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20)

“결국 필요한 건 근접 딜러, 탱커 정도.”

헌터 업계에는 수많은 직업군이 존재한다.

높은 랭크의 던전으로 향할수록 그러한 직업군을 얼마나 이해하고,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던전 공략의 속도나 체감 난이도가 위아래로 크게 요동친다.

지금도 마찬가지.

내가 필요하다고 말한 탱커 그리고 근접 딜러는 직업보다 좀 더 포괄적인 역할군일뿐이다.

말인즉, 현재 필요한 역할군에 해당하는 이들 중 어떤 직업을 팀으로 삼을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거다.

“으음….”

테이블 위에 올려진 태블릿 화면에 수많은 얼굴들이 띄워져 있다.

이들 모두가 팀 편성이 가능한 1학년 동기들이다.

그중 회색으로 표시된 이들은 이미 팀 편성이 완료되었다는 뜻.

아직 편성이 되지 않은 학생들의 면면을 살피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손서연.

얘가 왜 여기에 껴있는 걸까.

“…이 사람은 2학년 아니었나?”

최대한 무관심한 척 묻자, 신유정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아, 이 선배? 듣기론 실습 경험이 없어서 이번 학기 동안 1학년들이랑 같이한다고 하던데.”

“그렇구나.”

실습 경험이야 없을 만하지.

마탑은 오로지 마법을 배우고, 연구하는 곳이니까.

마법 하나만 놓고 보면 한국 대학교 커리큘럼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그 외 헌터로서 필요한 기본 소양은 거의 익힐 수 없다.

서연이도 마찬가지일 거다.

마법은 기똥차게 배웠을지 몰라도, 헌터로서의 소양은 거의 배우지 못했겠지.

옆에 있던 임나은이 한마디 거들었다.

“근데 그거 알아? 이 선배님, 마법 학과 수업이랑 기초 검술, 기초 근접 전투까지 같이 듣는대.”

…마법에 검술?

마검사라도 되고 싶은 건가, 얘는.

그거 거의 불가능할 텐데.

헌터 사회가 자리 잡은 지도 어언 수십 년.

검과 마법, 양쪽에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천재의 수는 제법 되었다.

그들 모두가 어느 한쪽도 썩히고 싶지 않아 검과 마법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A급 언저리에도 올라서지 못했다.

“그거 엄청 비효율적이라고 들었는데.”

그에 대한 답은 신유정이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에 있다.

다름 아닌 비효율적이라는 것.

나는 손시우의 몸으로 30년 가까이 검 하나만을 갈고닦았다.

그 세월 동안 수만에 이르는 몬스터를 베어 죽이고, 수만 시간 홀로 검을 휘두르고, 수천 번 고수들과 겸을 겨룬 뒤에야 끝도 아닌, 끝자락을 겨우 잡았다.

마법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그러했듯, 한주희 또한 수십 년 동안 마법 하나만을 갈고닦았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녀와 나 모두 각각의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검과 마법은 배움의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나의 수련을 몸에 체득하는 것도 벅찬데 각기 다른 두 가지의 수련을 병행한다는 건 단순히 효율을 반으로 가르는 게 아니라, 반의반으로 토막을 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한데, 배워야 할 것은 두 배, 아니, 세 배로 늘어나게 되어버리니 이를 대성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거나 포기하게 된다.

그러니 비효율적이라는 말이 안 나오고 배기겠냐고.

숱한 실패가 쌓이면서 현대에는 마검사가 되고 싶다는 헛된 꿈을 품는 이가 없다.

양쪽 모두의 재능을 지녔으면 대다수 마법사의 길을 택한다.

마법사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매우 적은 직업군이라 웬만큼만 해도 좋은 대우를 받거든.

“근데 그 마검사라는 거, 진짜 가능하긴 한 건가.”

“으응…, 난 안 될 것 같아.”

신유정이 던진 의문에 임나은은 고개를 저었다.

“마법 하나만 배우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여기서 검까지 배우는 건….”

“하긴…, 난 검이랑 방패 같이 다루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검과 마법은 더 힘들겠지.”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회의적인 표정을 짓는 두 사람.

누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나도 그녀들과 같은 입장이다.

