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20)

“그랬지.”

여기서는 내가 아닌, 이 몸뚱어리에 남아 있는 기억으로 대답하는 게 맞겠지.

담백하지만 망설임 없는 즉답에 녀석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본인이 저렇게 힘들어할 거면 왜 얘기를 꺼냈담.

아, 알겠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곤 해도 이 몸뚱어리에서 일어난 일인데, 내가 너무 타인 대하듯 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거구나.

“신경 쓰여?”

“어? 어…, 그렇지.”

의외네.

상당히 쿨한 녀석이라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몸이 겪은 기억을 내가 고스란히 흡수하면서 어느 정도 간접적인 체험이 되기는 했지만.

고통이나 괴로움 따위가 남은 것도 아니고 그저 장면으로 남은 거라 공감이 덜 되는 느낌?

“너무 신경 쓰지 마.”

“어, 어?”

“김정훈이 날 괴롭히기 시작한 주된 이유가 너기는 해도, 그냥 김정훈이 나쁜 새끼인 거지 네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뭐?”

어라.

분위기가 갑자기 험상궂게 변했다.

내 딴에는 녀석이 그런 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인데, 내가 방금 뱉은 말 중에 잘못된 거라도 있었나.

“김정훈 그 새끼가 널 괴롭힌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몰랐구나?

난 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꺼내길래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하긴…, 김정훈이 매번 이 몸뚱어리를 패고 나서 자기가 괴롭히는 이유를 신유정이 알게 되면 네 목숨은 거기서 끝이라고 협박했었으니,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겠구나.

근데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다.

그러면 얘는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거지.

“말해.”

당장에라도 찾아가서 놈을 죽일 듯이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유정.

아무래도 말을 잘못 꺼낸 것 같다.

“말하라고.”

소주잔을 쥐고 있는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간다.

나는 곧장 손을 뻗어 녀석의 팔을 붙잡아 그 안에 쥐어진 소주잔을 빼냈다.

“일단 진정부터 해.”

“어떻게 진정해야 되는데.”

…그러게.

솔직히 이 상황에서 진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일단 난 못할 것 같긴 해.

“어…, 심호흡부터 하자.”

“해서 이 정도니까 빨리 말하기나 하라고.”

머릿속에서 묘한 그림이 그려진다.

녀석의 화를 적절하게 제어할 수만 있으면 아주 쾌감 있는 복수가 될 수 있을지도…?

“나랑 약속 하나만 해.”

“이 상황에서 무슨 약속.”

“내 말을 듣고 아무리 화가 나도, 오늘은 절대 녀석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최소한 다음날 술에서 깬 뒤에 전화를 걸든, 만나든 해.”

아니면 정말로 홧김에 김정훈 뚝배기를 박살 낼 것 같아서 그래.

녀석의 고민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좋아.”

지금 가나, 술 깬 다음 날에 가나 별반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하나 보지?

그런데 많이 다를 거다.

술이라는 게 원래 사람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격하게 만들거든.

“그러니까…, 처음 녀석과 엮였을 때부터 얘길 하자면….”

난 정말 딱 사실만을 말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을 고스란히 읊어주었다.

왜 녀석이 나를 그리도 싫어하기 시작했는지, 뭐 때문에 그리도 패고 또 팼는지.

굳이 과장할 이유가 없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실만으로도 김정훈이라는 녀석은 갱생의 여지가 없는 쓰레기니까.

지금도 봐라.

쾅!

“김정훈, 이 개새끼…!”

모든 얘기를 들은 신유정이 잔뜩 화가 나서 테이블을 내려치고 있잖나.

근데 그건 좀 민폐야….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일단 나가자. 사람들 다 놀라서 우리만 쳐다본다.”

신유정이 치켜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의 고개가 원위치로 돌아간다.

사람 무서운 건 알아가지고….

녀석이 안 가겠다고 떼를 쓰면 어쩌나 했는데 거칠긴 해도 일단 일어나기는 한다.

카운터에 가서 곧장 계산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녀석이 끼어든다.

“내가 계산할 거야, 꺼져!”

“…….”

이게 왜 엄한 데다 화풀이야?

…그래도 일단 잘 먹었습니다.

“아아악! 씨발 새끼!”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욕을 쩌렁쩌렁 내뱉는 녀석을 보며 고개를 저은 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주인 아줌마한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애가 그날이라서 좀 날카로울 뿐입니다. 아주머니가 같은 여자로서 이해 좀 해주세요.”

“학생이 고생이 많겠네….”

위로 코인 한 개를 적립했다.

.

.

.

.

.

.

.

수업이 끝난 뒤.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는 임나은의 말을 거절하고 학교에 남았다.

신유정은…, 나보다 두 시간 일찍 수업을 끝내고 곧장 하교했다.

아마 김정훈을 만나러 가려는 거겠지.

마지막 수업 들어가기 전에 떠나는 녀석의 얼굴을 살짝 봤는데, 독이 바짝 올라 있더라.

어제처럼 누구 하나 죽일 정도는 아니고…, 반죽음 상태 정도는 만들 정도?

곧 신유정에게 죽어 나갈 김정훈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손자병법이 떠오른다.

차도살인.

지금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한 놈 골로 보냈겠다….”

나는 내 할 일이나 해야지.

오늘 임나은과의 귀가를 거절한 건 오랜만에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대학교 체단실이 그렇게 잘 꾸며져 있다는데, 아직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그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게으르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

학생 수가 많은 만큼, 체단실도 여러 곳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마법 학과에 가장 가까운 곳을 골라 찾아갔다.

체단실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안으로 들어섰다.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운동 기구의 향연.

