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목이야 뭐 단순히 전도유망한 헌터 지망생들의 보다 나은 성장을 위해서라곤 하는데.
내가 겪어본 협회는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지갑을 여는 놈들이 아니다.
결국 싹수가 괜찮은 놈들 데려다가 적은 돈으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속셈이다.
그렇게 해서 협회 직원으로 들어오게 하면 베스트고, 아니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두고두고 써먹을 데가 있으니까.
“그러면 말이에요.”
“…….”
“제가 그중에서 몇 등 정도로 보이세요?”
“…글쎄요.”
은근슬쩍 말을 얼버무리네.
분명히 저 양반은 알고 있다.
내 능력이나 잠재력이 웬만한 유망주들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라는 걸.
그렇지 않고서야 황금 같은 토요일에 날 보겠다고 시간을 낼 이유가 없다.
“에이, 대충은 아실 텐데? 이번 사건만 봐도 얼추 감이 오잖아요.”
모르면 총무부장 자리는 정말 고스톱으로 딴 거지.
내가 몇 번 만나본 김성태 부장은 권력욕이 과도하긴 해도, 영 모자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괜히 자존심 부리긴.
“우리 좀 솔직해지자고요.”
“무얼 말입니까.”
불쾌하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말하는 김성태.
“제가 어리긴 해도, 어리숙한 사람은 또 아니거든요.”
“…그래서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날 케어하겠다고 찾아온 것만 봐도 대충 답이 나온다, 이겁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말이야.
“부장님은 저와 연을 맺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자, 그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스무 살 애송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게 썩 놀라웠던 모양.
그는 망설이는 듯했다.
본심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틀어박힌 인사치레로 받아쳐야 할지.
잠시 후.
결심을 내린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영민하신 듯하니,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부정하지 않으면 맞는 거지, 뭘.
어쨌든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으니 이야기는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다.
물론 하나의 과정이 더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저도 부장님이랑 좋은 관계 맺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는 손을 들어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사람이 걸어가는 제스처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사이에 다리 하나를 두자는 거죠.”
내 말뜻을 알아차린 그의 시선이 윤지안에게로 향했다.
“말인즉…, 케어는 윤지안 씨에게 받고, 저와도 연을 이어가고 싶다, 그런 거군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죠.”
내 웃는 모습에 김성태 부장도 따라 웃었다.
근데 의미는 좀 달라 보였다.
허탈한 느낌이랄지, 어이가 없달지.
“월권이기는 합니다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군요.”
뉘앙스가 조금 묘하다.
가능은 한데…, 굳이? 라는 느낌.
“그런데 제가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김도진 씨가 가치 있는 인물인지는 모르겠군요.”
음, 이건 예상 밖의 일인데.
특례 입학식 때 내가 선보인 일들만 나열해도 말도 안 되는 건데, 그보다 더 바란다?
양심은 밥 말아 드셨나….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저 양반이 나를 원하는 것보다, 내가 윤지안을 원하는 마음이 더 큰 듯하니.
“제가 재밌는 거 하나 보여드릴게요.”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건 남들은 할 수 없고, 오로지 나만 가능한 장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몸의 특성 그리고 재능은 그런 데에 아주 능하지.
나는 다섯 손가락을 곱게 펼쳐 그에게 보여준 뒤, 마력을 끌어모았다.
일단 엄지에….
「파이어 볼(Fire Ball).」
원래 크기의 대략 8분의 1정도 되는 사이즈의 파이어 볼이 엄지 위에 둥실 떠오른다.
검지에는 라이트닝 볼, 중지에는 워터 볼, 약지에는 에어 볼, 소지에는….
「아이스 볼(Ice Ball).」
각각 적색, 자색, 청색, 무색, 청백색의 구체가 다섯 손가락 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닌다.
마치 태양 중심을 빙글빙글 맴도는 행성들처럼.
“어때요? 이 정도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린 채 내 손만 바라보고 있다.
들린다.
김성태의 마음속에서 내 가치가 떡상하다 못해 그래프를 뚫고 하늘로 치솟는 소리가.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오랜만에 색다른 음식들을 배불리 먹고 기분 좋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는 내게, 윤지안이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신 겁니까?”
조금 전 내 행동이 이해가 어려운 모양.
이해는 간다.
그때의 행동들은 딱이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본능이 원하는 대로 한 거다.
윤지안이 아닌, 중년 사내의 케어를 받기 싫다는 이유 하나로.
동시에 나 또한 그녀의 의중이 궁금했다.
“그럼 지안 씨는 왜 받아들인 건데요?”
“그건….”
김성태와의 담판.
그건 사실 그녀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엎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그 양반한테 윤지안의 감찰부 업무를 다 빼달라고 해도, 그녀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 되는 거니까.
그래서 김성태 부장과 담판을 지은 뒤, 그녀에게 물었다.
감찰부 업무냐, 나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나를 케어하는 것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 표정이 약간 붉다.
