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20)

그래도 의외다.

내 생각으론 곧장 이년, 저년 할 줄 알았는데 제법 참네.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돈 봉투를 꺼내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돈 벌어왔다.”

금세 밝아지는 녀석의 표정.

어휴, 저 속물.

“얼만데?”

봉투에 들어 있던 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처, 천만 원?”

나는 말없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설마 3천?”

“응.”

“너…, 너 이 새끼!”

창졸간에 달려든 녀석이 내 품안으로 파고든다.

얘는 뭐 기쁘기만 하면 사람 끌어 안네.

얼굴을 마구 비벼대다가 고개를 슥 들어 올리더니, 넌지시 말을 걸어온다.

“소고기 사주라. 단백질 보충하게.”

“…….”

그렇게 3천만 원 중 80만 원이 날아갔다.

돼지 같은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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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면 열, 백이면 백.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모두가 기피하는 조별 과제.

한국 대학교에선 이러한 조별 과제가 필수로 이루어진다.

그것도 여러 곳에서.

이유는 현시대의 던전 공략이 개인이 아닌, 팀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랭크의 던전으로 갈수록 지형은 험난해지고, 그에 따른 위험도 또한 높아진다.

각종 함정, 지능이 높은 몬스터의 습격, 현실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험난한 자연환경까지.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사건, 사고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선 다양한 직업군의 헌터들이 팀으로 똘똘 뭉쳐야만 한다.

그래서 한국 대학교는 학기별로 팀을 이룬다.

인원수는 5인.

기간 내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다섯 명을 이루어 명단을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팀마다 전력 편차가 너무 심해지는 거 아니냐고?

맞다.

심해진다.

그러나 그것이 꼭 유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대학교 교수진은 각 팀의 전력을 수치로 객관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뉜 팀에게 서로 다른 실습 과제 및 시험 과제를 부여한다.

그러다 보니 소위 에이스라 불리는 포지션별 1등인 애들도 자기들끼린 잘 안 뭉친다더라.

그랬다가 진짜 빡센 던전 걸려서 조져버리면 전부 나락 가는 거니까.

“팀 편성 기간은 일주일이니까 그전까지 다섯 명 모아서 명단 제출하는 거 잊지 마.”

“예에.”

오랜만에 만난 3학년 과대표의 공지.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신유정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른다.

“야, 너랑 나랑 임나은까지 셋에 나머지는 누구 넣지?”

이게 아주 자연스럽게 나랑 임나은이 자기랑 함께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네.

갑자기 장난기가 샘솟아 어깨에 둘린 녀석의 팔을 치워내면서 퉁명스러운 척 말했다.

“왜 내가 너랑 같이할 거라고 확신해?”

“뭐?”

녀석의 얼굴에 거센 충격이 요동친다.

설마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뭐, 녀석은 친한 사이니까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는 사이니까 당연히 같이할 줄 알았다던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한 건 아니지?”

냉정한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헌터는 냉정해야만 오래 사는 직업이다.

헌터로서 이루어야 하는 팀에 필요한 건 친한 사람이 아닌, 내게 필요한 능력을 지닌 헌터.

어디 나들이 가는 것도 아니고,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 사지(死地)로 향하는 길동무를 그저 친하다는 이유로 뽑아놓으면 어떻게 될까.

그냥 사이좋게 다 같이 손잡고 지옥으로 다이빙하는 거지.

녀석도 그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저렇게 잔뜩 얼굴을 구기고 있으면서도 내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겠지.

“그래서…, 누구 같이할 사람은 있고?”

“…….”

이게 자꾸 며칠 전부터 ‘너 친구 없잖아.’를 시전하네.

그런데 어쩌지.

윤지안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는 정말 사적으로 만나는 친구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지만, 지금은 아닌데.

“나랑 하고 싶은 사람 많을걸.”

주변으로 시선을 빙글 돌리자, 녀석의 시선도 한 바퀴 돌아갔다.

이쪽을 쳐다보는 무수한 시선들.

그것이 자신이 아닌, 나를 향한 것이라는 것쯤 모르지는 않겠지.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신유정.

궁금하다.

자, 내게 이렇게 많은 선택지가 있는데 너는 어떻게 나를 끌어들일래?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던 녀석이 고개를 숙이더니, 크게 숨을 내뱉는다.

“오케이, 다른 건 몰라도 네가 팀원으로서 인기 있는 매물이라는 거 인정.”

녀석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다.

조금 전과는 달리, 눈빛에서 드러나던 복잡하게 어질러진 감정들이 잘 정돈되어 있다.

그것은 녀석의 복잡한 심경이 정리되었음을 뜻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런데 아무리 네가 뛰어난 마법사라도 팀에 탱커 한 명은 무조건 필요한 거 알지?”

“음…, 그렇지.”

솔직히 전력을 다할 수만 있으면 굳이 탱커가 없어도 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지금 너한테 침 뚝뚝 흘리는 애들 중에서 탱커도 꽤 있어. 근데!”

녀석이 엄지로 제 가슴팍을 척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은 선택지야.”

허허, 이 녀석 봐라.

“이유는?”

“내가 쟤네들보다 성적이 좋으니까.”

마냥 성격대로 들이받는 다혈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논리적인 설파도 할 줄 아네.

조금 다시 보이는데.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지.

“실력이 네가 제일 좋다는 건 나도 인정. 근데 성적 좋은 사람들끼리 팀을 이룬다고 해서 무작정 좋은 건 또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팀의 전력이 높아질수록 그에 따른 과제의 난이도 또한 상승한다.