살 빼겠다고 다닌 헬스장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신식 기구들이 넘쳐난다.

아, 그렇다고 맛있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난 한 번도 운동을 ‘맛있게’ 해본 적이 없거든.

그냥 살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억지로 했을 뿐이지.

“어휴…, 눈앞이 캄캄하네.”

남자의 힘의 근원은 하체.

가볍게 준비 운동을 한 뒤, 하체부터 조지기 위해 레그 익스텐션 기구에 앉아 중력 마법이 걸려 한없이 무거운 롤패드를 힘겹게 들어 올리는데.

“후욱, 후욱…!”

맞은편에 웬 헬창 하나가 내 시선을 강렬하게 잡아끌었다.

빛이 살짝 바랜 듯한 금발, 강렬한 투지로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아.”

생각났다.

엘레나 미하일로바 도브레바.

내가 그토록 군침 흘렸고, 또 아쉬워했던 탱커 인재!

세상 참 좁다.

설마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흐읏, 흐으읏…!”

전투적으로 운동하는 그녀를 나도 모르게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

벤치 프레스를 하는데 들어 올리는 무게가 상당하다.

저 커다란 원판 하나에 150kg 정도니까…, 양쪽 세 개씩 도합 여섯 개로 900kg.

“으음, 음.”

자연스럽게 몸을 체크한다.

여성의 몸이라 과하게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바벨을 밀어 올릴 때마다 근육이 꿈틀거린다.

“스으읍….”

아, 이거 너무 아쉬운데.

고작 1학년에 저 정도 힘과 체력이면 탱커 중에서 최소 상위권 이상인데.

저대로 잘만 키우면 진짜 끝내주는 물건이 하나 나올 것 같은데….

못내 아쉬운 마음에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가 얼떨결에 눈이 마주쳤다.

“…….”

잠깐의 침묵.

쿵!

바벨을 내려놓은 엘레나가 손을 한 번 털어낸 뒤, 곧장 나를 응시하며 걸어왔다.

근처까지 다가온 그녀가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노려본다.

“당쉰.”

살짝 꼬부라지는 말투.

“자꾸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것, 매너입니다.”

아이고.

내가 뚫어져라 쳐다봐서 운동에 방해가 됐나 보다.

미안한 마음에 곧장 사과하려 했는데, 그녀의 말이 한 박자 더 빨랐다.

“나, 아니다. 만만한 사람. 외쿡 사람이라고 무시하면 다친다, 큰 코. 한 번만 둬 쳐다보면… 그땐 너, 없다. 눈깔.”

어, 음.

…눈깔이 없다는 건 직접 파버린다는 얘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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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cm에 달하는, 여성치고는 상당히 큰 키.

긴 속눈썹 아래에 빛나고 있는 초롱초롱한 푸른색 눈동자.

크고 오똑한 코에 도톰…이 아니라 두툼한 입술.

눈, 코, 입 전부 시원시원하게 예쁘고 큰데 얼굴은 굉장히 작다.

어떻게 저게 전부 다 들어가 있나 생각이 들 정도.

“이해했습니까, 내 말?”

커다란 눈동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게 보인다.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심어주기 위해 일부러 저렇게 뜬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입술을 살짝 짓씹거나, 동공이 흔들리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

애써 지은 강한 표정이, 내게는 애처롭게 느껴졌다.

돈을 벌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머나먼 이국의 땅을 밟은 외국인.

그런 그녀에게 쏟아진 조롱은 얼마나 될 것이며, 또 예쁘장한 얼굴을 보고 뻗어진 검은 손길을 대체 얼마나 될지.

저 표정은 방어기제에 가깝다.

자신을 쥐고 흔들고자 하는 온갖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복어가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심어주기 위해 제 몸을 부풀리듯, 그녀도 상대방이 자신을 얕잡아보지 않도록 억지로 기세를 부풀리는 것이다.

“당신 예의는 미국 갔습니까? 사람 말하면 대답합니다.”

“…….”

생각에 앞서 일단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를 좀 풀어야겠다.

경계심 가득한 이에게 어설픈 사과는 독이 될 뿐이다.

이럴 때는 조금 과하더라도 진지한 모습으로 사과를 건네는 게 꼬여버린 첫 만남을 그나마 푸는 데에 도움이 될 터.

“미안합니다. 운동을 너무 잘하셔서 지켜봤을 뿐, 불순한 의도는 없었어요.”

고개까지 숙여가며 건넨 정중한 사과에 그녀의 기세가 한층 누그러들었다.

“흥…! 이번 한 번만 봐줍니다.”

아니, 누그러진 수준이 아니라 기쁨의 콧바람과 함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가 있다.

아무래도 사과와 함께 건넨 칭찬어린 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방향을 잘 돌린 듯하니, 이대로 통성명이나 나눠볼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통성명이나 할까요?”

“통…, 성명?”

눈살을 찌푸리는 엘레나.

통성명이라는 말은 조금 어려웠나.

“어…, 자기소개요.”

“아! 내 이름은 엘레나 미하일로바 도브레바입니다. 편하게 엘레나라고 부르십시오.”

회화책 같은 걸 보고 그대로 외운 듯한 딱딱하고, 정중한 자기소개.

아까의 위압적인 태도와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에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전 김도진이에요.”

내 이름을 들은 그녀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도진 킴…? 당신, 나 압니다.”

말이 약간 오묘하네.

내가 엘레나를 알고 있다는 건지, 엘레나가 나를 알고 있다는 건지.

반가운 표정만 봐선 후자가 맞는 듯한데.

“당신 소문 많습니다. 훌륭한 위저드라고.”

“하하, 그래요?”

어렴풋이 알고 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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