마검사, 그것도 진또배기 마검사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탄생할 수 없다.

그럼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는 가능하냐고?

가능하지.

내 생각에 진정한 마검사로 거듭날 방법은 딱 두 가지뿐이다.

천재라는 범주로도 묶을 수 없는, 그야말로 하늘이 실수로 땅에 태어나게 한 게 아닐까 싶은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인생을 두 번 살면 된다.

한평생 검 또는 마법만 익히고 죽은 다음, 두 번째 삶에선 다른 하나만 파고들면 되잖아?

그렇게 하면 두 개 전부 대성할 수 있겠지.

물론 그 두 가지를 전투에서 조화롭게 활용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의 얘기겠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근데 이 선배는 저번에 보니까 검도 잘 쓰기는 하던데.”

“응, 나도 보고 깜짝 놀랐어.”

“내 생각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선배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왜?”

순진한 표정으로 되묻는 임나은을 향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신유정.

“왜긴 왜야. 이 선배 부모가 누군지 몰라?”

“아, 손시우 헌터랑 한주희 헌터!”

“그래. 우리나라에서 검과 마법으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두 S급 헌터의 딸이잖아. 두 사람의 유전자를 동시에 타고났으니 그 재능이 어느 정도겠냐고, 안 그래?”

“응, 유정이 네 말 듣고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임나은의 시선이 별안간 나에게로 향했다.

“도진아, 네 생각은 어때?”

가만히 듣고 있던 나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내 생각이라.

“글쎄….”

지난번에 서연이가 펼쳤던 수류검법이 여전히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이미 말했듯, 나는 그것을 딸내미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알려준 적이 없다.

만약 정말로 내 검술을 눈으로 보고 따라 익힌 거라면 녀석은 앞서 말한 일반적이지 않은 두 가지 방법 중 전자에 해당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어렴풋한 가능성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였다.

드르륵!

나무 의자와 대리석 바닥이 마찰을 일으키며 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뒤편에서 아주 강렬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임나은과 신유정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서, 선배님!”

“아….”

두 사람의 아연실색한 표정에 고개를 뒤로 돌렸더니, 조금 전까지 우리 대화의 중심이었던 손서연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다.

의자 끌리는 소리와 위치를 생각해보건대, 우리 뒤편에 앉아 있었나 보다.

“죄, 죄송해요. 선배님이 계신 줄 정말 몰랐어요!”

“…죄송함다.”

고개까지 숙여가며 사죄의 말을 건네는 두 사람.

…쟤네 갑자기 왜 저래?

우리가 나눈 대화 중에 녀석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말이라도 있었던가.

“갑자기 웬 사과?”

궁금해서 물으니, 두 사람이 눈치 좀 챙기라며 눈빛으로 나를 타박한다.

아니, 내가 잘못한 거야?

억울한 마음이 들려고 할 때,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서연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진… 후배 말이 맞아. 너희는 잘못한 게 없어.”

이거 봐.

당사자도 내 말이 맞다고 하는데 왜 자기들끼리 지레 겁먹어서 저러는지, 원.

그건 그렇고…, 딸내미한테 후배 소리 들으니까 기분이 엄청 묘하다.

더 이상 부녀 관계가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못 박는 듯한 느낌.

좋은 감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쁘다고 보기도 애매하고.

그저 묘하다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멍하니 녀석을 올려보다가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무미건조한 눈빛.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팀원을 구하고 있다고 들었어.”

“…예.”

싸늘하다.

“그 자리…, 내가 채워도 될까? 근접 딜러로.”

“…….”

어째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냐.

딜레마가 찾아왔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서연이는 분명 남아 있는 근접 딜러 중 뛰어난 자원이 맞다.

유사시엔 원거리 딜러로도 활용 가능하니 사실상 근접 딜러가 아닌, 전천후 딜러라고 보는 게 맞겠지.

단 한 번에 불과했지만, 그때 보여준 검술은 웬만한 1학년 검사들보단 훨씬 뛰어났고.

여기까지만 보면 안 뽑으면 이상한 수준인데….

내가 아직 이 아이를 편하게 볼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나도 안다.

