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내가 생각해도 고생을 하긴 했어.”
직접 생색을 내니까 일말의 고마운 마음마저 사라지려고 한다.
“그래서 말인데.”
녀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팔을 뻗는다.
뻗어 나온 양팔이 내 목을 감쌌다.
“보상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무슨 보상?”
내 물음에 녀석이 몸쪽 꽉 찬 돌직구를 날렸다.
“섹스하자.”
미친.
목에 둘려 있는 팔을 억지로 떼어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 지금 술도 마시고 피곤해서 힘들어.”
솔직히 술도 별로 안 마셨고, 한 번 더 섹스할 체력은 충분하다.
더군다나 시원하게 싸지르긴 했어도 녀석의 등장 때문에 쫓기듯 마무리한 탓에 약간 찝찝하기도 했고.
그래도 오늘은 안 된다.
“와…, 이 새끼 봐라. 낮에 내가 빼줘서 넌 덜 고프다, 이거지?”
배신감 가득한 표정을 짓는 신유정.
오늘따라 변명할 거리가 왜 이렇게 많지?
“아니, 사실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
“근데.”
“그…, 저번에 우리 첫 섹스를 허무하게 날렸잖아.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물론 난 처음은 아니었지만, 얘는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쭉 그런 걸로 하자.
아줌마와 내 사이가 들키기 전까지는.
“그래서 뭐.”
“…만발의 준비를 하고 싶다, 이거지. 아쉬웠던 첫 섹스를 만회하기 위한 준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녀석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먹힌 건가?
“언젠데.”
“어?”
“준비가 다 되는 날이 언제냐고.”
…그러게.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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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은 훈련, 임나은은 다른 수업을 듣는 관계로 혼자 캠퍼스를 거닐었다.
오늘 첫 수업은 ‘초급 뇌전 마법의 이해’.
그래도 이미 한 번 와봤다고 느긋하게 도착해서 강의실로 들어가 빈자리에 앉았는데….
어째 주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어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 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부쩍 늘어났다.
아무래도 기초 괴수학 실습 때 선보였던 마법이 영향 때문인 것 같은데.
국민 헌터라 불리며 오랜 시간 대중의 시선 속에서 살아온 탓인지,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에 쓰인 감정이 무엇인지 훤히 보인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호기심.
그때는 전까지 아무런 활약을 보이지 못한 탓에 약간 미쳐있어서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까 알겠더라.
“좀 많이 과했지….”
초급 마법의 대표격인 볼 시리즈 마법 세 개를 압축시켜 만든 쓰리볼…, 아니, 오버쿡 마법.
그건 여러모로 일반적인 마법의 상식과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기존의 마법에 아무런 간섭 없이 마법을 덧씌우는 것도, 세 가지의 마법을 하나하나 만들어 유지하는 것도.
일반적으로 배우는 마법의 이론과는 동떨어져 있을뿐더러,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가 보일 수 없는 수준의 파괴력이기도 했다.
그러니 저러는 거다.
마법사로서 저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니까 계속 힐끔 쳐다보고는 있는데, 어제 보여준 임팩트가 과하다 보니 쉽게 다가오지는 못하는 거지.
“으음.”
고민된다.
앞으로 자제해야 할지, 아니면 눈치 보지 말고 시원하게 저지르고 다닐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과하게 눈에 띄었다가 찾아올 감당 못할 위협이 염려돼서 최대한 자제해야겠다 생각했는데.
한 번 저지르고 나니까 마음이 바뀐다.
그냥 내키는 대로 살아야겠단 쪽으로.
새 삶을 시작하면서 되뇐 건 남의 눈치 살살 봐가면서 오래 살아야겠다 따위가 아니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
오직 그거 하나만을 가슴에 새기지 않았던가.
“무섭다, 무서워.”
사람의 습관이 이래서 무서운 거다.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면서 사려야겠단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원.
“자제….”
하기는 해야 한다.
