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만 보면 네가 마법사고, 쟤가 전사인 줄.”
그래, 이 맛에 몸 관리하는 거지.
자꾸만 솟구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느라 혼났네.
가죽 상의, 하의를 입고 팔 보호대와 투구까지 머리에 쓰고 거울을 힐끔 쳐다봤다.
아, 옛날 생각난다.
D급, C급일 때 지금처럼 가죽 방어구로 온몸을 둘둘 싸매고 던전을 돌아다녔는데.
잠깐 옛 추억을 회상하는 사이, 임철웅 교수가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1분 남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참.
곧장 임철웅 교수를 지나쳐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여자 탈의실에서도 한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 방어구로 온몸을 동여맨 신유정이 제법 흡족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 친다.
“몸이 좋아서 그런가? 그 모습도 나쁘지 않네.”
사실 보급형 가죽 방어구를 둘둘 싸맨 모습은 멋스럽다고 보긴 어렵다.
그런데도 저러는 걸 보면 아무래도 녀석 눈에 콩깍지가 씐 게 아닐까.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나은이는?”
녀석에게 묻자, 고개를 휙 돌린다.
“몰라.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왜 너한테 묻긴…, 같은 탈의실을 썼잖아, 자식아.
마법사 직업군이라 이런 방어구 착용에는 익숙하지 않을 텐데.
“좀 도와주고 나오지 그랬냐.”
살짝 핀잔을 주자,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너 지금 다른 년 안 도와줬다고 나 타박하냐?”
예전 같았으면 저 눈빛에 깨갱했을 몸뚱어리가 이제는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역시 백 번의 만남보다 한 번의 섹스가 더 낫다니까.
“아니, 친구…까지는 아니어도 안면 튼 사이끼리 도와주는 게 어려운 건 아니잖아.”
“난 어려워.”
“아, 그래.”
그렇게 말하면 더 할 말은 없지.
질투심이 많아서 귀엽기는 한데, 슬슬 걱정도 된다.
저러다가 나중에 다른 여자랑 칼부림이라도 나면 어쩌지?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확실히 교육을 해둬야지, 음.
임철웅 교수가 제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다.
슬슬 시간이 끝나가는 모양.
이대로 벌점인가 싶을 때 임나은이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온다.
“헤엑, 헥…, 안 늦었지?”
“아슬아슬했어.”
“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임나은.
그와 동시에 임철웅이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시간 다 됐다. 다행히 벌점을 받을 사람은 없군.”
일견 무덤덤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는 미약하게나마 흡족함이 서려 있었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그리 말하며 임철웅 교수는 거대한 문의 중앙에 달린 센서에 목에 걸려 있던 카드를 댔다.
[신원 확인 완료.]
차가운 음성과 함께 주변이 요동치며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듯, 위아래로 거대한 문이 갈라져 열린다.
넓은 공간, 의자, 책상, 대형 스크린.
“이곳은 일종의 강의실이자, 대기실이다.”
과연.
다른 녀석들이 실습을 진행할 때 이곳에서 대기하는 동시에 지켜본다는 건가.
“일단 다들 자리에 앉아라.”
빈 의자가 빠르게 채워진다.
“실습은 다섯 명씩 한 조로 편성하여 진행하도록 하겠다.”
이곳에 모인 인원의 수는 딱 50명.
당연하지만, 직업의 비율은 처참하게 망가진 상태.
“난 그리 생각한다.”
임철웅 교수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리고 이윽고 이어진 말은 신호탄이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파티를 이루는 것부터가 실력이라고.”
드르륵!
드륵!
그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들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전사들.
그중에서도 성적이 고만고만한 녀석들이었다.
“윤식아, 혹시 구상하는 파티에 자리가 남니…?”
“남으면 나 좀 껴주라!”
“아니, 내가 얘보다 나아!”
마법사 녀석을 중심으로 인의 장벽이 세워졌다.
“어휴.”
…전직 근접 딜러로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근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 모인 녀석들은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헌터 지망생들.
