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20)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이 차례로 문을 지나친다.

동시에 한쪽 벽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대형 스크린에 무기고에서 무기를 고르고 던전으로 향하는 1조의 모습이 잡혔다.

어두운 동굴에 기분 나쁜 몬스터의 소리가 들려온다.

덩달아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던 1조 인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오크와 맞닥뜨렸다.

꾸히이익!

대기실에 설치된 커다란 스피커 너머로 녀석의 포효가 들려온다.

소리만 들어도 녀석이 어떤 상태인지 알겠다.

화가 많이 났네.

지금까지 갇혀 있다가 풀려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1조의 파티장이 파티원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치, 침착하게 대응해!”

…저건 0점짜리 오더다.

파티장은 포커페이스에 능해야 한다.

긴장하고, 두려워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연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왜냐고?

그래야만 파티원들이 믿고 따르니까.

침착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벌벌 떨고 있으면 누가 그 말에 침착할 수 있겠나.

분노한 오크가 과도한 긴장으로 굳어버린 전열을 뚫고 진영을 헤집어대기 시작한다.

“…끝났네.”

저렇게 된 이상 가까스로 오크를 잡는다고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으, 으아아아!”

“케헥!”

오크에게 신나게 돌려지는 다섯 명의 모습에 임철웅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고작 특수 개체 한 마리에게 저렇게 휘둘리다니…, 어이가 없군.”

실망스러운 어투로 말한 임철웅 교수는 제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의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던전의 벽에서 기계로 이루어진 손들이 마구 튀어나와 날뛰는 오크의 팔과 다리를 구속했다.

[긴급 구조 시스템 발동.]

[몬스터를 격리합니다.]

꾸이이이익!

몬스터가 어디론가 끌려가고, 널브러진 다섯 명도 마찬가지로 기계 팔에 붙들려 사라졌다.

아마 이곳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는 의무실로 바로 이송된 거겠지.

“다음 2조 입장. 부디 너희는 저 머저리들과 다르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임철웅 교수의 작은 바람을 안고 들어간 2조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앞서 나타난 오크 한 마리를 안정적으로 죽이고, 뒤에 나타난 고들린 두 마리에게 당했다.

힘만 앞세워 달려드는 오크와는 달리, 고블린은 제법 영악하다.

완전히 다른 행동 패턴에 적응하지 못하고 2조도 결국 의무실로 이송됐다.

“…다음.”

3조, 4조, 5조, 6조.

차례대로 던전의 제물이 되었다.

진행도의 차이가 조금씩 나기는 했지만, 끝에 다다르지 못한 건 동일했다.

“와아아아!”

숱한 실패 끝에 첫 번째로 끝에 다다른 파티가 탄생했다.

“8조, 통과.”

다름 아닌 8조.

초급 화염 마법 수업 때 보았던 김윤식이라는 녀석이 속해 있는 조였다.

더블 탱커의 단단한 방어와 김윤식의 화력 지원.

단순하지만 확실히 먹히는 패턴으로 단단하게 나아가더니 끝에 다다랐다.

“다음 9조.”

9조는…, 서연이가 포함되어 있는 조였다.

녀석은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쯔쯧.”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호신용이라면 단검이 더 나았을 텐데, 왜 무거운 장검을 골라서 페널티를 자처하는지….

진행은 생각보다 매끄러웠다.

서연이의 마법 실력이야 뭐 제 엄마 닮아서 뛰어나고, 다른 녀석들도 몸놀림이 나쁘지 않다.

문제는 던전의 후반부에서 벌어졌다.

중반부쯤엔가, 전열이 몬스터를 흘린 실수를 시작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더니 결국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한 것.

주먹질까지 가지는 않았는데, 팀워크가 박살 난 상태라 마지막 오크와 고블린의 조합을 상대할 수 있을지.

“아악…!”

파티는 유기적인 관계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놈들의 파티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다.

서로를 앙숙처럼 생각하는데, 도울 의지 같은 게 생겨날 리가 있나.

