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20)

고등학교 때 알고 지냈던 남자애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면서 다니는데 그걸 어찌 모를까.

‘그때가 끝인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졸업식.

김정훈은 그녀에게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고 고백했었다.

남자에 관심이 없었던 신유정은 이를 매몰차게 거절했고.

그때 이후로는 그저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 좋아하고 있었다고?’

전혀 몰랐다.

가끔 오는 연락은 그저 친구로서 안부를 묻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놀라고 있는 사이.

“아, 맞다.”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일들을  하나둘씩 떠올리던 조윤경은 까맣게 잊고 지냈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걔 아직도 너희 건물 옥탑방에서 살아?”

옥탑방.

그녀가 사는 건물에 옥탑방은 하나 뿐이고, 그곳에 사는 사람 또한 한 사람 뿐이었다.

“옥탑방이면…, 김도진?”

“이름이 그랬나? 맨날 돼지라고 불러서 몰랐네. 아무튼 걔.”

신유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돼지라.

그땐 하도 살이 쪄서 분명 그렇게 불렀었더랬지.

“걔 옛날에 너 엄청 무서워 했었잖아. 요즘도 만나면 막 벌벌 떨고 그래?”

조윤경의 말에 신유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야, 오버하지 마. 무슨 벌벌 떨었다고….”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말 좀 더듬고, 어려워한 정도였지.

적어도 그녀의 기억 속에는 그랬다.

허나 조윤경의 기억은 달랐다.

“에이, 아니긴. 걔가 정훈이 다음으로 무서워한 사람이 너였을걸?”

“…뭐?”

신유정의 얼굴에 맥이 탁 풀렸다.

김정훈은 학교 내에서 김도진을 가장 악랄하게 괴롭혔던 일진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 악랄한 놈 다음으로 자신을 무서워했다니….

누가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갈긴 듯한 충격이 그녀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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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숨긴 채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야, 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냐? 걔가 날 왜 무서워…, 그래, 무서워하는 건 인정.”

그간 김도진의 태도로 보건대 그가 자신을 무서워했단 것은 맞다.

‘…내가 좀 험상궂게 굴긴 했지.’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은 제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

누구는 내숭을 떨지 않아 좋다고도 하지만, 또 누구는 과한 솔직함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말하자면 김도진은 후자로 인해 생겨난 피해자다.

그를 볼 때마다 싫어하는 표정을 단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으니까.

누가 봐도 ‘아, 얘는 쟤를 싫어하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법한 표정.

거기에 오래 봐온 친구들조차 이따금 보면 무섭다고 말하는 그녀의 차가운 표정까지 더해졌으니,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김도진에겐 무섭게 느껴졌겠지.

그러나 거기까지다.

“아무리 그래도 김정훈이랑 나를 비비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김도진에게 있어 김정훈 다음으로 무서운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

그것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걔를 패길 했냐, 아니면 돈을 뜯기라도 했냐.”

그녀는 이른 나이에 각성자가 되었고, 그때부터 헌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리다고 해도 각성자는 각성자.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성격이지만, 제 주먹이 흉기라는 것 정도는 안다.

또한 그녀가 원하는 것은 만인이 우러러보는 헌터.

그러기 위해선 제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입힐 만한 논란거리 또한 없어야만 했다.

폭력, 그중에서도 학교 폭력은 그야말로 이미지 나락 보내기 딱 좋은 행위다.

지금까지 피해자들의 뒤늦은 고발로 이미지가 박살 난 헌터의 수가 몇이던가.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주먹을 휘둘러본 적이 없다.

물론 성격이 개떡 같아서 기분이 안 좋으면 욕을 좀 하기는 했지만….

현재 국민 헌터라 불리는 손시우도 과거에는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데, 지금은 아주 온화한 성격인 걸 보면 세월이 차차 해결해주지 않을까.

신유정이 열변을 토하자, 조윤경이 그만하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니, 나는 네가 그래서 남들 시선 피해서 팼나 했지….”

“안 팼다니까?”

“아유, 알았어!”

조윤경은 삐죽 튀어나온 신유정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알겠으니까 그 돼지 얘기는 그만하고, 다른 얘기나 하자. 응?”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무심코 나온 ‘돼지’라는 단어가 오히려 신유정의 기분을 미묘하게 어긋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어졌다.

지금 김도진이 어떻게 변했는지.

“야, 너 지금 걔 보면 돼지라는 말, 절대 못 한다?”

“응? 왜?”

“걔 살 다 뺐어.”

신유정의 대답에 조윤경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말도 안 돼!”

그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김도진의 몸에 들러붙은 살은 가벼운 노력으로 뺄 수 있을 수준을 넘어섰다.

강인한 정신력과 인내심이 동반되는 기나긴 싸움.

그렇기에 그녀는 김도진이 평생 살 빼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딱 봐도 그는 강인한 정신력이나 인내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화들짝 놀란 조윤경의 표정이 신유정의 마음에 들었다.

마치 제 일처럼 뿌듯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흐흥…, 너 걔 보면 깜짝 놀랄걸? 아니, 아예 알아보지도 못하겠다.”

“…그 정도야?”

“어, 완전히 그…, 뭐야, 그래, 환골탈태! 거의 그 수준이야.”

“환골탈태라고 말할 정도면…, 잘생겨졌나 봐?”

“맞아. 걔 잘생겨짐. 약간 눈도 서글서글하고, 코도 뾰족하고, 턱선이….”

그에 대한 자랑을 미친 듯이 늘어놓기 시작한 신유정.

