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력이 움직이긴 했지만, 마법진은 없었으니.
그렇다면 저게 임나은의 특성인가?
내 시선을 느낀 임나은이 나를 향해 방울을 내밀어 보여주었다.
“내가 재미있는 거 보여줄게. 잘 봐?”
한 손엔 투명한 방울, 다른 한 손엔 파이어볼.
떨어져 있는 손이 맞닿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오른손 위에 떠있던 파이어볼이 왼손의 방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
“이 방울이 내 특성이야. 여기에 이렇게 마법을 넣어두면 필요할 때 언제든 바로 꺼내서 사용할 수 있어.”
“오….”
상당히 유니크하고, 유용한 특성이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진 모르겠지만, 방울 여러 개에 마법을 담아뒀다가 그걸 단숨에 터뜨리면 한순간에 어마어마한 수준의 데미지 딜링이 가능할 터.
임나은은 꾸준히 작업을 반복해 제 등 뒤로 다섯 개의 방울을 만들었다.
“이거 잘못 건드리면 터지진 않아?”
“음…, 저번에 협회의 도움으로 실험을 해봤는데 B급 헌터의 공격까진 무난하게 막더라구.”
“허, 그래?”
B급 헌터의 공격까지 막아내는 방어력이라니.
비눗방울같이 생긴 게 방어력이 상당하다.
“와…, 파이어볼 다섯 방을 비축하다니, 우리는 활약할 틈도 없이 끝나겠는데?”
백지훈이 감탄을 터뜨렸다.
현석이란 놈도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놀란 표정을 짓고 있고, 신유정도 마찬가지.
“…이제 출발하자.”
신유정은 이내 출발 명령을 내렸다.
몇 걸음 안 가 제법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그곳의 중앙에 서 있던 오크가 우리를 발견하고서 거센 울음을 토해낸다.
꾸익!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화풀이 상대를 만난 듯 살기와 기쁨이 섞여 있다.
“하앗!”
신유정이 앞서 달려 나가 녀석의 앞을 막아서며 힘겨루기를 시도한다.
“윽…, 이 새끼 제법 센데…!”
엇비슷한 근력을 지녔는지, 양쪽 모두 뒤로 밀려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피유웅!
현석이 차분하게 쏜 화살 한 발이 오크의 허벅지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명중률이 제법 쓸 만한데.
소심한 성격에 궁수로서 쓸 만한 능력.
녀석이 왜 백지훈에게 찍혔는지 알 만하다.
꾸히이익!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포효.
“아오, 냄새!”
신유정의 방패가 녀석의 가슴팍을 강하게 후려친다.
적잖은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나는 녀석.
바로 그때였다.
“해제!”
임나은이 짧은 명령어를 내뱉자, 파이어볼을 감싸고 있던 방울 하나가 비눗방울 터지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파이어볼은 곧장 날아가 오크의 배에서 적잖은 폭발을 일으켰다.
퍼어엉!
일순 터져 나온 불꽃이 오크를 휘감는다.
꾸이이익! 꾸이…!
녀석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녀석의 등 뒤로 돌아간 백지훈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단검을 박아 넣는다.
콰득!
목덜미에 단검이 틀어박힌 오크의 신형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다들 수고했어.”
“이야~ 우리 합 정말 좋은데?”
어라.
…왜 나 빼고 너희들끼리 합이 잘 맞고 그러냐.
이러다가 나만 활약 못하는 건 아니겠지…?
.
.
.
.
.
.
.
짜잔.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이제 마지막이지?”
“어, 고블린 셋에 오크 둘.”
“특수 개체 다섯이면 좀 빡세겠지만, 우리 합이면 어렵진 않겠다.”
어느덧 던전은 마지막 방을 남겨둔 상황.
놀랍게도 나는 그때까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못한 거라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안 한 건지.
이게 다 임나은 때문이야.
비눗방울 속에 마법을 저장해두었다가 사용하는 게 상당히 유용하다.
