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혹시나 실례가 될 수도 있으니.
“야, 내리자.”
장을 보기 위해 집에서 두 정거장 떨어져 있는 대형 마트 앞에서 내렸다.
고기, 쌈장, 각종 쌈 채소, 소시지, 소주와 맥주까지.
아줌마까지 포함해서 넷이 먹는다고 해도 배가 터지지 않을까 싶은 양.
결제는 신유정이 했다.
지갑이 이리도 쉽게 열리는 걸로 봐선 조금 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모양.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옥상에서 아줌마가 손을 흔들었다.
“왔니? 어서 올라오렴!”
“아, 안녕하세요!”
임나은이 옥상에 서 있는 아줌마에게 넙죽 인사를 건네자, 신유정이 녀석의 목덜미를 붙잡아 끌어 올린다.
“인사는 올라가서 해, 올라가서.”
“아…, 그게 낫겠다. 헤헤….”
옥상으로 올라가자 고기 구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펜션에서나 볼 법한 드럼통 그릴에 잘 익은 김치에 뜨끈한 밥까지.
토치로 숯에다 불을 피우고 있던 아줌마가 우릴 반겨주었다.
“어서 오렴. 오늘 실습들 했다며? 고생 많았어.”
자애로운 미소와 따뜻한 말 한마디.
아아, 이거야.
고단했던 하루에 한 줄기 치유의 빛을 쬐는 듯한 느낌.
“아, 안녕하세요. 임나은입니다….”
“그래, 네가 나은이구나! 아유, 어쩜 이렇게 참하고 예쁘니? 우리 딸도 좀 닮았으면….”
“엄마!”
신유정이 소리를 빽 내지르자, 아줌마는 서운함 가득한 표정으로 나와 임나은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녀석을 씹어댔다.
“저것 좀 보렴. 우리 애는 사납기만 하지, 귀염성이 없어서 큰일이야.”
확실히 좀 의아하기는 해.
저렇게 기품 있고 현숙한 아줌마 배에서 저런 말괄량이가 나오다니.
아줌마의 무차별 폭격에 주구장창 당하고 있던 녀석이 반격을 날렸다.
“아빠가 그러더라. 내가 사나운 건 다 엄마 닮아서라고.”
“뭐? 너 그게 무슨…!”
어라, 뭐지.
아줌마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사실 엄마도 옛날에 좀 놀…, 읍!”
황급히 달려간 아줌마가 손을 뻗어 녀석의 입을 틀어막는다.
“호호, 얘도 참. 비싼 밥 먹고 헛소리를 하고 있니.”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슬쩍 내 눈치를 본다.
정말로 뭔가 있었나 본데…?
나중에 몰래 옛날 앨범 같은 거라도 훔쳐봐야지.
“아, 아무튼! 잘 왔어, 나은아. 편하게 놀다 가렴?”
“헤헤…, 네에.”
사건은 일단락됐다.
숯도 활활 타오르고 있고…, 이제 고기만 구우면 되는 건가.
자연스럽게 아줌마가 고기를 구우려 하길래 곧장 다가가 집게와 고기를 빼앗듯이 가져왔다.
“제가 구울 테니까 아줌마도 앉아서 드세요.”
살짝 감동한 표정.
아줌마는 남편이 있어도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해왔다.
있는 남편이라고 해봤자 1년에 몇 번 만나지도 못하고, 그럴 때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지게 쉬기만 하다 훌쩍 가버리니 기댈 데라곤 딱히 없었을 테고.
아마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자그마한 호의에도 이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항상 챙기다가 누군가에게 챙겨지는 게 어색하면서도 기쁜 거겠지.
어떻게 아냐고?
나도 약간 그런 기분이거든.
신유정과 임나은의 눈에 보이지 않게 은근슬쩍 손을 뻗어 아줌마의 엉덩이에 손을 올렸다.
화들짝 놀라는 아줌마를 향해 웃어 보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너무 챙기려고만 하지 말고, 저한테 챙겨지기도 하세요.”