그 때문에 그녀는 보지 못했다.

조윤경이 제 얘기를 듣고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고 있음을.

.

.

.

.

.

.

.

기분 좋게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김도진을 휘어잡을 방법도 들었겠다, 마냥 의욕이 고취되어야 하는데.

조윤경이 무심코 꺼낸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하, 참나. 어떻게 김정훈이랑 나를 비벼?”

김정훈은 김도진을 괴롭히는 데에 앞장선 장본인이다.

빵셔틀은 기본이고, 마음에 안 들면 살집이 두꺼워 샌드백 같다는 이유로 주먹질까지 서슴지 않던 악질 중의 악질.

그런 놈 다음이 자신이라고?

“웃겨, 진짜.”

어이가 없다 못해 억울하기까지 했다.

김정훈은 그녀와 김도진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폭군 같은 녀석이었다.

우월한 체격에서 나오는 뛰어난 싸움 실력에 빵빵한 집안까지 더해져 학교 선생들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

그런 그의 행사를 일부나마 막아설 수 있는 존재는 자신이 유일했다.

그래서 가끔 그가 선을 넘을 때면 막아주기까지 했다.

…물론 김도진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흠씬 두들겨 맞은 그를 보고 발을 동동 구를 제 엄마 때문이었지만.

“에이, 씨.”

후련해질 만한 변명들을 이것저것 내뱉고 나서도 찝찝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실은 김정훈의 다음이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가슴에 남은 찝찝함은 정확히 말해 현재 김도진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었다.

과거에서부터 켜켜이 쌓아 올린 인과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와의 관계는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이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존나 성급했구나, 나.”

그가 각성했고, 그것이 마법사 직업군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한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인물이 갑자기 친근한 척 달라붙었을 때.

과연 김도진은 어떤 기분과 생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역겨운 년? 아니면…, 속물?”

아니면 둘 다인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결단코 좋은 감정은 아니었으리라.

사실 그 전부터 가슴 한편에 영문 모를 찝찝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와 섹스까지 하고서 육체적으로는 한없이 가까워진 것 같은데, 정작 그를 남자친구라 부르기에는 미묘한 느낌이 들어서 왜 그런 걸까 했는데.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묵은 감정.”

자신과 김도진.

두 사람 가슴에 들어찬 묵은 감정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털어내지 못하면 그와 만리장성을 쌓아도 절대 심적으로 가까워질 수 없음을.

“하…, 씨발.”

그녀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개졌다.

지난 몇 달간 그에게 했던 행동들이 전부 창피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붉어진 얼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신유정은 집에 도착했다.

도착한 그녀를 반긴 것은 다름 아닌 서정희의 무시무시한 잔소리 공격.

“어머, 얘 얼굴 붉어진 것 좀 봐.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래? 어?!”

“아, 이거 술 때문에 빨개진 거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빨개졌는데?”

“그건…!”

그녀의 말문이 막히자 서정희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얘가 요즘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네. 안 되겠어, 너 이리 와!”

각성자도 감당키 어려운 등짝 후려치기.

짜악-!

“아악! 진짜 아프다고오옥!”

“아프라고 때리는데 당연히 아파야지!”

빨개진 얼굴 탓에 한참 드잡이질을 당하고 나서야, 그녀는 제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아….”

한바탕 난리에 잠시 잊고 있었던 생각이 다시금 떠오른다.

모르겠다.

그와 진정으로 가까워지기 위해선 가슴에 쌓인 이 감정들을 모조리 털어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꼭 해야만 하는 건가?”

애초에 자신의 목적은 그의 능력.

그렇다면 지금처럼 덮어놓고 지내는 것도 괜찮지 않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게 맞는데…, 왜 자꾸만 불쾌하게 심장이 뛰는 걸까.

마치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치겠네….”

노선부터 정해야만 한다.

자신은 김도진과 대체 어떤 사이가 되고 싶은지.

가끔 섹스나 하는 동료? 아니면…, 진짜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끈끈한 무언가?

그러한 생각이 들자, 마음속에 자리 잡은 김도진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다시 붉어지는 얼굴.

새롭게 생긴 걱정 하나가 모든 걱정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 이제 김도진 얼굴을 어떻게 보냐….”

내일부터 그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다른 것보다 그게 더 걱정이었다.

* * *

오전 수업이 끝난 뒤 점심시간.

언제나 그렇듯 임나은, 신유정 두 사람과 함께 앉아 점심을 먹고 카페에 모여 앉았다.

이유는 앞으로 한 학기 동안 함께 합을 맞출 팀원을 고르기 위해서인데….

오늘따라 신유정이 이상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너 오늘 좀 이상하다?”

“…뭐가.”

“아니, 말수도 평소보다 적고 나랑 눈도 안 마주치는 것… 어, 이거 봐. 지금도 너 나랑 눈 마주치자마자 돌렸잖아.”

잡았다, 요놈.

현행범으로 잡힌 신유정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아닌데? 아닌데? 내가 네 눈을 왜 못 쳐다보냐? 자, 봐. 이렇게 자, 잘 볼 수 있는데?!”

강하게 힘을 준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어떻게든 나와 눈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는 동공만 봐도 알겠다.

지금 얘가 나랑 눈 마주치는 걸 무척이나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쓸데없는 소리 말고 팀원이나 정해.”

그러면서 또 눈을 휙 돌리는 신유정.

궁금하다.

대체 쟤가 왜 저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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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과연 어떤 직업군을 파티에 추가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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