다만 억지로 몸을 숙이는 짓 따위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거다.
적당히 보일 수 있는 건 다 선보이고, 그에 따른 반응도 곱씹어주겠다 이거야.
그게 긍정적인 거든, 부정적인 거든.
앞으로의 인생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칠 다짐을 하고 있을 때, 강의실 문이 열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요염함이 느껴지는 나긋한 목소리에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과연, 의상까지도 요염하기 짝이 없다.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블랙 드레스에 가터벨트와 스타킹이라는 발칙한 조합이라니.
혈기왕성한 스무 살 새내기들의 섹스 심벌이라도 되어줄 셈인가.
외모도 이에 못지않았다.
햇살이 비출 때마다 보랏빛이 드러나는 검보랏빛 머리에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요염한 눈매와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
피처럼 새빨간 립스틱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완숙함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체적인 느낌이 여우 같다.
그것도 그냥 여우가 아니고, 꼬리가 여럿 달린 여우.
구미호…는 아니고, 대충 삼에서 사미호 정도?
“백현아 교수에요. 한 학기 동안 다들 잘 부탁해요?”
교태 어린 목소리.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에 애간장이 끓은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대형 강의실에 쩌렁쩌렁 울린다.
“그럼 출석부터 체크하고 시작할게요.”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마주친다.
거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3에서 5초 정도.
내 차례는 금세 다가왔다.
“김도진 학생?”
“예.”
짧게 끊어 대답한 뒤, 앞선 학생들이 그러했듯 가볍게 눈을 마주친다.
이후 자연스럽게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겠지, 생각하고 있을 때.
“흐응…, 실물이 더 낫네.”
야릇한 비음과 함께 새어 나온 작은 목소리.
“…예?”
의아한 마음에 되물었으나,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다음은….”
“…….”
뭐지, 이 찝찝한 느낌은.
불쑥 떠오르는 의문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출석 확인이 끝나버렸다.
안 그래도 마법 학과 인원이 제일 적은데, 거기에 잘 다루는 속성별로 수업을 나누어 듣다 보니 인원이 극히 적은 탓이었다.
“오늘 함께 배워볼 마법은….”
새로운 마법, 새로운 마력 배열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아니, 익히 알고 있는 마법이어도 좋으니, 이미 숙지가 완벽하게 끝난 라이트닝 볼만 아니면….
“라이트닝 볼이랍니다!”
와, 재밌겠다!
* * *
라이트닝 볼.
사실 초급 마법 첫 수업 소재로 꺼낼 만한 마법은 아니었다.
난이도가 떨어져서? 아니다.
그 반대로 난이도가 높아서 그렇다.
파이어 볼, 에어 볼, 워터 볼 등.
라이트닝 볼은 이와 대비되는 다른 속성의 볼 마법보다 한 단계 높은 난이도를 자랑한다.
그것은 비단 라이트닝 볼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뇌전 마법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 문제였다.
뇌기(雷氣)로 화한 마력은 그 어떤 속성보다 운동량이 뛰어나다.
그 덕분에 보다 빠른 속도와 파괴력을 지니게 되었으나, 뚜렷한 단점 또한 지니게 되었으니.
여타 속성 마법에 비해 난이도가 한 단계 이상 높다는 것이었다.
파직!
“큭!”
빠르게 그려낸 마법진에서 퍼런 뇌전이 번쩍 튀기더니 이내 사라졌다.
호기롭게 도전한 김윤식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이를 두고 주변에서 떠들어댔다.
“아, 실패다….”
“김윤식이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할 정도면 아무도 성공 못하는 거 아냐?”
김윤식.
명실상부 마법 학과 1학년 에이스.
그런 그가 실패했음은 누구도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므로.
아니나 다를까.
그의 실패를 시작으로 학생들의 실패 행진이 연이어 펼쳐졌다.
어떤 이는 손바닥에 작은 뇌기가 떨어지는 바람에 급하게 의무실로 이송되기까지 했다.