전투 전에 준비만 해두면 마법사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긴 시전 시간을 거치지 않게 되니까 내가 마법을 준비하는 사이에 일이 끝나버린다.
마음만 먹는다면 녀석 못지않게 빠르게 마법을 준비하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그랬다간 여러모로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다는 게 문제.
사실 귀찮은 정도라면 얼마든지 감수하겠는데, 지금의 나로선 감당 못 할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지.
그래도 지금까지 잘 버텼다.
마지막 방을 앞둔 지금, 이제는 내가 활약할 수밖에 없게 됐다.
“미안, 이제 방울 못 만들어.”
마법사에게 있어 그보다 좋을 수 없는 그녀의 특성에도 단점이란 게 존재했다.
바로 하루에 생성할 수 있는 방울의 개수가 정해져 있다는 것.
조금 전 방에서 그녀는 마지막 열 개째의 방울을 사용했다.
그러니 이제는 정직하게 마법을 시전할 수밖에 없다는 뜻.
“흐흐흐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웃었다.
이제 내 차례다.
“그럼 출발한다. 이제 나은이 방울 없으니까 그거 잊지 말고.”
“오케이.”
백지훈이 쾌활하게 웃으며 녀석의 말에 대답한다.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방.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고블린 세 마리와 오크 두 마리가 눈을 번뜩인다.
“그럼 간다!”
신유정이 두 마리의 고블린과 오크를 막아선다.
나머지 각각 한 마리는 백지훈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어그로를 담당하고 있는 상황.
“으음.”
여기서 약 3초 정도 고민했다.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해.
지금까지의 보이지 않았던 나를 각인시킬 수 있는 화려한 무언가.
“아.”
생각났다.
파괴력도 파괴력인데, 보기에 굉장히 멋있는 마법이.
결정과 동시에 체내의 마력이 의지를 따라 순환한다.
손바닥 위로 모이기 시작하는 마력.
그 색은 자색.
「라이트닝 볼(Lightning Ball).」
손바닥 위로 주변으로 퍽퍽 튀는 자색의 번개 구슬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걸 압도적인 마력 제어 능력으로 강제로 압축시킨다.
빠직! 파지지직…!
뇌전 계열의 마법은 언제나 광범위하다.
왜냐.
마력 특성이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태생 자체가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퍽퍽 날뛰는 걸 좋아하거든.
그래서 이런 압축은 웬만한 고위 마법사도 시도조차 않는데, 나는 가능하다.
마력 그 자체를 다루는 내 능력은 이미 정상을 범주를 한참이나 초월했기에.
파츳 파츠츳
어릴 적에 즐겨 먹던 왕구슬 사탕만 한 크기로 줄어든 라이트닝 볼.
그 위에 또 다른 마력을 덧씌운다.
일종의 막과 확산을 담당할 바람의 마력.
「에어 볼(Air Ball).」
끊임없이 일정 반경을 휘몰아치는 바람이 작은 번개 구슬을 감싼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
바람 위에 잔잔하게 흐르는 물을 두껍게 씌운다.
「워터 볼(Water Ball).」
완성됐다.
아껴두었던 내 비장의 무기.
그 이름도 찬란한 쓰리볼 매직.
선두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는 신유정과 백지훈을 향해 소리쳤다.
“뒤로 멀리 떨어져.”
기다렸다는 듯이 신유정이 물러나고, 이를 본 백지훈도 한 박자 느리게 물러난다.
좀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이 아니꼽다.
저것도 확 같이 지져버릴까 보다.
두 사람이 물러나는 모습을 확인한 뒤 곧장 구체를 쏘아 보냈다.
목표 지점은 두 사람이 이끌고 다니던 몬스터들의 정중앙.
원하는 위치에 도착한 구체를 둘러싸고 있는 제어력을 차례로 해제한다.
가장 먼저 터지는 것은 에어 볼.
중간에 끼어 있던 바람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그 위를 둘러싸고 있던 두꺼운 물의 장벽도 함께 비산한다.
그 범위는 곳곳에 서 있는 오크와 고블린들을 모두 아우르기에 충분할 정도.
