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한 번의 대화를 나눴는데도 느껴진다.
이 녀석의 소통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걸.
아이고, 딸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저런 건 본인 스스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으니.
“그럼 쉬십쇼. 저는 다 쉬어서.”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오랜만에 말문을 튼 녀석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러나 금세 깨달았다.
이 몸으로 살아가길 택한 이상, 녀석과 나의 인연의 고리는 끊어졌음을.
대화를 나누고 있다간 내 안에 잠든 딸바보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막 지적하고, 가르치고, 끝내 보듬어줄 것만 같아서.
나는 녀석을 매몰차게 지나쳤다.
이게 맞는 길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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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술이 깨고 돌아온 테이블에는 인원의 교체가 이루어져 있었다.
선배들의 부름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던 임나은이 붉어진 얼굴로 앉아 있고, 조예진은 어느새 다른 테이블에 가서 다른 특례 입학생들과 열심히 술잔을 주고받고 있다.
“어, 도진아~!”
걸어오는 나를 확인한 임나은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어우, 쟤 많이 취했나 보다.
안 그래도 발랄한 애가 취하니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발랄해진 느낌.
“어디 갔다 와써?”
“잠깐 바람 좀 쐬러.”
“헤헤헿, 그렇구나아.”
아무래도 과음의 부작용으로 혀가 반으로 접혀버린 모양.
“어? 나 아직 너랑은 술을 못 마셨네? 우리 건배하자, 건배!”
“…….”
왜 쓸데없는 데에서 기억력은 좋은 걸까.
“건배하자아~ 응? 건배, 건배!”
“그, 그래.”
어쩔 수 없다.
이대로 두면 계속 술 마시자고 졸라댈 게 뻔하니 그냥 더 마시게 해서 완전히 정신을 잃게 만드는 수밖에.
“유정아, 너도!”
“…쯧.”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신유정도 눈살을 찌푸리며 맥주잔을 손에 쥔다.
아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자, 건배~!”
호쾌하게 잔을 부딪친 녀석이 500cc 잔에 반쯤 남아 있던 맥주를 단숨에 털어 넣는다.
철퍽!
“…….”
그리곤 마침내 쓰러졌다.
감당 못할 텐션의 주정뱅이가 하나 사라졌으니 이제 한시름 덜었….
“…얘 집에 어떻게 데려다주지?”
깜빡했다.
우리 중 누구도 얘네 집 주소를 모르고 있다는 걸.
“야.”
“어?”
임나은의 옆에 있던 신유정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어 있는 내 옆자리에 앉는다.
“나은이는 이 누나가 알아서 데려다줄 테니까, 술이나 더 마시자.”
“…갑자기?”
뭐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 술을 퍼마시냐고 핀잔을 주던 애가 이제는 술을 더 마시자고 권유를 하고 있네.
“나 지금 많이 취해서 더 마시면…, 웁!”
“어허, 예진 선배랑도 마시고, 임나은이랑도 마셨는데 나랑은 안 마시겠다고?”
손으로 내 입을 가로막으며 서운하다는 듯이 말하는 신유정.
그 자리에 너도 줄곧 껴있었잖아, 이 자식아.
녀석이 맥주잔을 내 입에다 들이민다.
뭐야, 이거.
“이거 내 맥주잔 아닌…, 푸흡!”
“자, 쭉 마시자? 쭈욱, 옳지.”
꿀꺽! 꿀꺽!
말하는 도중에 들이닥친 맥주가 목구멍 안으로 치민다.
맥주의 청량함 속에 달큰한 맛이 진하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그냥 맥주가 아니라 소맥인 것 같다.
그것도 소주 비율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푸하아!”
와, 대체 여기다 소주를 얼마나 들이부은 거야?
고작 몇 모금 마셨을 뿐인데 조금 진정됐던 머리가 또 다시 핑핑 돌기 시작한다.
대체 무슨 속셈인가 싶어서 힘겹게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더 마셔야지?”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두 눈.
그 주변으로 분홍빛 안개가 펼쳐져 있다.
아줌마로부터 몇 번이나 보았던 마력의 안개다.
그런데 저게 왜 녀석의 눈 주변에 퍼져 있는 걸까.
저거 섹스에서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을 때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맥주잔을 쥔 녀석의 손이 점차 다가온다.
동시에 위기감도.
“유정아, 나 진짜 더 마시면 정신을 잃을 것 같…, 으읍!”
“괜찮아, 괜찮아. 이 누나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넌 마음껏 마셔도 돼.”
목구멍으로 술이 맥없이 넘어가는 와중에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든다.
“누나 믿지?”
너 같으면 믿겠….
털썩!
* * *
“후우!”
신유정은 짧게 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머리를 처박고 정신을 잃은 남녀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
“흠흠!”
그녀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을 들쳐멨다.
탱커 포지션인 그녀에게 두 사람의 무게 따위, 얼마든지 감당 가능한 수준이었다.
“선배님들, 친구들이 취해서 먼저 가보겠슴다!”
선배들의 배웅이 뒤따랐다.
털털한 성격과 우수한 성적의 탱커.
이 두 가지는 그녀를 선배들로 하여금 좋은 후배로 인식하게 만들었기에 제법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호프집을 떠나기 전, 그녀는 한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손서연.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이죽거리는 미소를 남겨준 뒤, 신유정은 곧장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택시에 올라탄 그녀는 곧장 임나은의 스마트폰을 뒤져 주소를 알아냈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녀의 손가락을 이용해 보안을 풀고 배달 어플로 들어가 그 안에 적힌 주소를 확인하면 끝.
배달 어플에 적힌 그녀의 집은 공덕역 인근.