이미 3분의 2가 실패한 상황.
슬슬 불만의 얘기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첫 수업부터 라이트닝 볼이라니…, 너무 이른 거 아니야?”
“그러게. 작년에 이 수업 들은 선배는 첫 수업으로 라이트닝 미사일부터 시작했다던데.”
백현아는 그러한 불만을 교태로 해결했다.
“어머나…, 올해 신입생들 성적이 훌륭하다고 해서 제가 조금 무리했나 봐요. 어쩌죠…?”
글썽이는 눈망울, 떨리는 음성.
“아, 아닙니다! 저희가 모자라서 그런 건데요!”
“맞아요! 오히려 저희야말로 죄송합니다!”
“여러분….”
남학생들의 불만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꺾여버렸다.
허나,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물은 오직 남자에게만 통하는 것.
여학생들이 반발하려 했으나, 그녀들도 서로 눈치만 볼 뿐 대놓고 나서지는 못했다.
남자들이 저렇게 나오는데 지금 나섰다간 악역밖에 되지 못할 게 뻔히 보였기 때문.
“그럼 다시 시작할까요?”
“예!”
“성공하자! 아자!”
결국 불만이 쏙 들어가고, 실습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호기롭게 마법진을 그려냈으나, 나오는 건 피픽 하고 타오르는 미약한 뇌전뿐.
그녀는 실패한 이들을 위로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며 점차 뒤로, 뒤로 향했다.
‘거의 다 왔어.’
처음부터 그녀의 목적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녀는 차근차근 차례를 밟아 이곳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다.
미리 짜둔 수업 커리큘럼을 어기게 만든 장본인, 김도진의 앞에.
처음 본 순간부터 흥미가 돋았다.
출석을 위해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마주쳤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스무 살 새내기의 것이라곤 보기 어려운 무겁게 가라앉는 눈동자뿐.
그 어떤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무감정한 시선에 소름마저 돋을 뻔했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대체 속에 무엇을 품고 있을까.
속내를 숨긴 채, 백현아는 만면 가득한 미소와 함께 그에게 말을 건넸다.
“김도진 학생. 라이트닝 볼, 할 수 있겠어요?”
“해보겠습니다.”
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해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실패 따위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한 확신에 찬 어조.
김도진의 손가락 끝에서 마법이 시작되었다.
스물네 개의 선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그려졌다.
그것만 보아도 마법의 성공은 분명해 보였다.
마법진이 눈 부신 빛을 발함과 동시에 그의 손 위로 주변으로 사정없이 튀는 번개로 이루어진 구체가 생성되었다.
다른 학생들이 만들어낸 청색의 번개와는 사뭇 다른, 자색의 전격 구체.
주변에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윤식도 실패한 걸 단숨에 성공하네….”
“하긴, 실전에서 이미 라이트닝 볼에 다른 마법까지 결합해서 쓴 녀석이니.”
“이제 1학년 에이스는 김도진이라고 봐야겠지?”
대단하다며 추켜세우고 있을 때, 백현아는 도리어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느 곳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다.
그러나 평범했다.
‘이게 아니야.’
영상으로 보았던 라이트닝 볼은 지금보다 더 커다랗고, 시전 속도도 빨랐다.
말인즉, 일부러 시전 속도를 늦췄다는 말이 되는데….
흥분은 가라앉았으나, 그에 대한 흥미는 더욱 짙어졌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든 걸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정말 잘했어요! 모두가 실패했는데 도진 학생만 성공했네요?”
“어…, 운이 좋았던 것 같기도….”
주변의 시선을 온통 집중시키는 말에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으나, 백현아는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으음~ 열심히 한 학생에게는 상이 있어야겠죠? 으음, 뭐가 좋을까….”
“아니, 그런 거 안 주셔도 상관없는….”
“좋아요! 오늘 수업 끝나고 제 교수실로 찾아오도록 해요. 도진 학생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둘 테니까…, 절대 까먹으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