파티를 이루는 다양한 직업군 중 가장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하는 직업군이 뭘까?
답은 근접 딜러다.
왜냐고?
징그러운 괴물들이랑 얼굴을 맞대고 싸워야 하거든.
거기에 더해 직접 손을 써서 숨통을 끊어야 하는데, 바로 여기가 가장 큰 문제다.
이제 막 헌터를 꿈꾸는 병아리들이 죄다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살생에 익숙할 리가 있나.
어디를 찔러야 할지 고민하고, 죽어가는 몬스터의 아련한 표정에 측은지심을 느끼기도 하고.
여러 이유로 인한 망설임으로 제때 숨통을 못 끊고 자기 숨통을 위협당한다.
저 녀석들이 원거리 딜러들을 둘러싸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행여 망설이게 될 자기를 대신해서 몬스터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주길 바라서.
과거 대한민국의 최강 근접 딜러로서 이러한 모습이 달갑지는 않지만, 별 수 있나.
본인들이 선택한 길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힘내라, 병아리들아…!
근딜의 아버지, 손시우…였던 김도진이 너희를 응원한다!
애달픈 마음으로 녀석들을 속으로 응원하고 있을 때, 내 어깨 위로 팔이 스르륵 감겨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신유정이 히죽 웃으면서 나뿐만 아니라 임나은의 어깨에도 팔을 두르고 있다.
“우리 이쁜이들, 어디 가면 안 된다?”
어이구, 욕심도 많지.
나로도 모자라 임나은까지.
심지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어구 입는 거 도와주는 것도 어렵다고 했던 자식이.
“난 좋아.”
임나은, 그녀는 천사인가…!
나였으면 탈의실에서 방어구 입는 것도 안 도와준 녀석 따위, 매몰차게 버렸을 텐데.
“나머지 둘은 누구로 할 거야?”
“음…, 후위는 너희 둘이면 충분하고.”
녀석의 시선이 내게 머무른다.
“나머지는 누구여도 상관없겠네, 응.”
나 하나로도 이미 배부르다는 표정.
앞에서 미친 짓거리만 안 하는 놈이면 아무래도 상관없기는 하지.
“보이는 애들 중에 아무나….”
녀석이 그리 말하고 있을 때.
뒤에서 웬 사내놈이 신유정의 뒤로 불쑥 튀어나왔다.
“유댕, 파티 아직 못 구했지? 나랑 가자.”
갑자기 기분 팍 상하네.
뭐야, 이 새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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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cm를 훌쩍 넘는 키에 관리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청회색의 머리카락.
서글서글한 호감형 외모에 쾌활한 미소까지.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일 것만 같은 요소들로 무장한 사내.
“아, 깜짝이야.”
신유정이 깜짝 놀라며 뒤로 돌아선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녀석의 표정이 단숨에 누그러졌다.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기척 좀 내고 다녀, 미친놈아.”
“크크, 쏘리쏘리.”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분위기는 썩 친근해 보였다.
“야, 근데 나 벌써 파티 구했어.”
“어, 진짜?”
놀란 사내놈의 시선이 신유정의 뒤편에 있는 나와 임나은에게로 향한다.
“처음 보는 분들이네?”
“이번 학기에 입학한 특례 입학생들.”
“아~ 그래?”
몸을 이쪽으로 돌린 사내놈이 웃으면 손을 뻗어온다.
“반가워요. 백지훈이에요. 여러분과 같은 1학년.”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손을 맞잡으며 내 소개를 했다.
“김도진입니다. 잘 부탁해요.”
딱히 인사를 나누고 싶지 않았지만, 먼저 손까지 내밀었는데 거절할 수는 없지.
녀석은 임나은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신유정을 돌아보며 물었다.
“파티는 지금 이렇게 셋이 전부야?”
“어. 이제 나머지 구하려고.”
“그럼 내가 할게!”
“…너 파티 구했다며?”
“깨고 나오지, 뭐. 난 유댕이 너랑 합 맞추는 게 제일 편해.”