이를 확인한 그녀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쯧…, 반대편이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신유정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귀찮지만, 지금 기분이라면 한 번쯤 데려다주지 못할 것도 없다.
“흐흐흥.”
그녀는 제 오른팔을 꼭 끌어안은 채 잠든 김도진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흘렸다.
술에 완전히 곯아 떨어졌으니 앞으로 몇 시간은 거뜬하겠지.
“아저씨, 공덕역 쪽으로요.”
거리가 무척 가까운 편이었기에 택시는 금세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깨끗한 외관의 신축 건물.
“헤에, 여기서 자취하는 건가.”
서울의 집값이 해마다 치솟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녀의 집이 무척이나 잘 사는 모양이다.
서울 한복판, 그것도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 건물에서 스무 살이 자취를 시작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녀는 임나은의 지갑에서 카드키를 꺼내어 현관을 열고 들어가 안방 침대에 그녀를 던지듯 내팽개쳤다.
“으응…!”
어느 정도 충격이 있었는지, 몸부림치는 임나은을 향해 신유정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머리통 한 대 쥐어박으려다 참는 줄 알아라. 감히 누구한테 꼬리를 쳐, 불여우 같은 년이.”
그녀는 곧장 문을 거세게 닫고 나와 건물 앞에 서 있는 택시에 올라타 집 주소를 불렀다.
“후우…!”
신유정은 창문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김도진의 머리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개새끼….”
그녀는 김도진의 머리통에 꿀밤을 한 대 먹이려다 간신히 참았다.
오늘 그 때문에 마음 졸였던 순간이 대체 몇 번이었는지 모르겠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이 새낀.”
신유정은 홀쭉해진 그의 볼을 엄지와 검지로 붙잡아 늘리다 손을 놓았다.
탄력에 의해 빠르게 되돌아가는 피부.
급격하게 살이 많이 빠지면 피부의 탄력이 떨어지기도 한다는데, 그런 것도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피부가 좋아졌다.
“보는 맛은 좋아져서 좋은데….”
솔직히 그녀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지금껏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도 취향이란 건 존재한다.
그리고 김도진의 지금 모습은 썩 그녀의 취향을 저격했다.
문제는 그의 얼굴이 자신의 취향만을 저격하는 마이너한 얼굴이 아니라는 것.
오늘만 봐도 그렇다.
김도진은 모르지만,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몇 명의 선배가 그녀를 찾아왔었다.
그와 자연스럽게 엮일 수 있게 좀 도와달라며 말이다.
그뿐인가?
이 줏대 없는 자식은 손서연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질 않나, 불여우 같은 년한테 홀려서 같이 헤벌쭉 웃고 있질 않나.
오늘은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가슴 졸이는 순간밖에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서서히 길들이는 건 이미 글러 먹었으니, 진도를 단숨에 빼버리기로.
“아저씨, 저기 편의점 앞에서 잠깐만 세워주세요.”
“예에.”
그녀는 곧장 편의점으로 들어가 주변을 서성거리다 마침내 찾고 있던 걸 발견했다.
바로 콘돔.
낯짝이 제법 두꺼운 그녀에게도 콘돔을 사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빨리 사서 결제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뭔 종류가 이렇게 많아?”
난관에 봉착했다.
일반형은 뭐고, 돌출형은 또 뭐고, 초박형은 또 뭐란 말인가.
“아, 씨. 그년들이 뭐가 좋다고 했었는데….”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어울리던 여자애들이 떠들어대던 말을 애써 되감아 보았다.
덧없이 흘려보냈던 대화들이 드문드문 재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답을 찾았다.
“이거다.”
초박형 콘돔.
여자의 만족도 만족이지만, 남자도 얇아서 좋아한다던가 뭐라던가.
그러나 그녀가 고려해야 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씨발…, 사이즈는 또 왜 나눠져 있는 건데.”
남자 자지가 다 거기서 거기지 사이즈는 무슨 사이즈란 말인가.
“아, 몰라.”
그녀는 그냥 쿨하게 사이즈별로 하나씩 전부 손에 쥐고 가 카운터에다 내려놓았다.
“계산이요.”
“예, 예.”
바코드를 찍는 알바생에게서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녀는 애써 외면한 채 결제를 빠르게 끝내고 택시 안으로 돌아왔다.
“후….”
갑자기 울컥한 신유정은 잠들어 있는 김도진의 볼을 제법 세게 꼬집었다.
“내가 너 때문에…!”
설마 자신이 콘돔을 직접 사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온몸을 스멀스멀 타고 흐르는 듯했다.
택시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김도진을 등에 업고 계단을 올랐다.
옥상으로 올라가 화분 밑에 숨겨져 있는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사시사철 깔려 있는 매트리스 위에 그를 내려놓았다.
“후우.”
사내의 방에 들어갈 때면 꼭 풍기는 묘한 체취가 그녀의 코끝을 간질인다.
“…제법 깔끔하네.”
옛날에는 돼지우리 같았는데 방도 제 몸처럼 사람 사는 집으로 바꾼 모양.
그녀는 콘돔이 든 비닐을 바닥에 던지며 털썩 주저앉았다.
“하, 씨발…, 진짜 이게 맞나.”
홧김에 반, 술기운에 반.
충동을 유발하는 양대 기운에 힘입어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순간 망설여졌다.
오늘 거사를 치르는 게 맞는지.
김도진의 소심한 성격을 생각하면 그냥 지금처럼 천천히 구슬려도 되지 않을까.
“아니, 아니지.”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최근 김도진은 달라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몸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그의 성격 또한 차츰 달라지고 있는 게 눈에 띈다.
몸도 한순간에 확 뒤바뀌었는데, 성격이라고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 또한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