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20)

“배리어는 어떻게 설치하셨대? 이거 정부가 철저히 관리하고 있을 텐데.”

“저희 조직이 대한민국 정부의 보안을 뚫을 정도는 됩니다.”

한마디로 훔쳤다는 거구먼.

그런데 그 보안이라는 거, 완벽하게 뚫지는 못했나 보다.

그랬다면 이렇게 허술한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았을 테니.

“내가 올 때 맞춰서 발동시킨 걸 보면 나한테 볼일이 있으신 듯한데…, 그래서 용건이?”

“그야 당연히, 영입 제의를 드리기 위해섭니다.”

아아, 스카우터였구나?

금발에 한국말이 유창하긴 하지만 억양이 조금씩 흔들리는 걸로 봐선 외국인인 듯한데….

멀리까지 오신 분에게 죄송해서 어쩌나.

내가 아무리 마음대로 살겠다고 다짐했어도….

“근본도 없는 집단에 적을 두기는 좀 그래서요. 죄송합니다.”

멀리서 찾아온 스카우터에게는 예의 있게 대해야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뒤, 곧장 등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말을 걸어온다.

“뭐, 한 번에 제 진심이 통하리란 생각은 안 했습니다. 이 배리어의 지속 시간은 최대 사흘, 그때까지 저와 진득하게 이야기를….”

응, 싫어.

남자 놈이랑 이 좁은 데에서 사흘을 보내라고? 어림도 없지.

곧장 마력을 날카로운 손톱 형태로 만들어 짝퉁 배리어의 허술한 부분을 잡고 쥐어 뜯었다.

파직!

이윽고 생겨난 작은 균열.

일관되지 않은 방어막은 이렇게 깨기가 쉬워요.

심지어 나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콰장창!

유리창이 깨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을 둘러싼 반구형의 마력 장막이 산산이 부서진다.

“……!”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데도 ‘나 지금 엄청 놀라고 있어요.’ 하는 게 보인다.

“죄송한데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아줌마랑 오붓하게 저녁 먹어야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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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은 척 배리어를 찢고 나왔으나, 속은 그렇지 못했다.

“좆됐네….”

언제가 됐든 멀지 않은 때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란 예상은 했다.

그런데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른데….

“어디서 정보가 샜을까.”

놈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건 나에 대한 정보를 어딘가에서 주워들었다는 뜻.

그렇다면 그 출처는 어디일까.

지금으로선 대학교가 가장 유력하긴 한데…, 학교에 사람이 좀 많아야지.

“조디악이라….”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자기들이 빌런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건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이라는 말인 것 같고.

그런데도 배리어와 매우 유사한 수준의 짝퉁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준비성이 아주 철저한 놈들인가 보네.”

물밑 작업에 아주 진심인 놈들이 틀림없다.

활동하기 전부터 저런 기술들에, 상당한 실력자를 스카우터로 보내는 걸 보면 말이다.

“K….”

스스로 밝히기를 K.

그자의 주변에 흐르고 있는 마력의 양은 최소 A급.

나라마다 극소수인 S급 헌터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등급의 헌터를 스카우터로 쓴다는 건 그만큼 놈들의 전력이 대단하다는 뜻이거나, 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조금 얘기를 나눠볼 걸 그랬나.”

짝퉁 배리어로 나를 가두기는 했지만, 위험한 놈들은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조금 얘기를 나눴더라면….

“에이, 아니다.”

속이 까만 놈한테 목적이 뭐냐고 물어봤자 답해줄 리가 있나.

이에 돌아올 가장 친절한 대답은 조직에 들어오면 알려줄 거란 말 정도겠지.

“앞으로가 문제구먼.”

당장 조디악은 큰 문제가 아니다.

K라는 녀석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당장 과격한 움직임을 보일 조직은 아닌 듯하니.

문제는 그다음이다.

조디악처럼 나를 눈독 들이는 이들의 수는 점점 늘어날 거다.

그들 전부가 좀 전의 녀석처럼 선을 넘지 않으면 좋겠지만,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

나를 죽이겠다고 다짜고짜 달려드는 놈 한둘쯤 있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빌런이 괜히 빌런이겠나.

“에이, 좀 더 느긋하게 살고 싶었는데.”

위협에서 벗어날 방법은, 애석하게도 없다.

그러려면 내가 죽거나, 빌런들을 전부 잡아다 죽이거나 감옥에 처넣어야 하는데.

전자는 싫고, 후자는 불가능하다.

다만 죽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은 존재한다.

강해지는 것.

그 어떤 위협도 위협이라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면 된다.

내가 S급 헌터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죽지 않으려면, 내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면 어떻게든 강해져야 했거든.

지금도 마찬가지다.

몸뚱어리가 달라졌다고 한들, 살아남아야 하는 건 같으니까.

그러려면 앞으로 하루하루 좀 빡빡하게 살아야 하는데….

“어서 오렴. 배고프지? 찌개 다 끓이면 저녁 먹자.”

“저녁 먹기 전에 다른 것부터 먹어도 돼요?”

“응? 밥 먹기 전에 군것질하면 입맛 없어질 텐데….”

“아뇨, 괜찮을 거예요.”

“대체 뭘 먹으려고…, 꺄앗!”

“아줌마요.”

“아흐응…!”

뭐 어쩌겠어.