챙겨지는 게 싫은 사람은 없다.
챙기는 데에 익숙해서 받는 게 어색한 사람만 있을 뿐.
“어쩜…, 점점 듬직해지는 것 같네, 우리 도진이는.”
아줌마의 눈빛이 살짝 몽롱하게 변했다.
이런.
아무래도 스위치가 눌렸나 보다.
아줌마와 선을 넘은 뒤부터 지금까지 지내며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있다.
아줌마에게 보이지 않는 스위치 같은 게 있다는 것.
누를 때마다 모드가 휙휙 바뀌는 그런 스위치 말이다.
평소에는 엄마 모드.
뜨거운 밤을 보낸 사이임에도 나를 철부지 자식쯤으로 대한다.
그래서 처음엔 나이 차이가 나서 섹스까지 했어도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 건가 해서 서운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
단지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는 거였다.
행여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우리 사이를 의심받을 만한 어떤 구실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렇게 참고 참다가 우리 둘만 있게 되거나, 지금처럼 여자로 대해지는 순간이 오면 확 돌변한다.
그때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진한 애욕이 묻어 나온다.
자애와는 거리가 먼, 욕망어린 눈빛.
바로 지금처럼.
“어허, 지금은 그런 눈빛 금지.”
“어머나.”
속절없이 깊어져 가던 아줌마의 감정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저렇게까지 감정을 쉽게 컨트롤하는 걸 보면 확실히 범상치 않기는 하단 말이야….
아까 신유정이 했던 말처럼 평범하지 않은 과거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고기는 제가 구울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 앉아 계세요.”
“호호, 그래. 오랜만에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고기 받아먹기만 해봐야겠다.”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인 아줌마가 평상으로 향하기 전, 내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술…, 많이 마시면 안 된다?”
“헙.”
야릇한 목소리에 귀가 짜르르 울린다.
“먼저 잠들면 혼낼 거야.”
“…….”
엄마처럼 엄하고, 요부처럼 야릇한 목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
…오늘 술은 최대한 자제하자.
.
.
.
.
.
.
.
수십 년 노하우로 구운 노릇노릇한 고기 한 점에 소주 한 잔.
저기압인 사람도 단숨에 반등하게 만드는 마성의 조합에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세상에 다시 없을 호사를 누리고 있다.
고기를 굽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먹는 양이 적을 수밖에 없다.
주구장창 집게와 가위를 양손에 나눠 들고 있으니 먹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
그렇다고 해서 손해를 보냐면 그건 또 아니다.
물론 남자들끼리 먹으면 손해가 맞긴 한데…, 지금 조합은 여자 셋에 남자 하나의 조합.
“도진아, 이거 먹어.”
“땡큐.”
“야, 입 벌려.”
“우웁…!”
“도진아, 아~ 해보렴.”
“끼요르히힝!”
고기를 구워주는 대가로 여자 셋이서 번갈아서 쌈을 싸주고 있으니, 이 정도면 값을 톡톡히 받아내고 있는 거라고 봐야겠지.
“하으으…, 너무 좋다아…!”
임나은은 나보다 더 신이 나 있었다.
“경치도 좋구, 고기도 맛있구, 오늘은 심지어 술도 맛있어!”
이렇게 노는 게 처음이라더니 제대로 마음에 든 모양.
“그렇게 좋냐?”
“응!”
임나은의 말을 적당히 받아주는 녀석의 모습이 낯설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애쓰더니.
귀여운 토끼 같은 그녀에게 정이 살짝 붙은 걸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겠지.
“흐흐…, 다음에도 좋은 성적 받으면 또 하자.”
“응, 그러자!”
저거 봐라, 저거.
딱 봐도 임나은 특성이며 능력이 훌륭하니까 내치기가 아까웠던 거지.
그러니 자기가 품는 쪽으로 노선을 바꾼 거고.
거기에 더해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에 두랬다고.
