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20)

드넓은 정원 너머로 지어진 으리으리한 대저택의 현관에서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사내가 멋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김정훈, 바로 그였다.

신유정은 이를 빠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물며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두 사람.

“이야, 진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신유정이 먼저 연락도 하고, 우리 집까지 찾아올 줄이야.”

기쁘다는 듯이 조잘대는 김정훈.

신유정은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와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야, 김정훈.”

“응?”

충분히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이 악물어라, 새끼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뻗어나간 신유정의 왼쪽 주먹이 헤실거리며 웃고 있는 김정훈의 오른쪽 뺨에 틀어박혔다.

빠악!

듣기만 해도 뼈가 시큰해질 것만 같은 타격음.

물론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예 힘을 빼지도 않았다.

창졸간의 기습에 김정훈의 신형이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은 녀석은 아픈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동그래진 눈으로 신유정을 올려다봤다.

얼굴의 통증보다 자신에게 벌어진 지금 상황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

“신유정…?”

“닥쳐, 씨발아. 한 번만 더 내 이름 부르면 뒤진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험상궂은 표정과 흉흉한 말투에 김정훈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닫았다.

신유정이 입을 열었다.

“너 김도진 괴롭힐 때 내 이름 들먹였다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정훈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 돼지 새끼가 그렇게 말해? 내가 자기 괴롭힐 때 네 이름 말했다고?”

“내가 누구한테 들었건 그건 네 알 바가 아니고.”

차갑게 들끓는 시선이 녀석을 응시했다.

“왜 네 쓰레기 짓에 내 이름을 팔았냐고 묻잖아, 새끼야.”

그녀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김정훈은 말없이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들어 올린 녀석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서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왜긴, 내가 널 좋아해서지.”

“…뭐?”

김정훈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그 돼지 새끼 싫어했잖아. 패고 싶어도 엄마가 그 새끼를 싸고돌아서 못 팬다고.”

신유정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김도진에 대한 미움이 한창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녀는 분명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정확히는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게임만 하는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 얘기는 김정훈이 알아선 안 됐다.

그때 나눈 대화 상대는 눈앞의 김정훈이 아닌, 다른 친구들이었으니까.

조윤경을 필두로 한 발랑 까진 여자애들 셋.

그녀들이 전부였는데.

“누구한테 들었냐는 중요한 게 아니지. 여기서 중요한 건 네가 하지 못하는 걸 내가 대신 해줬다는 거 아닐까?”

“…이거 완전히 미친 새끼였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소름에 안 그래도 팔에 올라온 닭살이 더욱 도드라졌다.

그녀를 더욱 놀라게 만든 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지은 그의 표정이었다.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아니, 그보다 한 발 더 가서 자신이 잘했다고 믿는 듯, 얼굴에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깨달았다.

저런 놈을 상대로 떠들어 봤자 제 입만 아프다는 것을.

제 행동에 한 점 부끄러움 없어 보이는 또라이에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됐다…, 너 같은 새끼랑 대화 길게 이어가봤자 내 입만 아프지.”

면상에 시원하게 주먹 한 대 꽂고 싶다는 바람은 이루었다.

마음 같아선 멱살 잡고 끌고 가 김도진의 앞에 무릎 꿇리고 사과하게 만들고 싶지만, 놈의 상태로 봐선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트라우마만 더 자극하게 될지도 모르지.

상책은 더 이상 엮이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사는 거라고, 그녀는 결론지었다.

“인생 계속 그렇게 좆같이 살아라. 근데, 내 눈에는 띄지 마. 우연히라도 네 면상 보이는 순간 주먹 나가는 거 못 참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알아서 잘 피해 다녀, 얼굴 찌그러지기 싫으면.”

시원하게 내뱉고 돌아서는 신유정.

“아, 씨발….”

성질대로 내질렀음에도 그녀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다.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김정훈은 자신의 이름을 팔아 그를 핍박하고 괴롭혔다.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친구들과 나누었던 그 말을 어디에서 주워듣고서 말이다.