충분히 퍼진 물방울들을 확인하고, 한계까지 눌러두었던 번개 구슬을 해방시킨다.
작은 공간 안에 다닥다닥 겹쳐 있던 뇌기가 물방울을 타고 폭발적인 속도로 사방에 번진다.
파지지지직!
물방울을 타고 거침없이 질주하는 자색의 번개가 그려내는 사슬 모양은 그야말로 장관.
그 증거로 이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네 사람의 입이 떡 벌어져서 닫힐 줄 모르고 있다.
꾸힉…!
끼르륽…!
번개에 적중당한 오크와 고블린의 신체가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순식간에 생겨난 다섯 개의 숯검댕이.
“음.”
이를 보고 있자니 쓰리볼 매직보다 좋은 이름이 떠올랐다.
까맣게 타버린 다섯 개의 숯검댕이는 주말에 가족들에게 대접하기 위해 바쁜 시간에 틈틈이 연습한 내 비장의 요리와 닮아 있었다.
새까맣게 타서 원래 뭐였는지 알기 힘들다는 점이 특히.
“오버쿡(Overcook)….”
이제부터 이 마법의 이름은 오버쿡이다.
마법의 이름도 정했겠다, 이 정도면 체면치레는 충분히 됐겠지 싶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발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신유정이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나를 향해 뛰어들고 있다.
“억…!”
창졸간에 벌어진 일에 힘껏 달려든 녀석이 전달하는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함께 땅을 뒹굴었다.
녀석은 나를 꼭 끌어안은 채로 감격에 겨운 소리로 외쳤다.
“역시 네가 최고야…!”
품에서 물씬 풍겨오는 여체의 그윽한 향기에 잠시 들떠 있던 정신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나는 녀석의 등 뒤로 가볍게 팔을 두르며, 아쉬운 마음에 눈을 감았다.
기왕 안길 거, 방어구는 좀 벗고 오지 그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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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 이후 사후강평 시간이 이어졌다.
강의실에 모인 학생 중 절반 이상이 몸 어딘가에 붕대를 감고 있다.
숫자가 살짝 비는 걸로 봐선 아예 참여하지 못하는 녀석도 있는 모양.
“멀쩡한 사람 찾기가 더 어렵네.”
이곳에 모인 이들이 전부 1학년이라 더욱 그랬다.
실습 경험도 얼마 안 되고, 지닌 재능을 어떻게 다뤄야 효율적인지도 모르는 애송이들.
그런 주제에 자존심은 세서 자기들끼리 싸우기는 또 더럽게 싸워대니 몸이 성할 리가 있나.
뒤늦게 강의실로 들어선 임철웅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이 좌중을 압도했다.
“너희들의 실습, 잘 봤다.”
새삼 느꼈다.
잘 봤다는 말에 이렇게도 실망감을 담을 수가 있었구나.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연속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몸 성치 않은 애들의 가슴을 아예 후벼파다 못해 뚫어버리네….
절정은 9조의 강평이었다.
“손서연 학생을 제외한 너희 모두, 헌터를 포기해라.”
냅다 들이박는 강렬한 워딩에 9조 조원들의 머리가 띵 하고 울리는 듯했다.
근데 내가 봐도 좀 심하긴 했어.
실습이라고 긴장을 덜 할 수 있다고 쳐도 자기들끼리 싸우는 건 좀 심했지.
얼씨구, 한 놈은 울기까지 하네.
9조 인원들을 영혼 없는 산 송장으로 만들어버린 뒤, 우리 10조의 차례가 돌아왔다.
“10조는…, 완벽했다. 적어도 1학년 수준은 전부 넘어선 것 같군.”
짧지만 강렬한 극찬.
내가 보기에도 얘네는 좀 잘했다.
물론 현역 헌터의 기준으로 보면 한참 모자라긴 하지만, 1학년 학생 수준을 뛰어넘은 것만은 확실했다.
…여러모로 말이지.
“이상 수업을 마치겠다.”
수업이 끝났음에도, 강의실 안 분위기는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