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앉아도 될….”
“안 돼.”
한겨울에 부는 바람보다 매몰찬 거절에 술기운이 확 달아난 사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멀어져갔다.
그렇게 두 명의 동기와 한 명의 선배를 거절하고 나니, 자리가 불편해졌다.
이대로 가면 친목 도모가 아니라, 싸가지 없는 후배로 낙인이 찍히게 될 것만 같은 상황.
그녀는 잠시 그들의 화제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도 이미 선객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얼굴이다.
자신과 키가 비슷한 마법 학과의 특례 입학생.
자기소개할 때 묘하게 시선이 가서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쳐다봤던 사내.
‘김도진…, 이랬나.’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앉아 있던 그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손서연은 이유 모를 동질감에 사로잡혔다.
대화 한 번 나눠보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눈앞의 사내가 자신과 비슷한 느낌일 거란 생각이 머릿속에 강하게 퍼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 안녕.”
얼마 만일까.
자기가 먼저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본 적이.
그에게서 돌아올 말을 떠올리며 서투르게 다음 말을 준비하고 있을 때.
김도진에게서 예상치 못한 물음이 돌아왔다.
“쉬려고 나오셨나 봐요?”
“…어.”
가까스로 답을 한 손서연이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김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지나쳐 갔다.
“그럼 쉬십쇼. 저는 다 쉬어서.”
찬바람이 쌩 부는 듯한 태도에 손서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떠나가는 김도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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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묘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딱 정의를 내릴 수가 없어서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호프집에 도착하자마자 시원하게 소주에 맥주를 말아 연거푸 들이켰는데, 내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히끅!”
지금 내 몸은 과거 술을 하도 잘 마셔서 술고래라고도 불렸던 손시우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몸뚱어리가 술을 마셔본 건 스무 살이 되고 나서 호기심에 편의점에서 맥주며 소주를 사다가 방에서 혼자 마셔본 게 전부다.
심지어 그마저도 한 잔 마시고 맛이 없다는 이유로 다 버렸네.
“비이일어머그을….”
혀가 꼬인다.
연거푸 들이켠 술 때문에 온몸이 취기에 적셔진 듯한 기분.
정신은 멀쩡한 것 같은데, 몸이 점점 통제를 벗어나고 있는 것만 같아.
“야, 갑자기 뭔 술을 그렇게 퍼마시냐?”
타박하는 말과 함께 벌어진 입속으로 무언가가 쏙 들어온다.
입을 닫고 씹어보니 짭짤한 튀김옷과 야들야들한 닭고기의 맛과 식감이 느껴진다.
안주라도 먹고 마시라고 치킨 한 조각 입에 넣어준 건가.
내게 잘 보여서 이용해 먹으려는 목적일 게 뻔하지만, 그래도 챙겨주는 게 나쁘진 않네.
“고맙당….”
뭐야, 이 거지 같은 말투는.
그냥 고맙다고 담백하게 말하려 했건만, 꼬부라진 혀가 제멋대로 쪼를 집어넣고 있네.
“야.”
“엉…?”
고개를 들어 올리자, 신유정의 표정이 보인다.
은은하게 찌푸린 미간을 보아하니,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모양인데.
“내가 아까 저 선배 포기하랬다고 기분 안 좋아서 퍼마시는 거냐, 지금?”
“아닌데….”
포기고 나발이고, 애초에 그런 감정도 없는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얘는.
…그런데 타인이 보기엔 그런 식으로 비쳤을 수도 있겠네.
지금 이 몸뚱어리는 손서연과 어떤 식으로도 엮여 있지 않으니.
“아니면 뭐, 쟤 때문이냐?”
“쟤가 누구…, 나은이?”
신유정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엔 임나은이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호프에 도착하자마자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불려가더니 저기까지 갔나 보네.
주는 족족 마시면 취할 텐데…, 괜찮으려나.
“나은이가 왜…?”
내가 궁금하다는 투로 묻자, 녀석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을 흐린다.
“아니, 네가 쟤도 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길래….”
“흐음….”
얘는 옆에 앉아서 내가 어딜 쳐다보는지만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요즘 들어 부쩍 심해진 질투심이 느껴진다.
내게는 좋은 일이지.
질투심이 커지고 있다는 건 우리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오늘 만났는데 좋고 말고 할 게 어딨어. 그냥 밝은 애구나, 싶은 정도가 다지.”
“흐응…, 그래?”
내 대답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는 녀석.
이 몸뚱어리가 신유정을 무서워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런 거였다.
얼굴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
어찌 보면 사람이 참 솔직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싫은 티 팍팍 내면 저것만큼 무서운 게 또 없다.
“얘들아, 여기 잠깐 앉아도 될까?”
웃고 있는 녀석을 쳐다보고 있는데 별안간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웬 여자가 이쪽을 보면서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서 있다.
골반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베이지색 스커트에 마찬가지로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흰색 티를 입고 있는 여자.
청순하게 웃고 있는 예쁘장한 얼굴.
낯이 익다.
내가 자기소개할 때 환호를 보내줬던 여자 선배 중 한 명.
“선배님이 여기는 왜….”
신유정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여자 선배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왜기는, 새로 입학한 우리 후배님한테 술 한 잔 같이 마시려고 왔지.”
