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그녀는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왜 이렇게 긴장이….”
협회 면접을 볼 때도 느낀 적 없던 긴장감이 그녀의 몸을 바짝 조여오고 있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조금 이른 시간에 김도진이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앳된 얼굴 위로 피어오른 부드러운 미소.
한껏 들떠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때가 오버랩된다.
문득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다.
속절없이 녹아내려 행복에 겨워하던 그때 그의 모습을.
“일찍 오셨네요? 오래 기다렸어요?”
조수석에 올라타며 편한 분위기로 말을 걸어오는 김도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녀는 생각했다.
남녀는 원래 하루 만난 사이에도 불만 붙으면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던데.
자신들은 이미 한 번 경험까지 한 사이니까.
‘어쩌면 오늘….’
다시 한번 그때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요망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지안 씨?”
김도진의 부름에 윤지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 아, 예!”
“일단 출발할까요? 어딜 가든 여기는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생각난다.
온몸으로 퍼지는 쾌감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의 숨소리가.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켰다.
“예, 그럼 일단…, 출발하겠습니다.”
두 사람을 실은 그녀의 자동차가 골목을 빠져나간 뒤.
건물 위에서 숨죽인 채 자동차를 내려다보고 있던 여인도 힘없는 걸음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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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게 나아가는 차 안.
운전대를 잡고 있는 윤지안이 전신에 과하게 힘을 주고 있는 게 보인다.
긴장한 건가?
“지안 씨.”
“예, 예.”
“우리 어디로 가요?”
이거 물어보고 나니까 뭔가 이상하다.
원래는 남자가 데이트 코스도 짜고 그래야만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아, 요즘은 이것도 편견인가.
“그…, 저녁 먹기는 아직 시간이 일러서요.”
“그렇죠.”
“그래서 영화 한 편을 예매해뒀는데…, 괜찮으실지.”
오, 영화.
“영화 좋죠.”
영화관에 마지막으로 가본 게 언젠지 모르겠다.
옛날에 한 번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혼자 갔다가 사람들이 몰리는 바람에 급하게 도망쳐 나온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 뭐 재미있는 영화라도 있어요?”
내가 관심을 보이자, 그녀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몸에 힘도 좀 빠지는 게 긴장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는 모양.
“아, 이번에 개봉한 실화를 기반으로 한 액션 영화인데 김도진 씨도 아시죠? 손시우 헌터.”
“…알죠.”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와.
“이번 영화가 손시우 헌터가 겪은 이야기를 각색하여 만든 영홥니다.”
“…….”
기억났다.
2년 전이었나.
갑자기 내가 겪은 사건 중 하나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영화 제작사에서 연락을 줬었더랬다.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이야기는 내게 가장 아픈 기억이었다.
5년 전, 강남에서 시작된 몬스터 웨이브.
어마어마한 수준의 재산 피해와 인명 피해를 자아냈던 대한민국 역사에 남은 최악의 사건.
솔직히 그때의 일은 입밖으로 내기도 싫었다.
그러나 그들은 몇 줄 글귀만으로 남아서는 안 되는 사건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당시 헌터들의 노고와 정부의 늑장 대응을 모두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그래야만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조금이라도 더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을 거라며 말이다.
돈을 벌기 위해 번지르르한 말만 늘어놓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바른 사람이더라.
그래서 제법 도움을 줬던 걸로 기억한다.
액션씬을 살리기 위해 검술 같은 것도 몇 번인가 시연해줬고,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생생한 이야기도 들려줬었지.
“그게 이제 개봉하는구나….”
조금 감회가 새롭다.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혹시 액션 싫어하십니까?”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던 탓일까.
윤지안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곁눈질로 힐끔거리고 있다.
“아, 아니에요. 저도 액션 좋아해요.”
“그러십니까. 다행이네요.”
그제야 윤지안의 얼굴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처음 봤을 때는 안 그런 것 같았는데,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에 여러 표정이 살아 있다.
은근히 귀엽단 말이야.
도로 위를 달리는 주변 차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도시의 중심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
익숙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남의 고층 빌딩.
그중에는 내가 만든 길드의 길드 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이 몸으로 살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그립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오직 나 하나만을 보고 들어온 우리 길드원들.
그중에서도 나와 같은 파티에 속해 있던 간부들만은 그립고 또 그리웠다.
그들과 쌓아온 시간이 가족들 못지않았으니.
아니, 사실상 제2의 가족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까지 강남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건 볼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에 오게 되면 향수에 빠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도진 씨? 도진 씨?”
“아.”
상념에서 빠져나와 퍼뜩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지하 주차장 안이다.
영화관 건물로 들어선 모양.
“혹시 어디 안 좋으신 데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러시다면….”
“아니에요. 잠깐 생각할 게 조금 있어서.”
“아, 네. 그럼…, 올라가실까요?”
“네, 그래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향했다.
넓은 공간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중 대다수가 커플이었다.
우리는 애매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연인이라기엔 한참은 멀고, 모르는 사이라기엔 또 제법 가까운 거리.
그러다 윤지안이 키오스크를 가리켰다.
“영화표 뽑아 오겠습니다.”
“그럼 저는 팝콘 사올게요.”
“아, 그것도 제가 사려고 했는데….”
여러모로 좋은 여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요즘 젊은 남녀는 데이트 비용으로 잘도 싸운다던데.