그러니까 무작정 성적이 높다는 것 하나만으론 설득력이 부족하다.

녀석에게는 하나 더 있다.

멀리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녀석들이 아닌, 자기 자신을 택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

녀석이 과연 그걸 알까.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녀석이 무언가 떠올린 듯, 입술을 뗐다.

“친하니까!”

캬, 이걸 맞추네.

친하다고 해서 무작정 던전에 들어갈 팀원을 뽑을 순 없다.

“쟤네나, 나나 도긴개긴이야. 그럼 그중에서 친한 사람을 뽑아야지.”

그런데 내게 필요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 중 한 명을 뽑아야 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랑 친하다면?

그건 뽑는다.

친하다는 건 남보다 손발을 맞추기가 수월하다는 뜻도 되니까.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친한 사람을 굳이 멀리할 이유는 없다는 거지.

훌륭하게 답을 찾아낸 녀석을 조금 칭찬해줄까 했는데.

“됐냐, 새꺄?!”

마무리가 개떡 같네.

.

.

.

.

.

.

.

대학 생활은 제법 즐겁다.

처음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다 생각하게 될 정도.

그런데 왜 하루 수업이 모두 끝나면 이리도 홀가분한 느낌이 들까.

“오랜만에 아줌마랑 오붓하게 저녁이나 먹을까.”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신유정이 떨어져 나갔다.

아까 좀 놀린 것 때문에 삐져선 친구랑 술 마시고 들어갈 거란다.

그러다가 또 내가 오해하는 건 싫었는지, ‘여자인 친구’라는 말을 강조하더라.

뭐 엄청 많이 알고, 남녀 관계에 빠삭한 듯이 말하는데 자세히 보면 엄청 쑥맥인 녀석.

심지어 놀리는 맛도 좋지.

[이번 역은….]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걷다 보면 천천히 주변 풍경이 뒤바뀐다.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고, 건물의 높이가 낮아짐과 동시에 허름해진다.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어가는데 갑자기 주변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동시에 주변의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마력이 곳곳에서 솟구치더니, 내 주변으로 지름 10m쯤 되는 반구형의 막이 펼쳐졌다.

“…이건 배리어잖아.”

배리어(Barrier).

막대한 마력을 쏟아부어 만들어내는 일종의 장벽이다.

보통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도심 지역에 던전 발생 징후가 발견되었을 때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설치하는 게 왜 갑자기 여기에….

“여기 던전이라도 나타나나…?”

그럴 리가 없다.

던전이 생성될 때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징후 중 하나가 주변의 마력 수치가 높아진다는 건데, 마력을 눈으로도 볼 수 있는 내가 그걸 놓칠 리가.

심지어 여기는 서울 외곽.

배리어 시스템은 서울의 중심지에만 설치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 이거 참.”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꼼짝없이 여기에 갇히게 생겼다.

배리어를 해제할 방법은 단 두 가지.

해제 코드를 입력하거나, 부수거나.

그중 무엇 하나 쉽지 않다.

배리어는 내부의 방어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마력 방어막.

그 강도는 S급 헌터의 공격도 몇 번 정도는 거뜬히 막아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 이 몸뚱어리로 깨는 건 불가능하고, 남은 건 해제 코드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해제 코드는 오직 정부에서 관리한다.

말인즉, 이걸 풀어내려면 헌터 협회 직원이 해제 코드를 전달받아 풀어내야 한다는 것.

만약 이 배리어가 던전 발생 징후에 의해 발동된 거면 당연히 협회 직원이 출동하겠으나, 이건 여러모로 이상하게 발동됐다.

“대체 왜 갑자기….”

배리어의 오발동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고 알고 있는데.

심지어 이런 외곽에 설치될 만큼 값싼 물건도 아니고.

그렇다면.

“누가 일부러 여기에 설치를 했다는 건데….”

심지어 내가 여기 지나갈 때를 골라서.

“그게 말이 되나?”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배리어는 오직 정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사용 가능한 기술로 알고 있는데.

“흐음.”

끄트머리로 가 마력 장벽에 손을 대보았다.

아주 얇고 단단한 마력의 실이 촘촘하게 엮인 내부 구조가 느껴진다.

“음?”

배리어 안으로 흘러 들어간 내 마력이 얇게 퍼져 반구형으로 이루어진 장벽 전체의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뭐야, 이거.

“약간 허술하네…?”

전부가 아닌, 군데군데 덜 촘촘한 부분이 있다.

진짜 배리어가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는데.

이거 설마 배리어를 따라 만든 짝퉁인가?

“이러면 뚫고 나갈 수도 있을지도.”

배리어뿐만 아니라 모든 방어막은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단단해진다.

어느 곳 하나 허술하지 않고 일관될 것.

그렇지 않으면 허술한 부분에서부터 균열이 일어나게 되거든.

여기도 마찬가지다.

눈에 띄게 허술한 부분을 내 마력으로 뚫어내면 주변도 자연스럽게 허물어질 거다.

한 번 해볼….

“반갑습니다, 김도진 씨. 제가 좀 늦었군요.”

난데없이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보니, 웬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사내가 서 있다.

“제 이름은 K, ‘조디악’의 일원입니다.”

“조디악?”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빌런?”

“으음…, 글쎄요. 저희의 구분은 저희 조직 내에서도 의견이 다분한지라 뭐라 명확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구분도 안 되는 잡것들이 모인 오합지졸이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내가 잘못 알아들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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