그러면서 내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아….”
신유정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사람이란 게 그렇다.
자리에 앉았을 때보다 앉기 전에 내쫓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고, 쉽거든.
“후배님, 내 이름 알아?”
여자 선배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상체를 슬쩍 앞으로 숙이며 내게 묻는다.
은근히 비치는 가슴골.
의도가 뻔한데도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건 남자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인가….
“아뇨, 잘….”
내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끝을 흐리자, 여자 선배가 나긋하게 웃으며 입을 연다.
“예진이야, 조예진. 잊어버리면 안 된다?”
“넵,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짤막하게 제 이름만 알려준 조예진은 자연스럽게 술병을 향해 손을 뻗더니 이내 살짝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 술 꺼낸 지 오래됐나 봐. 난 술이 약해서 차가운 거 아니면 못 마시는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신유정을 바라보더니.
“유정아, 미안한데 저기서 술 한 병만 꺼내 올래?”
“…그냥 점원 부르면 되잖아요.”
“에이, 우리 사람이 몇 명인데. 자꾸 부르면 미안하잖아, 응?”
아하.
이거 뭔지 알겠다.
딱 봐도 방해가 될 것 같은 신유정을 다른 데로 치워버리려고 하는 거구나?
이야, 이거 재밌네.
“…알았어요.”
에이, 재미없다.
신유정이 특유의 깡다구로 쏘아붙일 줄 알았는데, 선배라서 그런가…, 애가 힘을 못 쓰네.
나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밍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신유정의 팔을 붙잡았다.
“…왜?”
그러자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이 쏟아진다.
이 상황을 물리쳐주길 바라는 듯한 적나라한 바람이 내 얼굴에 팍팍 꽂힌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예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가 술 차갑게 해드릴 테니, 잠시 줘보시겠어요?”
“응? 아…, 그래.”
반쯤 남은 소주병을 넘겨받은 뒤 그대로 마력을 끌어당겼다.
전투에서는 영 쓸모가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유용한 마법이 하나 있지.
「차가운 손(Chilling Hand).」
진짜 마법 이름이 차가운 손이다.
외국에서는 칠링 핸드라고 부른다는데, 우리나라 마법서에는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
직관적인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손에 냉기를 더해주는 마법이다.
예전에 아줌마의 더운 몸을 식혀줄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웠던 유용한 녀석.
냉기가 손에 쥐고 있는 소주병에 곧장 전해진다.
마력을 조금 더 밀어 넣자 미지근하던 소주에 살얼음이 살짝 낄 정도로 차갑게 변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한 잔 따라드릴게요, 선배님.”
“어, 그래…!”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던 조예진이 황급히 술잔을 들어 올린다.
쪼르르
찰랑이는 술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내가 쥐고 있던 술병을 가져가 비어 있는 내 술잔에도 소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그러면서 은근한 말투로 말하길.
“우리 짠 할까?”
“네.”
나는 그 전에 신유정의 비어 있는 술잔에도 소주를 따라주었다.
은근슬쩍 너를 챙기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서.
“앞으로 잘 부탁해?”
“넵,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술잔을 부딪치고, 안에 담긴 술을 입에 말끔히 털어 넣는다.
잠깐 가라앉았던 술기운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
안 되겠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는 게 좋겠어.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아이, 이제 시작인데?”
“잠깐이면 돼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얼른 와야 해?”
“네네.”
그렇게 조예진과 신유정을 내버려 두고 혼자 밖으로 나왔다.
앞에 재떨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후아.”
좀 살 것 같네.
“기분이 좀 오락가락하네….”
오늘은 정말 감정적으로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대학교 입학식에 설레기도 하고, 빌런의 습격 때문에 긴장도 하고….
사실 가장 극적인 변화를 만든 건 손서연 때문이었지.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여러 의문이 남긴 하지만, 솔직히 좀 반가웠다.
아무리 새 삶을 산다고 다짐하긴 했어도 과거의 삶을 한순간에 모조리 잊을 수야 있나.
“흐흐흐, 짜식.”
그래도 내심 뿌듯한 것도 있다.
핏줄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녀석이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 중에서 제일 강하더라.
그 정도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우리 서연이가 이끌어가지 않을까 싶다.
“언제 그렇게 컸담.”
뿌듯한 마음이 한순간에 곤두박질쳐 단숨에 우울해졌다.
“그러게….”
언제 그렇게 컸을까.
“아빠인 나는 몰랐는데….”
주희는 알고 있었을까.
“아휴.”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잊자.
지금에 와서 그런 거 생각해봤자 뭐 하겠어.
“그래, 잘 사는 거 보면 됐지.”
주희도, 서연이도.
나는 그들이 못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말년이야 어쨌든.
주희는 내 사랑하는 아내였고, 서연이는 내 딸이었으니.
씁쓸해하지 말자.
그들이 잘 사는 걸 봤으니, 이제 나도 지금보다 더 잘 살면 되는 거야.
그거면 되는 거잖아?
“그래, 그거면 됐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담배 피우러 나온 선배인가 싶어 몸을 일으키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조금 전까지 떠올리고 있었던 손서연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내 앞에 서 있다.
“그…, 안녕.”
뭐지, 이 사교성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맥없는 인사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쉬려고 나오셨나 봐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