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위해 나도 목숨을 걸었다.
코어를 폭주시켜 마력을 과부하 상태로 만든 뒤, 그것을 그대로 담아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는…, 눈으로 보는 것과 같았다.
[균열이…, 다시 벌어졌어!]
[이때다! 놈을 저 균열 안으로 다시 집어넣어야 해!]
[전력을 다해! 지금이 아니면 우리는 전부 죽어!]
많은 헌터들이 힘을 모아 균열 안으로 놈을 밀어 넣었다.
마침내 균열 안으로 들어선 놈은 가기 싫다는 듯이 온몸을 비틀어대며 난동을 부리다가 이내 완전히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이후는…, 뻔했다.
정부를 질책하는 목소리는 점차 높아졌고, 균열을 열어젖힌 헌터는 더욱 칭송받았다.
완전히 부서진 강남은 각성자들의 특성으로 빠르게 복구되었고.
희망의 씨앗이 다시금 자라나며 영화는 끝이 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그날 최전방에서 싸운 헌터들의 이름이 함께 올라왔다.
그중에는 ‘손시우’라는 이름도 적혀 있었다.
“흡….”
그것이 그리도 감동적이었을까.
윤지안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작은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괜찮아요?”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조금 기분이 묘하네.
“죄, 죄송합니다. 못난 꼴을 보이고 말았네요….”
“못나긴요.”
촉촉해진 눈가를 소매로 훔치는 그녀의 모습은 청초하기 그지없었다.
“도진 씨는 영화 어떻게 보셨습니까?”
“저요? 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그때의 이야기를 상업 영화로 만들겠다는 제안에 수락한 게 옳은지, 그른지.
근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확신이 선다.
“좋은 영화였던 것 같아요.”
그때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녀와 마찬가지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이 이를 증명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실컷 울어서 배고플 것 같은데, 밥 먹으러 갈래요?”
“네, 좋습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대답하는 윤지안을 보며 생각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는데.
나중에 확인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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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좋은 분위기로 영화를 마치고 나온 뒤.
나는 그녀에게 자신 있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요?”
강남이라면 내가 꽉 잡고 있다.
파괴된 강남의 복구 이후 길드 하우스가 이곳에 들어선 덕분에 웬만한 식당이란 식당은 다 가봤거든.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등.
그녀가 원하는 음식만 있다면 최고의 맛을 보여줄 수 있다.
물론 돈은 많이 들겠지만.
“아,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세상 무서운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거나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라던데.”
내가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놀란 얼굴로 다급하게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아무거나 다 잘 먹어서 그런 건데….”
내가 진심으로 오해했다고 생각했는지 금세 울상이 되어버리는 윤지안.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녀가 귀엽게 느껴지면서도 좀 당황스럽다.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한 것 같은데.
“농담을 너무 진심으로 받는 거 아니에요?”
“아, 농담이셨군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
“아무튼, 생각나는 거 있으면 뭐든 말해봐요. 제가 가장 맛있는 곳으로 데려가줄 테니까.”
“아, 저기 그러면… 사실 제가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기는 한데.”
이미 가고 싶은 곳까지 검색해뒀던 걸까.
“어딘데요?”
“그…, 지인에게 추천받은 일식집입니다.”
“오, 그래요? 그럼 거기로 가요.”
내가 줄줄이 꿰고 있는 맛집을 자랑하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쉽지만, 오늘은 그녀가 주인공인 날이니까.
기왕 돈 쓰는 거, 그녀가 가장 만족스러운 형태로 쓰는 게 낫겠지.
“여기서 멀어요?”
“아뇨, 걸어서 5분에서 10분쯤…?”
“그럼 차는 여기 세워두고 걸어가죠.”
“네.”
1층 로비를 통해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걷는 강남의 거리는 평소와 같았다.
돌아다니는 부류는 대부분 둘로 나뉜다.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헌터 또는 비싼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한 부자.
전자는 이곳에 대형 길드들의 길드 하우스가 몰려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강남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촌이기 때문이다.
파괴된 강남의 복구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온갖 생활 능력과 연관되어 있는 각성자들을 대거 투입해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새롭게 복구된 강남은 예전보다 더욱 값비싼 땅으로 변모했다.
모든 건물에 보호 마법이 설치된 것은 물론이고, 앞서 말한 대형 길드들이 전부 이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말인즉, 강남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땅이 되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덕분에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안 그래도 강남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전부 부자였는데 더 큰 부자로 발돋움하게 되었지.
그리고 땅값이 치솟은 건 강남뿐만이 아니었다.
강남과 붙어 있는 지역구들 대다수가 그야말로 떡상했다.
이유는 당연히 강남과 가깝다는 이유 하나 때문.
이게 연쇄작용을 일으키는 바람에 사실 서울에 해당하는 지역구 전체의 땅값이 조금씩이나마 올랐다던가.
“그…, 날씨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한껏 여유로운 풍경에 취해 걷고 있을 때,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게 아닐까 싶다.
이것 또한 내 실책이다.
옆에 함께 걷는 여자를 두고 풍경에 정신이 팔려있었다니.
“그러게요. 걸으니까 너무 좋네요.”
지금이라도 최대한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이야기를 나눠 보자.
“요즘 일은 안 바빠요?”
“예, 부장님께서 손 써주신 덕분에 맡겨진 업무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도진 씨도 절 안 찾으셔서 요즘은 좀 뭐랄까…, 외딴섬에 버려진 듯한 느낌이….”