분명 자신은 죄가 없다.

웬 미친놈이 제멋대로 한 행동에 자신이 물을 책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분명히 그게 맞는 건데.

그런데도 자꾸만 김도진에게 미안한 감정이 솟구치는 건 왜일까.

“좆같네, 진짜.”

혹을 떼러 왔다가 오히려 붙이고 돌아가는 느낌.

신유정은 거칠게 머리를 헝클이며 활짝 열린 대문을 나섰다.

김정훈은 얼굴에 남은 강렬한 통증을 느끼며 신유정이 떠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분명히 내가 경고했던 것 같은데….”

그래.

분명히 말했다.

신유정이 이 사실을 알면 진짜 죽을 수도 있으니, 입단속 잘하라고.

“으음…, 까먹었나.”

과연 뭘 까먹은 걸까.

자신의 경고일까, 아니면 그가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응당 느껴야만 하는 공포일까.

어느 쪽이든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잊은 거겠지.

“그럼 다시 알려주러 가야겠네.”

그는 제 발아래 깔려 꿀꿀거릴 김도진을 생각하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 * *

나와 엘레나는 일단 구두로 같은 팀이 되기로 이야기를 마쳤다.

왜 구두냐면, 아직 조원들이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독단적인 선택만으로 팀을 구성하는 건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모두가 납득하지 않고 불신하는 순간, 유기적인 움직임에 구멍이 생기므로.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득한다…?”

그녀의 특성을 몸소 체험하며 깨달았다.

피아 구분이 안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의 발생 원인.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까지.

그럼 만사형통 아니냐고?

애석하게도 아니다.

“시간이 좀 걸린단 말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도 적잖은 시간이.

한마디로 그때까지는 특성의 단점을 그대로 안고 가야만 한다는 뜻.

그것을 조원들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것이며, 또 팀을 이뤘다고 한들 단점을 해결하는 동안 어떤 식으로 전술을 짜야 하는지.

고민에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엘레나를 메인 탱커로 세우면 또 간단한 방법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러면 또 신유정이 반발할 것 같고.

“아유, 머리 아파.”

자꾸만 하나씩 걸리는 문제 때문에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고 있는 사이.

옥상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인가 싶어 고개를 돌아봤더니.

“…야, 뭐 좀 물어봐도 되냐.”

신유정이다.

표정이 어제보다 더 별로인데, 김정훈을 만나서 뭔가 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뭔데?”

내가 되묻자, 녀석이 뜸을 들였다.

또 말하기가 영 어려운 주제인 듯.

그러나 이번에는 생각보다 빠르게 녀석의 입이 열렸다.

“너는 내가 너한테 미안해야 한다고 생각하냐…?”

저게 대체 뭔 말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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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듣기 힘든 화두를 툭 내뱉은 녀석은 터덜터덜 걸어와 내가 앉아 있는 평상에 제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이제야 맞춰진 눈높이.

녀석의 동그란 눈에는 깊은 회한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답답한 마음에 묻자, 신유정이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오늘 김정훈 그 새끼를 좀 만나고 왔거든?”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뛰쳐나갈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어제야 내가 약속을 걸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지만, 이 녀석은 기본적으로 마음에 무언가를 오래 담아두거나, 묵혀두는 걸 싫어하는 타입이니까.

예상치 못한 것은 녀석의 음울한 표정.

면상에 주먹 한 대 꽂고 속 시원하게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만나서 뭐 했는데?”

“일단 만나자마자 면상에다 주먹부터 꽂았어.”

음, 역시.

다짜고짜 얻어맞은 놈의 표정이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심지어 때린 사람이 지금까지 좋아해 왔던 여자라.

모르긴 몰라도 놈의 인생에서 기분 더럽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지 않았을까.

“일단 후려갈기고 물었지. 왜 내 이름을 팔아먹냐고.”

“그랬더니 걔가 뭐래?”

궁금하네.