이미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김도진으로 살아가기로 한 이상 녀석과 나는 부녀관계가 아닌 남남에 불과하다는 거.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어디 맺고 끊는 게 마음 먹은대로 되는 일이던가.

내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랄지, 전생이랄지…, 옛 인연들을 조금 더 초연하게 바라보기 위한.

그러니 아쉽지만, 지금의 제안은 거절하자.

“아무래도 그건 좀 곤란….”

“난 찬성!”

“선배님 정도 실력자면…, 거절할 이유가 없긴 하지.”

“그럼 벌써 찬성 두 표니까 결정 난 거네! 잘 부탁드려요, 선배님!”

“한 학기 동안 잘 부탁드림다, 선배님.”

“…나도 잘 부탁해.”

이미 결정을 마친 듯, 서로 손을 맞잡고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는 세 사람.

…다수결로 정하는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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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의 성적을 좌우할 팀 편성.

거기에 내 사감을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임나은과 신유정이 서연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나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능력만 놓고 보면 확실히 매력적인 카드인 건 분명하니까.

오히려 아직까지 다른 팀에 속하지 않은 게 이상한 수준이다.

저 정도 실력이면 팀 편성 공지가 나간 이후에 많은 제의가 쏟아졌을 텐데 말이지.

“그럼 한 학기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응, 나도 잘 부탁해.”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무리 임시라고는 해도 던전 공략을 위해 결성한 팀이다.

팀의 화합을 위해선 입을 꾹 닫고 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기에, 먼저 말문을 텄다.

자연스럽게 서연이가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합류했다.

동그란 테이블을 중심에 두고 네 명의 머리가 태블릿 위에 드리워졌다.

“남은 한 사람은 누구로 하지?”

“아무래도 탱커가 좋지 않을까?”

탱커라.

한 파티에 탱커를 둘이나 기용할 때 장단점은 명확하다.

두 탱커의 손발이 잘 맞으면 절대 뚫리지 않는 전열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딜러 대신 탱커를 한 명 더 기용한 만큼의 공격 손실이 난다는 점이 단점으로 따라붙는다.

그럼 우리 파티에선….

“탱커가 좋겠다.”

의견을 꺼내자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몰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은 모양.

“나은이, 서연 선배, 나까지. 어느 던전을 가도 적정 난이도라면 대미지는 충분하다고 봐.”

솔직한 말로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준비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폭격이 가능한 마법사에 원, 근거리 딜링이 모두 가능한 마검사.

거기에 나까지.

이 정도 구성원으로 대미지가 부족한 던전이면 그건 사실상 난이도 선정이 잘못된 거라고 봐야 한다.

“확실히…, 일리가 있네.”

신유정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납득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표정이 좋지 못한 건 탱커를 둘로 기용했을 때 본인의 기여도가 그만큼 떨어지게 되니까 그걸 걱정하는 거겠지.

그것도 어느 정도 해결해줄 방법은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유정이 너를 메인 탱커로 세우고, 다른 한 명을 서브 탱커로 세울 거야.”

메인과 서브의 기여도는 확실하게 나뉜다.

그래도 나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녀석도 그 정도는 이해하겠지.

신유정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 정도라면 뭐…, 나도 찬성.”

서연이나 임나은도 딱히 이견은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의견도 모아졌겠다.

곧장 태블릿을 조작해 탱커 포지션 학생들의 명단이 나열된 페이지로 넘긴다.

서른 남짓한 탱커.

그중 절반 이상이 이미 회색으로 뒤덮여 있다.

탱커는 파티를 구성할 때 가장 중요시되는 자원 중 하나인 만큼, 발 빠른 팀은 탱커부터 일단 영입하고 봤겠지.

“얘는 어때?”

“아, 걔는 힘이 약해.”

“그럼 얘는…?”

“그 새끼는 그냥 방패를 못 써.”

얘기는 신유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무래도 녀석이 탱커다 보니 다른 녀석들의 장단점도 나름 잘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라.

나는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멀어져 조용히 태블릿을 응시했다.

남아 있는 탱커는 대략 열두 명.

대부분 하위권 성적의 탱커들.

그중 묘한 인물이 눈에 띈다.

“외국인?”

엘레나 미하일로바 도브레바….

“러시아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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