실감하게 된다.

“…별것도 아닌데 괜히 뿌듯하네.”

“예? 방금 뭐라고….”

“아, 혼잣말이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아, 네.”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어느덧 도착한 그녀의 집 앞.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깨끗한 오피스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종로에 신축 오피스텔이면 월세든, 전세든 값이 괘나 나갈 텐데.

하긴, 협회 직원에게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겠지.

그녀의 지갑을 뒤쳐 출입 카드를 찾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1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집 앞인 602호까지 도착은 했는데….

“비밀번호가 문제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띵동-!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걸로 보아 이곳은 그녀 혼자 사는 집인 듯했다.

갑자기 호감도가 대폭 상승했다.

“어쩔 수 없네.”

이번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어 결국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우기로 했다.

몸에 반동을 주어 등에 업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지안 씨, 지안 씨?”

“으응….”

“집 앞인데 비밀번호 좀 알려줘요, 지안 씨.”

지안 씨? 지안 씨? 지안 씨? 지안 씨?

계속 반복하니 마침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바로 비밀번호 누를 준비를….

“우욱….”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걸 뱉으라고.

* * *

“아윽.”

용광로처럼 들끓는 더부룩한 속과 양옆에서 조여드는 지독한 두통.

두 가지 환상의 숙취가 아득히 떨어져 내린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아 끌어 올렸다.

바들거리며 떠오른 눈꺼풀.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긴…?”

그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집, 그것도 침실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그녀의 기억은 일식집에서 멈춰 있었다.

모든 역사는 밤에, 그리고 적당히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정식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거리를 좁히는 데에 술만 한 녀석이 없다고 하길래 열심히 마셨다.

근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됐다.

술이라는 게 원래 적당히 대화도 해가면서 템포를 조절해가며 마셔야 하는 녀석인데, 긴장된 나머지 계속 술만 마시다가 제대로 취해버린 것.

“내가 또 실수를….”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는 윤지안.

그때까지만 해도 더없이 좋은 분위기였건만, 자신이 모든 걸 망친 것만 같았다.

아니, 망친 게 맞다고 봐야겠지.

“윽.”

그러나 그 생각만으로 괴로워하고 있기엔 몸 상태가 너무 최악이었다.

머리는 아프고, 속은 쓰리고, 입은 또 왜 이렇게 텁텁하고 불쾌한 맛이 감도는 건지.

양치질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방 문을 열고 나가 화장실 앞에 섰는데.

쏴아아-

물소리가 들린다.

“…….”

그녀는 처음에 제 귀를 의심했다.

아직 술이나 잠에서 덜 깨어났나 싶어 화장실 문에 귀를 가까이 가져가 보려는데, 때마침 물소리가 끊어졌다.

윤지안은 제 이마를 짝 소리 나게 때리며 자책했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으면 환청까지….”

과음하는 모습에 김도진이 실망했으면 어쩌나 걱정하며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던 그때.

손도 대지 않았는데 문고리가 자동으로 돌아가더니, 멋대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보았다.

신이 양손에 정과 끌을 쥐고 한 땀, 한 땀 도려내고 깎아내서 만든 듯한 절정의 조형미를 자랑하는 상반신과 그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김도진의 시선.

“어, 깨어나셨네.”

귓가에 또렷하게 들려오는 그의 음성이 지금 맞이한 순간이 허상이 아님을 증명하는 듯했다.

“도, 도진 씨가 왜 여기에…?”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김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왜긴요. 쓰러진 지안 씨 데려다주느라 그렇죠?”

“아, 그, 그러셨구나.”

생각해 보니 어떻게 자신이 집에 돌아왔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그러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샤워는 왜…?”

자신이 잠든 사이에 샤워라니, 뭔가 느낌이 야릇하지 않은가!

그러나 김도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야릇한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 지안 씨가 약간의 실례를 하는 바람에….”

옆으로 비켜서서 화장실에 널려 있는 제 셔츠를 보여주는 김도진.

다른 곳은 멀쩡한데 왼쪽 어깨 부근에만 물에 젖어 있었다.

퍼즐이 맞춰졌다.

텁텁하고 불쾌한 맛이 나는 입안과 무언가를 지워내기 위해 빨아낸 셔츠.

이건 누가 봐도….

“죄, 죄, 죄, 죄송합니다!”

놀란 나머지 고개를 넙죽 숙이는 윤지안.

“에이, 괜찮아요. 아주 약간 새어 나온 정도인데요, 뭐.”

“으으….”

김도진의 위로 아닌 위로는 그녀에게 조금의 위안도 되지 않았다.

약간이든, 많이든.

상대방에게 제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였음은 피차일반 아닌가.

“아, 일단 양치질부터 할래요? 조금 그…, 텁텁할 것 같은데.”

“네, 네, 그럼 잠시….”

김도진이 밖으로 나와 텅 빈 화장실로 기어들어 가는 윤지안.

“천천히 하고 나와요.”

마지막으로 건네받은 말에 윤지안은 칫솔을 손에 쥐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깨달았다.

평범한 말도 어떤 장소에서 쓰이냐에 따라 뉘앙스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단느 것을.

“천천히 하고 나오라니….”

멍하니 그가 했던 말을 읊조리는 윤지안.

집에서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자신의 자취방이 신혼집이 되어버린 듯한 착각마저 인다.

손부채질로 뜨겁게 달아오른 볼을 식히며 양치질을 마친 뒤, 거울을 통해 제 모습을 확인했다.

방금 막 일어난 탓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화장은 번지고….

조금 전까지 이 모습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생각하니 접시물에 코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닦아냈다.

이 상태로 있느니, 차라리 맨얼굴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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