과연 뭐라고 했을지.

단숨에 쏟아질 것만 같은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신유정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진 걸로 봐선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라도 들은 모양.

“…나 때문이래.”

그거는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

“그러니까, 음….”

뜸을 들이는 걸로 봐선 내가 알려준 사실 외에 또 무언가 더 있나 보다.

녀석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내게 말했다.

“내가 너 싫어하니까 나 대신 자기가 널 괴롭혔대.”

고개를 떨구는 신유정.

요컨대 말을 요약하자면 결국 놈이 날 괴롭힐 때마다 신유정 곁에 다가가지 마라, 그 집에서 나가라와 같은 말들은 구실에 불과했단 거네.

중점은 날…, 아니, 이 몸뚱어리를 괴롭히고 싶었던 거고.

“음….”

솔직히 이 몸뚱어리가 당한 것에 대한 분노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몸에 박혀 있던 트라우마가 발작을 일으켰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질을 지닌 자’ 특성을 얻게 된 이후 비로소 이 몸뚱어리가 내 것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말인즉, 더 이상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에 몸이 멋대로 반응하는 일이 없어졌다는 뜻.

그렇다고 또 화가 안 난다는 건 아니다.

머릿속에 남은 놈의 괴롭힘 수준은 명백히 선을 넘었다.

고작 열여덟, 열아홉밖에 먹지 않은 녀석의 행동이라기엔 과감하고, 잔인했다.

이런 어린놈의 쉑기를 보면 가끔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하다고 주장한 순자의 성악설이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니까.

“그때는…, 그래. 내가 솔직히 너 싫어했다. 그것도 존나 많이.”

“알지.”

모를 리가 있나.

안 그래도 가만히 있어도 날카롭게 생긴 얼굴로 혐오의 감정까지 담아 노려보는 녀석의 눈빛은 그야말로 하나의 무기와도 같았다.

솔직히 손시우의 몸으로 봐도 약간 쫄았을지도.

“가끔은 너 하는 짓이 존나 답답해서 패고 싶을 때도 많았고.”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찐도진의 행실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으니.

느지막한 오후에 일어나서 아줌마가 챙겨준 반찬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게임 삼매경.

그러다가 중간에 인터넷 둘러보면서 한주희가 잘 나온 사진을 스크랩해서 저장…, 아니, 이 또라이 새끼가 진짜.

“후우.”

진정하자, 진정.

아무튼 사진을 저장…하고, 역시 아줌마가 챙겨준 반찬으로 저녁 먹고 다시 게임.

그렇게 새벽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잠이 드는 일상의 무한 반복.

어느 정도 녀석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신유정의 입장에서 찐도진은 제 엄마 등골 빨아먹는 기생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

“그래서 뭐…, 가끔 얘기했어. 너도 알지? 나랑 같이 다니던 발랑 까진 년들.”

“아…, 그 세 명.”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팬티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교복을 줄여 입었던 발랑 까진 여자애 셋.

왜인지는 몰라도, 신유정은 자기와는 결이 사뭇 다른 그 세 명이랑 어울려 다녔었지.

“그년들이 남자에 미쳐 있고, 또라이 같은 기질이 있어도…, 나한테는 일단 친구였거든? 내 외모만 보고 무섭다고 다들 쫄아 있을 때, 그년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왔으니까.”

“아….”

그런 비하인드가 숨어 있었구나.

그렇다면 친구로 지낸 게 이해되지.

모두가 멀리할 때 다가와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법이니까.

옛날에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한주희에게 청혼해서 결혼 승낙받고 장모님, 장인어른 댁에 처음 찾아뵈었을 때였다.

고아라고 자기네 가문과는 급이 안 맞는다며 어찌나 면박을 주던지.

결혼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수십 번쯤 곱씹었을 때.

유일하게 처제만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줬었다.

그때 어찌나 고맙던지,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마저 들었더랬다.

“아무튼…, 내가 그년들이랑 대화하다가 가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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