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고마울 필요는 없어. 그만큼 엘레나가 고생한 거잖아?”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도진이 유일했습니다. 나를 제대로 활용해준 사람은.”
돈도 돈이고, 자기 자신을 활용해준 것이 고마웠던 모양.
뭐…, 한 차례 경험이 있어서 조금 더 수월했을 뿐이다.
그때 깨달은 바 있다.
세상에 나쁜 특성은 없다는 것.
그리고 솔직히 엘레나는 약과다.
내가 처음으로 애를 먹었던 그 중2병 꼬맹이와 비교하면… 약과가 아니라 선녀지, 선녀.
어쨌든 여러모로 그녀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작전은 성공이다.
마주하고 있는 눈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시 돋힌 듯하던 그녀의 시선이 한층 더 부드럽게 변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랬던가.
조금씩 그녀의 마음이 우리에게 열리고 있는 게 보인다.
“그런데, 저어….”
“응?”
그녀가 우물쭈물한 표정으로 내게 넌지시 물음을 건네왔다.
“다음에도 또 가는 겁니까…?”
그 얘기였나.
“내가 말했잖아? 팀으로 있는 동안은 꾸준히 던전을 공략할 예정이라고.”
“그렇습니까….”
내 말을 듣고 무언가 결심한 듯, 엘레나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렇다면 나, 최선 다합니다. 한국어 공부도, 특성 훈련도 더, 더 열심히 합니다!”
반쯤 꺼져 있던 그녀의 의욕이 재점화된 듯한 느낌이 든다.
여러모로 내게는 이득인 셈.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알았습니다! 도진도 잘 부탁합니다.”
크으, 좋다.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한 뒤,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들의 상태도 살펴보았다.
대부분 비슷한 느낌이었다.
엘레나처럼 크게 감동하진 않았지만, 제법 되는 액수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들 중 내 시선을 잡아끈 사람은 다름 아닌 서연이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일관하던 녀석이 남몰래 조용히 미소 짓고 있다.
이건 좀 의왼데.
워낙 풍족하게 자라온 아이라 이 정도 벌이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
지그시 바라보던 내 시선을 느낀 걸까.
고개를 들어 올린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입가에서 지워지는 미소.
녀석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고생 많았어.”
무미건조한 말투.
기분이 묘하다.
그 말은 손시우의 몸으로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 중 하나였다.
조금 귀찮게 하고 나면 녀석은 방으로 숨어 들어가며 내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곤 했다.
그때도 지금과 같았다.
무미건조하지만, 속까지 메마르지는 않아 미약한 온기가 살아 있는 그런 말.
나지막한 온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왜 아빠와 마주하는 것을 그리도 싫어했는지.
답답한 속내를 애써 숨기며 겨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선배도요.”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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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공략한 뒤 맞이하는 일요일.
쉬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오늘은 선약이 있다.
다름 아닌 윤지안과의 데이트.
정확히는 보상 잘 받은 기념으로 밥 한 끼 사달라고 한 거였지만…, 뉘앙스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으니 데이트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건 기회야.”
그녀와 나의 사이는 사뭇 달라졌다.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이 섞이기 시작했다고 봐야 하나.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처음과는 달리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훨씬 따뜻해졌다.
오늘을 기회라고 표현한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 둘 사이에 변해가는 분위기에 확실한 방점을 찍는 포인트가 될 것 같아서.
물론 내가 오늘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예전처럼 공적인 사이에 머물게 될지, 아니면 공사를 구분하기 힘든 사이가 될지.
“…괜히 긴장되네.”
이렇게 정석적인 루트로 여자와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게 처음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신유정과의 관계는 어딘가 뒤틀려 있고, 아줌마와는 어쨌든 불륜인 셈이니.
전 마누라인 한주희와도 평범한 남녀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걸어 연인이 되었다.
우리는 연인이기 이전에 같은 파티의 동료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목숨을 빚졌고, 그게 쌓여 정이 되었다.
그렇게 쌓인 정은 어느 한순간에 불씨가 튀어 활활 타오르게 되었고.
평범한 데이트도 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관계가 깊어질 대로 깊어졌을 때라 서로가 좋아하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아서 뭘 해야 하고,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 자체를 길게 안 했었던 것 같다.
“뭐…, 평범하게 하면 되겠지.”
내가 보기엔 윤지안도 남자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러니 그녀도 특별한 무언가를 바라고 있지는 않을 거다.
그냥 평범하고 편안한, 그러면서도 조금 설레는 데이트를 꿈꾸지 않을까.
“데이트가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나만 이 순간을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잔잔하게 떨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진득하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옷장을 열어 입고 나가면 괜찮을 법한 옷들을 몇 가지 골라 걸쳐 보는데….
“어라.”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야금야금 팔다리가 길어지고 있어서 슬슬 옷을 다시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아무래도 기한을 넘겨버린 것 같다.
“…짧네.”
몇 벌씩 사둔 슬랙스는 발목 위가 훤히 드러나 보이고, 셔츠는 손목이 휑하다.
“키가 얼마나 큰 거지?”
최근에 상태창을 열어도 키나 몸무게 부분에는 딱히 신경을 안 썼었는데, 이참에 한 번 확인을 해봐야겠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김도진
성별: 남
나이: 20세
키/몸무게: 178CM / 69.1KG
[근력: 28] [체력: 32] [민첩: 28] [마력: 35]
특성: 자질을 지닌 자
[상호불가침(2022.06.09.~2025.12.31)]
[발설 금지(2022.06.09.~2025.12.31.)]