“아.”
그녀의 업무 부담이 줄어든 것은 나를 더욱 세심하게 서포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녀를 찾지 않다 보니 오히려 허전했나 보다.
“미안해요. 근데 사소한 일로 지안 씨를 부르면 좀 미안한 느낌이 들어서.”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깜짝이야.
갑자기 소리를 높여 대답하는 윤지안.
그녀도 제 목소리가 조금 컸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금세 얼굴을 붉혔다.
“그, 그러니까 제 말은 사소한 일이라도 상관없으니 불러주셨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정말 사소한 일이라도 돼요?”
“네, 뭐든 상관없습니다.”
“막 수업 끝나고 집으로 데려다달라고 해도?”
“그런 것도 좋습…, 아니, 괜찮습니다.”
귀찮고, 자존심 상할 것 같은 요청에도 그녀는 흔쾌히 괜찮다고만 답하고 있다.
오히려 기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일이 생겨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보는 것 또는 나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는 것 자체를 원하는 듯한 눈치인데.
어느 쪽인지 확실하게 감이 안 잡힌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로변에서 조금 좁은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줄지어 늘어선 고급 식당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중 한 8할 정도가 와본 곳이다.
예전에 이곳에 새로 둥지를 틀게 되었을 때 점심때마다 길드원들 데리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맛에 살았었는데.
“여깁니다.”
골목에 들어서면서부터 한 걸음 앞서 걷던 그녀가 멈춰 서서 한 가게를 가리켰다.
모던한 느낌과 일본풍이 조화롭게 섞인 건물.
가게 이름은 유키, 일어로 눈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기억한다.
내가 한창 이곳에 들락날락할 때만 해도 없던 곳이다.
“오픈한 지 1년 조금 넘은 곳인데, 맛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랍니다.”
“오, 그래요?”
“네! 그럼 들어가실까요?”
그녀의 뒤를 따라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은은한 조명 아래 원목의 따뜻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셨습니까?”
직원의 물음에 윤지안이 내 눈치를 한 번 슥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예, 그…, 윤지안으로 예약을….”
“……?”
와보고 싶은 곳이라더니, 예약까지 했었구나?
“예약 확인되었습니다.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의 뒤를 따라 4인용 테이블이 놓여 있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메뉴 고르신 뒤에 호출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뒤 떠나가는 직원.
나는 의자에 앉으며 윤지안에게 물었다.
“예약을 해뒀었어요?”
“예, 실은 어제 저녁에 급히 예약을 해뒀었습니다.”
송구스럽다는 듯이 얘기하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지안 씨가 먹고 싶은 거 사주려고 했으니까 예약한 건 상관없는데…, 그러다가 내가 여기 오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땐…, 화장실 간다고 잠깐 빠져서 예약 취소 전화를 하려고….”
이걸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배려심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다음부턴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확실하게 말해줘요. 만약 나랑 의견이 안 맞는다고 해도 고작 그런 걸로 우리 사이가 나빠지거나 하진 않을 거잖아요?”
내 말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우, 우리 사이….”
어디에 꽂혔나 했더니, 거기였나.
반응이 보기 좋아 조금 더 말을 덧붙였다.
“지안 씨가 제 서포트를 하기로 했으니까, 우린 이제 싫어도 오래 봐야 되는 사이잖아요?”
“예, 그렇죠.”
“그러니까 기왕 오래 볼 거, 가깝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가깝게…, 예, 저도 가깝게 지내는 게 더 좋을 것 같…, 크흠, 같습니다.”
말하는 도중에 입꼬리가 파도라도 치는 것처럼 위아래로 씰룩거린다.
자연스레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막아내려고 해서 저런 모양이 나오는 건가.
“일단 메뉴부터 골라요, 우리.”
얘기를 멈추고 일단 메뉴부터 골랐다.
메뉴가 다양했는데 하나 같이 먹어보고 싶은 것들이라 그냥 가장 비싼 코스로 주문했다.
일식 코스 요리를 오마카세라고 하던가.
거기에 사케도 한 병 시켰다.
일식을 먹는데 사케가 빠지면 섭하지.
“지안 씨도 마실 거죠?”
“그게….”
잠시 고민하는 윤지안.
차 때문에 마시는 게 곤란하겠구나 싶어서 안 마셔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저도 마시겠습니다!”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뭐, 사실 차야 대리 부르면 그만이긴 하니까.
“실례하겠습니다.”
하나둘씩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얇게 썬 연근 튀김과 전복이 잔뜩 들어간 샐러드.
전복 샐러드는 그냥 전복 들어간 샐러드 그 자체인데, 연근 튀김이 생각보다 물건이었다.
“한잔 할까요?”
“네…!”
힘차게 잔을 내미는 그녀.
뭔가 알 수 없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게 느껴진다.
그녀의 술잔에 술을 붓고 내 잔에도 부으려는데, 그녀가 손을 뻗었다.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채워진 두 개의 술잔.
“건배해요, 우리.”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이라도 좋으니 자주 뵀으면 합니다.”
“알겠어요. 제가 최대한 지안 씨 귀찮게 할게요.”
“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사케를 털어 넣는다.
부드럽고 깔끔한 맛.
거기에 얇게 썬 연근 튀김을 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니 그야말로 술안주로 제격이었다.
“한 잔 더 하시죠.”
“…아, 네.”
이번엔 그녀가 먼저 술을 권했다.
마신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원래 술을 빨리 마시는 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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