자꾸 밀어내서 불편한 관계가 되느니 제 곁에 가까이에 둬서 나랑 그녀가 단둘이 있는 시간을 줄이려는 속셈도 엿보인다.
평소에는 막무가내인 것 같다가도 저럴 때는 머리 돌아가는 속도가 참 빠르단 말이야.
“흐음.”
뭐, 이유야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한 풍경이다.
웃음이 끊이질 않고,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단란한 모습.
내 이상이나 다름없는 가족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렇기에 행복하면서도, 또 괜히 울적해진다.
서연이 녀석이 떠올라서.
마누라 생각은 솔직히 잘 나지 않는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여자는 혼자서도 잘 해낼 사람이니까.
서연이는 다르다.
나와도 다르고, 한주희와도 다르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나온 딸이 맞나 싶지만…, 맞다.
어릴 때 몸이 약한 녀석의 신체를 내 마력으로 뒤바꿀 수 있었던 건 우리 두 사람이 부녀지간이기에 가능한 기행이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마력 파장이 유사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면 타인의 몸에 그 정도로 간섭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겠지.
아무튼…, 녀석은 지금 혼자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엄밀히 말하면 자기 스스로 외톨이를 자처하고 있다.
사회적 능력이 모자라도 너무 모자라다.
누가 말을 걸면 칼로 벤 듯 단답으로 대답하니 대화가 이어지지도 않고, 친해지기도 전에 기겁해서 달아나기 일쑤.
“누굴 닮아서 저러는지, 원….”
생각해보면 제 엄마를 닮은 것 같다.
어릴 때 한주희가 좀 타인에게 냉랭하고 좀 싸가지 없이 굴어댔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잘 좀 살지.”
애석하다.
차라리 잘 살았으면 미련 없이 떨쳐냈을 텐데.
나는 지금 아빠이되, 아빠가 아닌 몸.
뜬금없이 챙겨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답답해 죽겠고.
같은 대학교에 심지어 학과까지 같아서 아예 안 보고 사는 것도 불가능하고.
막막하다, 막막해.
“에휴.”
답답한 마음에 불 위에 올라간 고기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평상 쪽에서 별안간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뭔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술에 취한 임나은이 상에 머리를 처박으면서 난 소리였다.
쟨 또 언제 저렇게 많이 마셨대.
“야, 임나은. 괜찮냐?”
“우웅…, 나 집에 갈래에….”
대답은 하는 걸 보니 아예 정신을 잃진 않은 모양.
옆에 있던 아줌마가 임나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늦었는데 오늘은 아줌마네 집에서 자고 가, 응?”
확실히 저거 혼자서 집에 가긴 그른 것 같다.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상에 머리를 처박은 상태에서 도리질을 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휙 들어 올린다.
“으으응, 안 돼요…. 저 집에 꼭 가야 돼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히잉…!”
갑자기 울먹거리는 녀석의 표정을 보니 단순히 술주정은 아닌 것 같다.
뭔가 집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귀찮지만 어쩔 수 없나.
나는 집게와 가위를 내려놓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제가 집에 데려다 주고 올게요.”
그리 말하면서 팔을 뻗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내 손을 붙잡아 제지했다.
손의 주인은 신유정이었다.
“그…, 아이 씨, 넌 가지 말고 있어. 내가 데려다 주고 올 테니까.”
갑자기 얘가 왜 이러지.
얼굴은 싫다고 말하는데 굳이 가겠다는 이유는…, 아하.
술에 취한 임나은과 나를 둘만 두기 싫어서 그런 건가?
“금방 다녀올 테니까, 넌 엄마 도와서 정리나 해.”
“그래, 다녀와.”
“다녀오렴.”
거의 실신한 상태의 임나은을 등에 업고 계단을 내려가는 신유정.
옥상에 널브러진 흔적들을 보니 그냥 내가 데려다 준다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걸 언제 다 치우냐….
먹은 것까진 좋았는데 치울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구만.
“후딱 정리하고 저희도 쉴…?”
빠르게 정리하고 쉬자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