어떻게든 친근함을 과시하려는 듯한 말투.
이에 신유정은 내 눈치를 힐끔 살피더니 녀석을 향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야,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아, 왜. 입에 착착 감겨서 좋기만 한데.”
“난 별로야, 그거.”
“알았어, 알았어. 차차 줄여볼게. 그 정돈 봐줘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얼추 파악이 된다.
한쪽은 단순한 친구로 대하는데, 다른 한쪽은 호시탐탐 그 이상을 노리는 아슬아슬한 관계.
왜 아슬아슬하냐고?
신유정은 이미 나한테 모든 걸 줬으니까.
놈에게 남은 건 씁쓸한 결말뿐이거든.
“아무튼, 애들한테 말하고 올 테니까 기다려! 내가 다른 한 사람도 구해올게.”
“어, 야…!”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쏜살같이 사라지는 백지훈.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임나은이 한마디 했다.
“상당히 마이페이스인 사람 같다…, 그치?”
“그러게.”
착해빠진 녀석.
제멋대로란 말을 애써 마이페이스란 단어로 포장하려 하다니.
그 사이 신유정이 우물쭈물 다가와 내 귀에다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야, 그…, 오해하지 마라? 나랑 쟤랑 그냥 친구일 뿐이야.”
놈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나한테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에 장난기가 도졌다.
“그런 것치곤 많이 가까워 보이던데…, 유댕이라는 애칭도 쓰고.”
“야, 그건 쟤가 멋대로 쓰는 거라니까. 봤잖아! 내가 쓰지 말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 거.”
많이 억울했나 보다.
가슴까지 두드려가며 열변을 토해내는 걸 보면.
“유댕! 나 왔어.”
적절한 타이밍에 백지훈이 웬 사내놈과 어깨동무를 한 채로 돌아왔다.
어깨가 움츠러들어 있는 게 친구 사이가 아니라, 꼬봉쯤으로 보이는데.
“몇 번 본 적 있지? 현석이.”
“아…, 그 궁수?”
“맞아.”
이름을 듣자마자 아는 걸 보면 셋이서 몇 번인가 파티를 이뤘던 모양.
“아, 안녕하세요.”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임철웅 교수에게로 가 파티 구성이 완료됐음을 알렸다.
“앉아서 대기하도록. 너희는 10조다.”
백지훈과 현석이라는 친구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좀 지체했더니 우리 파티가 꼴찌였나 보다.
“그럼 지금부터 실습을 시작하겠다. 실습 방식은 간단하다. 동굴 형태로 이루어진 모의 던전에 들어가 중간중간 배치해둔 몬스터를 사살하고 끝에 다다르면 된다. 질문 있나?”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이번 실습이 중간고사 성적에 반영되는지 궁금합니다.”
“첫 실습인 만큼, 이번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설렁설렁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좋을 거다. 그러한 모습이 눈에 띈다면 해당 인원의 이번 학기 성적은 D-로 고정이다.”
“다, 답변 감사합니다.”
서슬퍼런 음성에 쫄아서 앉는 질문자.
D-는 그야말로 최악의 학점이다.
F를 받으면 재수강을 통해 어느 정도 반등을 노릴 수라도 있지, D-는 불가능하니까.
한마디로 설렁설렁하면 성적을 박살 내고 말겠다는 일종의 경고라고 보면 된다.
“질문은 더 없는 듯하니, 바로 실습으로 들어가겠다.”
임철웅 교수가 제 등 뒤에 난 문을 가리켰다.
“이 문으로 나가면 무기고가 있다. 그곳에서 원하는 무기를 선택한 뒤, 준비가 완료되면 던전 안으로 입장한다.”
“예!”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학생들의 의욕 향상을 위해 상품을 준비해두었다. 오직 1등에게만 주어지니,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알았나?”
“예-!”
얼씨구.
상품 있다고 하니까 목소리가 두 배로 커진다.
“그럼 1조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