선선한 계절이니 더워서 그런 건 아닐 테고.
“그…, 조금 아쉬웠습니다.”
“헤에, 그래요?”
“예. 아무래도 정이 제법 든 것 같습니다.”
…그냥 정이구나.
난 또, 조금 더 뜨거운 무언가일 줄 알았더니.
그녀가 조금 더 붉어진 얼굴로 내게 재차 물었다.
“제가 답했으니, 도진 씨도 답을 해주십시오.”
“음.”
당신과 좀 더 잘 되고 싶어서…, 라는 대답은 조금 이른가.
“저도 비슷해요. 지안 씨랑 정이 많이 들어서, 다른 사람 케어는 받고 싶지 않네요.”
“아…, 그렇습니까.”
뭐야.
뭔데.
갑자기 왜 서운한 표정을 짓는 건데.
내 대답이 틀린 건가?
설마 조금 전 생각이 이른 게 아니었나?
“저기….”
조금 전의 대답을 후회하고 있을 때, 윤지안이 넌시지 말을 걸어왔다.
“그, 오늘 받으신 보상금 말입니다.”
“네. 그게 왜요?”
“그게, 음….”
뭘 말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몇 번이나 망설이는 듯하던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 그거 사실은 제가 노력한 겁니다.”
“…노력이요?”
“예. 김성태 부장이 노력한 게 아니라…, 제가요.”
아.
조금 전에 3천만 원 받을 수 있게 힘썼다고 하더니.
그게 실은 윤지안이 노력한 결과였다는 건가.
그리고 그거를 지금에서야 나한테 어필하는 거고?
“딱히 뭔가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만…, 그냥 김성태 부장의 공으로 두는 건 뭔가 좀….”
“그럼요, 그럼요.”
김성태 부장이 힘썼다고 했을 땐 고마운 마음이 요만큼도 들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고마운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무언갈 해주지 않고선 배기지 못할 정도로.
“지안 씨, 혹시 가지고 싶은 거 없어요? 덕분에 돈도 많이 받았겠다, 뭔가 선물하고 싶은데.”
“서, 선물이라면…, 으음.”
고민하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뗐다.
“딱히 가지고 싶은 건 없습니다만….”
“으음, 그래요?”
에이, 아쉽네.
그걸 빌미로 약속이나 잡으려고 했더니.
“그, 그 대신! 나중에 밥 한 끼…, 사주시겠습니까?”
“…….”
오늘 무슨 날인가.
왜 이렇게 마음먹은 대로 일이 술술 풀리는 기분이 들지?
꼭 이러면 나중에 불행한 일이 생기던데…, 쓰읍.
잠깐 걱정하는 사이, 내 침묵이 부정이라 생각했는지 그녀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싫으시면 거절하셔도….”
“아뇨, 아뇨. 좋아요. 먹읍시다, 밥. 한 끼가 아니라, 몇 끼든.”
“…그럼 언제쯤으로?”
“오늘은 배가 부르니까 힘들고…, 내일 어때요?”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나나, 그녀가 부담이 없을 듯하여 꺼냈는데.
갑자기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죄송합니다. 내일 일이 조금 있어서.”
“괜찮아요. 그럼 다음 주 주말은요?”
“그때는 토, 일 전부 가능합니다.”
“그럼 평일 중에 날 잡아서 연락드릴게요.”
“예…!”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같은 말투여도 분위기가 다르다.
예전에만 해도 굉장히 사무적인 느낌을 풍겼는데, 지금은 좀 더 온화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확실한 건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먼저 밥까지 사달라는 거 보면…, 맞겠지?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20분은 금세 지나갔다.
“도착했습니다.”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뒤, 고개를 숙여 열린 창문 너머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괜찮습니다. 그…,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다 나 좋자고 한 건데.
“아, 그리고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그리 거창한 부탁은 아니다.
공적인 부탁도 아니고, 지극히 사적인 부탁.
“용건 있을 때만 전화하지 말고, 심심할 때도 연락해요.”
“예? 아…, 알겠습니다.”
오늘따라 자주 웃네.
“그럼 조심히 가요.”
“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네, 그래요.”
다음 주를 은근히 강조하면서, 그녀는 떠나갔다.
“흐흐.”
뭔가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꼭 젊었을 때 마누라랑 썸탈 때의 느낌.
“아, 썸 맞나?”
확실히 지금 정도면 썸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어, 음음.
살면서 이런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참아도 참아지지 않는 웃음을 마구 흘리며 옥상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음성이 날아와 귀에 팍 꽂힌다.
“어디 다녀오냐?”
평상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던 신유정이 몸을 일으킨다.
음, 뭐라고 대답하지.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오느라.”
“만나? 누굴?”
‘너 친구 없잖아.’ 라고 묻는 듯한 표정.
음…, 실제로 없긴 하지.
게임 속에선 인싸였던 것 같지만, 내가 끊어버렸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안 씨 만나고 왔어.”
“…뭐 때문에?”
목소리가 착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