“이야, 4cm나 컸네.”
170대 초반에 불과했던 키가 어느덧 후반을 넘어 두 번째 자릿수가 바뀔 지경.
어쩐지 요즘 공기가 좀 더 맑다 싶더라니.
“능력치도 꽤나 올랐네.”
어제 던전 공략 이후로 또 한 번 상승한 능력치도 눈에 띈다.
가장 많이 상승한 건 역시나 마력.
어느덧 40을 바라보는 마력 수치를 보며 묘한 의구심이 든다.
“어째 능력치 성장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은데….”
보통 능력치는 수치가 높을수록 한 단계, 한 단계 올리는 게 무척이나 어려워진다.
그런데 20에서 35까지 오른 마력 수치의 성장 속도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빨라지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든다.
이쯤 되니까 슬슬 무서워질 지경이다.
단순히 재능이라는 말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선 것만 같아서.
강해지는 거야 더없이 좋은 일이기는 한데….
“이러면 꼭 무슨 일이 생기더란 말이야.”
S급 헌터로 한 번 살아봐서 아는데, 강한 힘 주변에는 많은 것들이 모인다.
사람도 모이고, 돈은 쌓이고, 명성은 하늘을 찌른다.
여기까지는 참 좋은데…, 문제는 사건과 사고 또한 뒤따른다는 점.
굳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건들이 주변에서 벌어지고, 이에 휘말리게 된다.
예전에 동료에게 이러한 일로 하소연했던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숙명이란다.
힘을 지니고 있기에, 강자이기에 피할 수 없게 설계된 운명.
“그때는 그냥 개소리인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
녀석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고.
결국 대부분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는 인간에 의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강한 힘 주변에는 사람과 돈이 모여들고.
그렇게 모인 이들의 욕망이 서로 부딪히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는 것 아니겠나.
“…근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가려고 옷 갈아입던 도중 아니었나.
슬슬 시간이 빠듯하다.
팔다리가 짧아진 옷을 벗어두고 새로운 옷을 꺼내 입었다.
검정색 슬랙스에 진회색 셔츠.
원래 입던 옷보다 사이즈가 조금 더 큰 옷들이다.
혹시 몰라서 사뒀던 건데 역시나 유용하게 쓰이는구나.
거울 앞에서 가볍게 옷차림을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왁스를 발라 앞머리를 살짝 넘겼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보면 ‘깐시우’라고 불렀던 스타일.
“이제는 깐도진인가.”
같은 스타일이지만, 이쪽이 조금 더 낫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손시우보단 김도진의 얼굴이 더 잘생겼다.
손시우도 못생긴 건 아닌데… 뭐랄까, 인기빨로 잘생겼단 소릴 듣는 느낌이 강했다.
“다 됐다.”
준비를 끝마쳤다.
옷도 말끔하게 입었고, 머리도 잘 만졌고.
지갑과 스마트폰을 챙겨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는데 건물 앞에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인다.
이제 한 두 번 정도 타본 윤지안의 차였다.
나는 곧장 계단을 내려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 * *
첫 주의 시작인 월요일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세 글자만이 박혀 있었다.
데이트.
그것도 본인이 직접 제안한.
당연하게도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대시해온 남자는 수도 없이 많았고, 그중 일부와는 데이트도 해보았으니까.
그러나 그중 누구와도 인연을 맺지는 않았다.
‘시간 낭비.’
남들은 해보고 싶어서 안달인 달달한 연애가 그녀에게는 시간 낭비로 느껴졌기 때문.
그런 그녀에게 친구들은 말했다.
아직 진짜 마음에 드는 인연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그럼 내가 김도진 씨를…?’
아니, 그것은 아니다.
다만 관심이 갔다.
헌터로서도, 남자로서도.
남자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결국 그때였다.
‘칼라슈의 시련….’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어이없게도 야한 행위를 해야만 나갈 수 있었던 그곳.
그녀는 그때 처음으로 남자의 물건을 보았다.
보기만 했었나.
손으로 만졌고, 마지막에는 입으로 빨아대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평생 갇혀 있어야만 했으니.
그저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여기기로 했고, 김도진과도 이때의 기억은 모두 잊기로 이야기까지 다 해두었는데.
‘잊혀지지가 않아.’
문제는 정작 그녀 본인이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떠오른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감각과 제 손길이 닿을 때마다 자지러지는 그의 모습.
떠올리고 있노라면 묘한 쾌감이 인다.
‘어쩌면 오늘….’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 내가 무슨 생각을….”
가볍게 뺨을 두드려 정신을 일깨운 그녀는 차분하게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무릎 살짝 위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H라인 스커트에 붉은빛이 살짝 도는 갈색 블라우스.
답답한 정장 차림보단 조금 더 숨통이 트인 의상.
거기에 작은 가방도 하나 들었다.
현관을 나서려던 그녀는 큰맘 먹고 굽 낮은 구두 대신 힐을 신었다.
“조금 불편한데….”
발이 좀 불편했지만 구태여 바꿔 신지는 않았다.
명색이 데이트인 만큼, 평소에 입던 것과는 조금이나마 달라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타고 길을 나선다.
목적지는 김도진의 집 앞.
아직 차가 없는 그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