하나씩 널브러지고 마침내 후열에 있던 서연이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아….”

갑자기 입에 쓴맛이 맴돈다.

비록 이제는 아니라곤 해도, 딸내미가 몬스터한테 맞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이게 참 그렇네.

달려드는 오크를 보며 녀석은 검을 뽑아 들었다.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마음에 들지만, 그런 엉성한 자세로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어라.

“오…, 저 선배 자세 좋은데?”

“그러게. 마법사인데 검술은 또 언제 배웠대.”

백지훈과 신유정의 말대로다.

검을 손에 쥐고 있는 녀석의 자세는 생각보다 그럴 듯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 이상이었다.

뭐지…, 언제 나 몰래 검술이라도 배웠던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본인의 의지를 떠나서, 한주희가 그걸 두고 봤을 리가 없다.

옛날에 내가 건강해진 서연이한테 검술 가르쳐준다고 했더니, 여자애 손에 굳은살 생기면 안 된다고 만류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코앞까지 달려든 오크가 내지른 주먹을 고작 한 걸음으로 피해낸 녀석이 검을 내질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일곱 번.

그 모습을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걸 쟤가 어떻게…?”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일곱 번의 검격.

그것은 내가 손시우의 몸으로 애용하던 검술 중 하나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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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검(水流劍).

그녀가 방금 사용한 검술의 이름이다.

내가 직접 지은 건 아니고, 동료들이 검술의 특성을 따서 지어주었다.

녀석이 선보이기 전까지만 해도, 수류검은 오직 세상에서 나만 사용하는 검술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만들었고, 남한테 가르쳐준 적이 없으니까.

젊을 때 서연이한테 가르치려 했지만, 한주희의 만류 때문에 쭉 나만 써왔다.

그런데 저 검술을 어떻게 서연이가 사용하고 있는 걸까.

일순 내 몸을 빼앗은 짭시우가 떠올랐으나,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저건 단순히 내 몸을 가로챘다고 해서 사용하고, 가르칠 수 있는 검술이 아니다.

수류검은 수십 년의 헌터 생활 동안 배우고, 터득한 검술을 내 식대로 총망라한 것.

누군가에게 가르치기는커녕 짭시우 본인조차도 다루지 못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녀석이 빼앗은 건 내 몸뿐이니.

머릿속의 기억들 들여다볼 수 있다면 경험도 간접적인 체험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글쎄.

경험이 어디 간접적인 체험만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던가.

“저 검술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냐?”

“음…, 낯이 익기는 한데.”

나름대로 검을 사용하는 신유정과 백지훈이 저 검술을 약간 알아보는 듯했으나, 수류검인 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제법 능숙하게 다루긴 했지만, 내가 펼치던 수류검과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서 그런 걸지도.

“상처뿐인 승리네.”

홀로 던전의 끝에 다다른 손서연을 보며 신유정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오크와 고블린에게 신나게 얻어맞은 네 명은 기계 팔에 붙들려 의무실로 이송됐다.

놈들은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다.

능력이 부족했다거나, 처음부터 합이 맞지 않아 삐걱거렸다면 차라리 낫지.

녀석들은 잘 가다가 자기들끼리 싸우고 반목하다가 깨져버렸다.

“욕 오지게 처먹겠네.”

“그러게.”

임철웅 교수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지금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10조.”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고로 향하는 파티원들의 뒤를 따른다.

탱커 신유정은 검과 방패, 척후 및 근접 딜링을 담당할 백지훈은 단검 두 자루, 궁수 현석은 활과 화살통, 임나은은 마법사답게 스태프를 골랐다.

나는 그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녀석들을 본 게 아니라, 그냥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서연이의 검술을 보고 얻은 충격이 가시질 않아서 그런다.

그것 말고도 여러모로 의문점이 떠오른 탓에 더더욱 혼란스러운 느낌.

“야, 무기 안 골라?”