웃음이 절로 나온다.
“원래 제가 대접하려고 만난 거 아니었나요?”
“아, 그랬었죠…?”
“그러니까 각자 사서 여기서 봐요.”
“알겠습니다.”
그녀가 키오스크로 향하는 걸 확인하고서 나도 매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 주문하시겠어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앞선 손님들의 주문을 받아내던 직원이 나를 보더니 얼굴을 붉힌다.
뭔가 굉장히 애틋한 눈빛.
머리는 갑자기 귀 뒤로 왜 넘긴대.
애써 무시한 채 메뉴를 보고 있는데 익숙한 세트 하나가 눈에 띈다.
“커플 세트 하나 주세요.”
“아, 네…. 결제 도와드릴게요.”
커플 세트라는 말에 갑자기 시무룩하게 변하는 얼굴.
내가 혼자 오기를 바랐던 걸까.
뭔가 좀 뿌듯한걸.
잠깐 기다리다 팝콘과 콜라를 받아 그녀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향한다.
멀리서 나를 확인한 윤지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손에 들린 콜라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료 뭐 마실지를 안 물어봤었네.
“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콜라 샀는데, 괜찮죠?”
“네, 좋아합니다.”
가볍게 웃는 걸 보니 빈말은 아닌 듯하다.
다행이네.
“영화는 몇 시에요?”
“어…, 10분 정도 남았습니다.”
“그럼 들어가서 기다릴까요?”
“네, 그러시죠.”
영화표를 보여주고서 영화관 안으로 들어왔다.
중간 열에 위치한 맨 오른쪽 끝의 두 자리.
“그…, 제가 구석 쪽에서 보는 걸 좋아해서….”
갑자기 흘러나오는 변명 아닌 변명.
“저도 좋아해요.”
사실 맨 앞, 뒷자리만 아니면 어디든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팔걸이 하나만을 사이에 둔 채 나란히 앉아 있으니 뭔가 기분이 오묘하다.
뭐랄까…, 진짜 데이트를 하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뒤늦게 난다고 해야 하나.
“이제야 데이트하는 느낌이 나네요.”
“예? 아, 데, 데이트…, 예, 데이트….”
갑자기 고장 나버린 윤지안.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얼굴이 붉어져 있지 않을까 싶다.
저런 얼굴이면 데이트 정도는 많이 해봤을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쑥스러워할까.
“아, 이제 시작하네요.”
안 그래도 어두웠던 실내가 더욱 어두워지고 꺼져 있던 스크린에 영상이 떠올랐다.
무의미하게 흘러 지나가는 광고 영상들.
지루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윤지안이 스크린에 눈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껏 기대감 넘치는 표정.
어지간히도 이 영화가 보고 싶었나 보다.
나도 궁금하긴 하다.
과연 그때의 처절함이 얼마나 반영되었을까.
마침내 영화가 시작됐다.
평화로운 강남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이윽고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온 헌터의 모습이 나온다.
그속에서 불길한 징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내비친다.
평소보다 높은 마력의 농도, 강남을 중심으로 열리기 시작하는 던전들.
일부 연구원들이 이는 커다란 재앙이 닥칠 전조라며,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부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자그마한 징조만으로 수많은 돈을 쓰기 싫다는 뉘앙스.
“어휴.”
다시 보니 화가 난다.
정부는 실제로 저랬다.
위험이 닥쳐올 수도 있다고 숱하게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다 모르쇠로 일관했다.
10이면 막아낼 수 있었던 피해가 100으로 늘어나게 된 건 전부 저놈들 탓이었다.
마침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하늘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블린과 같은 소형 몬스터부터 시작하여 점차 더 크고, 강한 몬스터들이 나타난다.
수많은 헌터들이 이에 맞서 싸웠고, 죽었다.
전황이 점점 헌터들의 열세로 이어져갈 즈음, 주인공이 나타난다.
A급 던전 공략을 위해 잠시 서울을 비웠던 S급 헌터.
그와 동료들의 등장으로 전황은 다시 우세하게 돌아가게 되지만, 그것도 잠시.
힘을 다한 균열은 마지막 몬스터로 말도 안 되는 놈을 토해내기에 이른다.
[크와아아악-!]
스크린을 찢고 나올 것만 같은 거대한 괴수의 울음소리에 그때의 전장이 오버랩된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거대한 뱀, 레비아탄.
추정 등급 EX.
S급 헌터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상 최악의 몬스터.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야만 놈의 비늘을 뚫고 상처입힐 수 있었다.
놈이 몸을 흔들어댈 때마다 주변이 전부 부서져 내렸다.
입에서 뿜어내는 푸른색 브레스를 막아내기 위해 수많은 헌터들이 힘을 합쳐 방어막을 구성해야만 했다.
잠깐의 전투로 파악했다.
놈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다.
놈을 왔던 곳으로 그대로 돌려보내기로.
이미 한 차례 사례가 남아 있었다.
레비아탄 이전에 미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베히모스.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을 만난 미국의 S급 헌터는 제 목숨을 담보 삼아 놈을 돌려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도 놈이 타고 왔던 균열을 그대로 이용해서.
그러기 위해선 당장에라도 사라질 듯 크기를 좁혀가던 균열의 크기를 강제로 넓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