우리 아줌마 지키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 * *

김도진이 양쪽으로 배를 불리고 있는 사이, 신유정은 친구를 만났다.

“유정이 왤케 오랜만이야!”

그녀의 이름은 조윤경.

고등학교 때 3년을 함께 보냈던 여자애 세 명 중 한 명이었다.

원래는 세 명 전부를 만나려고 했다.

그런데 한 명은 떡치느라, 또 다른 한 명은 클럽에서 떡칠 남자 고르느라 바쁘단다.

두 사람은 한적한 술집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은 신유정이 맞은편에 앉은 조윤경에게 물었다.

“다른 년들은 남자 만나느라 바빠서 안 나온다는데, 넌 용케 나왔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말하길.

“난 양보다 질이거든.”

“아, 그러셔.”

그럼 그렇지.

간단한 안주와 소주를 시킨 뒤, 신유정은 먼저 나온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놀란 조윤경이 소주병을 빼앗듯이 가져가며 물었다.

“뭐야,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

신유정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조금 전 자신을 애걸복걸하게 만든 김도진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혔다.

화도 나고, 실망감도 느끼고, 치욕스럽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열받는 건 자신이 어찌 대답하는지 지켜보는 듯한 그의 태도였다.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자신이 머리를 쥐어짜가며 어필에 성공했을 때, 그가 짓던 표정이.

“개새끼….”

그것은 분명 대견해하는 표정이었다.

부모 또는 스승과도 같은 존재가 제 밑에서 자란 자식의 성장에 놀라는 듯한.

그것 때문에 열받았냐고?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씨발, 씨발…!’

흡족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녀는 느꼈다.

아주 잠깐,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지만 분노에 앞서 찾아온 충족감을.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났다.

김도진뿐만 아니라, 그딴 것에 순간이나마 기뻐했던 자신에게도.

‘이럴 수는 없어.’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남한테 이리저리 흔들리는 꼴이라니, 그건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다.

자신과 김도진,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다시 휘어잡아야 돼.’

그를 다시 붙잡아둬야 한다.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유정아, 무슨 일이냐니까?”

그녀의 시선이 조윤경에게로 향했다.

구태여 연락하지 않던 그녀에게 연락한 이유.

그것은 바로 김도진을 사로잡을 비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야, 네가 그랬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그랬었지…? 어머, 잠깐만.”

조윤경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너 지금 기분 안 좋은 게 남자 때문인 거야?”

신유정은 한숨을 푹 내쉬며 힘겹게 수긍했다.

“…맞아.”

“세상에!”

조윤경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한사코 남자한테 관심 없다던 애가 웬일이야!”

그녀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 준다고 숱하게 들이댈 때마다 남자한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한사코 거절하던 그 신유정이 남자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 아무튼! 그…, 어떻게 하는 건데? 남자 휘어잡는 거.”

“음~ 글쎄에.”

그녀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그려졌다.

“일단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데?”

“지, 진도?”

“응. 손은 잡았어? 아니면 키스?”

조윤경은 신유정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남자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녀가 진도를 뺐으면 얼마나 뺐으려고.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녀를 다시 한번 충격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섹스…를 하긴 했는데.”

“뭐어?!”

저도 모르게 테이블을 쾅 치고 일어난 조윤경.

그러다 주변의 시선을 느끼고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긴 했는데?”

“그…, 마침 방해가 생기는 바람에 몇 번 넣다가 끝까지 못 하고 흐지부지 끝나버렸어.”

“엑.”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

대체 무슨 방해가 있었길래 하던 섹스까지 멈춘 건지….

“아, 아무튼 이제 얘기 좀 해봐.”

“남자를 휘어잡는 방법 말이지?”

“그래, 그거.”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학구열에 조윤경은 실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남자길래 그 신유정을 저리도 안달 나게 만든 건지.

일단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그 뒤에 물어보도록 할까.

“남자는 말야….”

조윤경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남자를 휘어잡는 노하우를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야, 그렇게까지 해야 돼?”

“싫으면 안 해도 돼. 대신 그러면 그 남자는 다른 여자한테….”

“아, 오케이. 다음으로 넘어가.”

처음에는 자신이 알려주는 방법들에 조금씩 꺼림칙한 표정을 짓다가도 다른 여자 얘기만 살짝 꺼내면 조용해졌다.

중간 이후부터는 온전히 집중해서 제 모든 말을 귀담아듣는 그녀를 보며 조윤경은 새삼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래서 세상일은 모른다고 하는 건가?’

고등학교 때 자신들이 남자에 대해 말하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애가 저렇게 집중하다니.

그야말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일단 여기까지만 해봐. 아마 그것만 해도 웬만한 남자들은 다 휘어잡을걸?”

“…나 진짜 너 믿고 해본다?”

“그래, 나만 믿어.”

신유정의 표정이 한층 홀가분하게 변했다.

그를 다시 휘어잡을 방법을 얻은 덕에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뚫린 모양.

그때부터 두 사람은 한껏 밝은 분위기로 술잔을 기울였다.

술자리에서 빠지면 섭한 옛이야기들을 곁들여 가면서.

“그나저나, 우리 정훈이 불쌍해서 어떡해.”

“김정훈? 걔가 왜.”

“걔 아직도 너 좋아하잖아.”

“…그래?”

김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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