그때 신유정이 무기고 벽면에 걸려 있던 스태프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스태프 주변으로 미약한 마나가 허술하게 얼기설기 얽혀 있다.

마법사의 무기는 스태프, 완드, 오브,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뉜다.

각각의 무기는 증폭, 시전 속도, 저장이라는 고유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증폭은 말 그대로 마력의 위력을 증가시키고, 시전 속도는 체내 마력의 흐름을 가속시켜 시전 속도를 늘려준다.

오브는 메모라이즈 마법과 비슷하다.

등급마다 일정 개수의 마법을 저장시켜 두었다가 원할 때 꺼내어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무기고에 있는 마법사용 무기는 스태프가 전부.

학생들 실습용으로 제공되는 싸구려 스태프라….

품질이 품질인 만큼,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의 마력 증폭 특성을 달고 있겠지.

나는 그것 대신 단검 한 자루를 손에 쥐었다.

“이거 하나면 돼.”

“뭐야, 호신용?”

“어.”

별안간 녀석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더니, 내 어깨에 팔을 휘감는다.

“야, 이 누나가 앞에서 다 막아줄 거니까 걱정 붙들어 매.”

귀여운 녀석.

내가 단검을 챙기는 게 자기를 못 믿어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건가.

“널 못 믿어서 챙기는 게 아니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뿐이야.”

“흐흥…, 그치?”

새삼 놀랍다.

내 말 한마디에 저리 기분이 왔다 갔다 하다니.

나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전해진다.

내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으로 섹스를 한 상대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이유야 어쨌든, 누군가에게 특별하게 여겨진다는 건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일이니까.

“준비됐으면 출발하자!”

한껏 기분 좋은 표정으로 외치는 신유정.

우리 파티의 파티장은 신유정이 맡기로 했다.

나와 임나은, 백지훈과 현석.

녀석이 우리 네 명의 파티원을 잇는 연결고리라서.

신유정이 앞장서서 문을 열고 들어선다.

문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축축하고, 습한 동굴의 특성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구현력 오진다, 오져.”

헌터 양성 전문 기관이라면 모의 던전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중 제일을 고르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국 대학교의 모의 던전을 꼽는다.

왜냐고?

숲이면 숲, 동굴이면 동굴.

하나의 형태로 고정된 다른 모의 던전들과 달리, 이곳은 설정값을 바꿔줌으로써 저장된 여러 형태로 구조를 바꾸는 게 가능하기 때문.

덕분에 한국 대학교 학생들은 단 하나의 모의 던전으로 다양한 환경을 접할 수 있다.

어떻게 가능한지는 나도 모른다.

이걸 만든 사람만이 알겠지.

마법과 과학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학문, 마도 공학.

대한민국은 세계의 마도 공학을 선도하는 선진국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의 기술력이 전체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니라, 우연히 한국인으로 태어난 한 천재의 존재 덕분이다.

이곳은 그 천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모의 던전이다.

정확한 명칭은 해태 8호.

이름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듯, 신원 인증기 해태 1호를 만든 사람과 동일 인물이다.

참고로 해태 시리즈는 99호까지 존재한다.

100호를 맞이해서 특별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던데, 과연 무엇일지.

“저기, 잠깐만….”

첫 번째 지점에 다다랐을 즈음,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던 임나은이 멈춰 섰다.

“전투에 앞서 준비할 게 조금 있는데, 시간 좀 줄래?”

“얼마나?”

“5분이면 돼.”

잠시 고민하던 파티장 신유정이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나은이 너는 그 준비란 거 바로 시작하고, 나머지는 5분간 대기.”

대체 뭘 하려고 5분의 시간을 달라고 한 걸까.

궁금해서 가만히 지켜보는 사이, 임나은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 안에 그려진 스무 개의 획.

마법진이 푸른 빛을 내뿜으며 마법이 완성되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빨간 화염이 일렁이는 구체, 파이어볼.

갑자기 마법은 왜 시전하는 거지?

의아해하는 사이, 비어 있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투명한 방울이 솟아오른다.

…마법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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