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20)

난리들을 치고 있다.

”속 시원한 대답, 아주 잘 들었습니다. 이제 도진 후배도 내려가도 좋아요.“

박진우에게 마이크를 돌려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기소개만 했을 뿐인데, 기운이 쪽 빨려나간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자,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행사를 시작…, 아차! 제가 한 사람 더 소개하는 걸 까먹고 있었네요.“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박진우.

특례 입학생들은 전부 소개한 것 같은데 누가 더 남아 있다는 거지.

”이번에 2학년 편입생이 한 명 있어요. 개인적으로 저랑 친분이 있는 후배인데, 무려 마탑에서 한국 대학교로 편입한 인재 중의 인재! 앞으로 모셔보도록 할게요.“

신기하네.

마탑에서 한국 대학교로 편입을 해오다니.

마탑은 마법을 배우는 데에 있어 꿈의 환경이나 다름없다고 들은 것 같은데.

굳이 여기로 온 이유가 뭘까.

나와는 가장 먼 곳에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몸을 일으켰다.

검정색 모자를 눌러 쓰고, 검정색 후드티에 검정색 청바지까지 입고 있는 여자였다.

”와….“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처음으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여기서 본 사람 중에 박진우가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진짜는 따로 있었네….“

여자의 주변으로 마력이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다.

이건 단순히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무언가 더 특별한 게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커다란 강의실을 양분하고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여자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스친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머릿속을 뒤덮는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턱 말곤 거의 보이지 않는데도, 낯이 익는 이 느낌은 뭘까.

”자, 여기 마이크.“

박진우가 건네주는 마이크를 힘없이 받는 여자.

이윽고 마이크를 대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목소리.

별안간 여자가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제 손으로 벗었다.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윤기 나는 검은색 단발머리가 찰랑인다.

옆으로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 날렵한 코와 턱선.

전체적으로 차가운 인상이지만, 한 가지…, 아니, 두 가지 만큼은 확실하다.

”와…….“

하나는 남학생들이 반쯤 넋이 나간 채로 탄성을 내지를 만큼 여자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얼굴이 내게는 몹시도 익숙하다는 것까지.

”씨발.“

나도 모르게 작게 내뱉은 욕과 동시에 여인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마법 학과 편입생 손서연입니다.“

…내 딸내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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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우의 화술은 제법 뛰어났다.

2학기 수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직업군별로 어떤 수업이 인기가 많은지, 중요한 정보들을 쏙쏙 전달하는 도중에 밥이 무엇이 맛있고, 어디 커피가 싸고 맛있다 등, 소소하지만 유쾌한 정보들을 섞어 전달함으로써 청중들의 집중을 이끌어냈다.

본인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정보들이기에 분명 앞으로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어줄 정보들이었지만, 내게는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지금 내 정신은 온전히 손서연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작년에 제 엄마 따라 마탑에 들어간 녀석이 왜 편입 시험까지 치러가며 여기에 온 걸까.

“한주희가 그걸 가만히 뒀을 리가 없는데….”

더 의아한 건 한주희, 그녀가 이 일을 허락했느냐다.

아무리 바빠도 딸의 미래에 관한 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서던 여자다.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지만, 그녀는 내심 서연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제 자리를 이어받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런 여자가 서연이가 마탑을 떠나 한국 대학교 편입 시험을 치르는 것을 순순히 두고 보았을까.

“흐음….”

저절로 그림이 그려진다.

집안에서 두 사람이 소리 지르며 싸우는 모습이.

한주희야 옛날부터 화끈했고, 서연이도 옛날에는 분명 날 닮아서 얌전하고 그랬는데 크면서 몸속에 잠들어 있던 제 엄마 유전자가 깨어났는지 고집이 엄청 세졌었지.

대판 싸우고 냉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거나, 한주희가 져주기로 했거나.

둘 중 하나는 이루어졌을 게 틀림없다.

내 몸을 빼앗은 짭시우가 둘 사이를 중재했을 확률?

그딴 건 단 1%도 없다고 장담한다.

방구석 히키코모리의 나약한 정신으로는 중재는커녕 둘 사이에 껴있기도 힘들걸.

집에 방 많으니까 그곳 어딘가 구석에 짱박혀서 귀 막고 싸움이 끝나길 기다리지 않았을까.

새끼, 쌤통이다.

내 몸뚱어리로 벌벌 떨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며 쾌감을 느끼기도 잠시.

“야, 너 자꾸 어딜 보냐?”

옆에 있던 신유정이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험상궂은 얼굴을 들이밀더니, 손가락으로 내 시선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

“아하…, 저 선배 보고 있었구나? 이름이 뭐더라? 손…, 손….”

“손서연…, 크흠!”

내가 이름을 내뱉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진다.

유도 신문이었나….

“저 선배가 예쁘긴 해, 그치?”

연이어 던져진 뻔한 유도 신문.

이 정도는 가뿐하게….

“예쁘지. 뉘집 딸인지 모르겠는데 아주 잘 컸어, 응.”

시발.

내 안에 미처 버리지 못한 딸바보의 습성이 남아 있었던 건가.

“헤에…,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봐?”

“그건 절대 아니야.”

사실 첫눈에 반하기는 했었지.

기나긴 산통 끝에 태어난 딸아이를 본 순간, 세상 전부를 바쳐서라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말겠다고 다짐했었으니.

“에이, 아니긴. 눈에 아주 하트가 뿅뿅 박혀 있는데?”

이죽거리는 말투에 나는 정론으로 받아쳤다.

“유정아…, 사람의 동공은 하트로 변할 수가 없어.”

그러자 녀석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대답을 잘못 골랐나 보다.

일그러진 얼굴로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데, 등골이 오싹해진다.

난 여자들이 저럴 때가 제일 무섭다.

한주희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아니, 화가 났으면 그냥 찡그리고 있으면 되는데 왜 굳이 억지웃음을 지으려고 할까.

그러면서 화가 났냐고 물어보면 또 안 났다고 대답한다.

자기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라면서.

“혹시 화났어?”

“아-니? 내가 왜 화가 나? 네가 누굴 좋아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화났네, 화났어.

그러면서 이 악물고 화 안 났다고 구라치는 것 좀 봐.

그러다 이빨 다 갈리겠다.

나를 힘껏 노려보던 녀석이 별안간 고개를 숙이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야, 김도진.”

“왜?”

“내가 너 걱정돼서 하는 말이거든?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잘 들어.”

저렇게 밑밥 깔면 꼭 자기를 위해서 하는 말이던데.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러는 거지.

“너 저 선배 부모가 누군지 아냐?”

“어….”

이걸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바로 손시우, 한주희 부부야. 우리나라에서 국빈 대우받는 S급 헌터 두 명.”

“그런데?”

“급이 안 맞는다고, 급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나 했더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서연이가 사랑하는 남자라면 그놈이 사기꾼이거나, 범죄자가 아닌 이상 괜찮다는 쪽이었지만, 한주희는 달랐으니까.

따질 건 전부 따져서 완벽한 집에 시집을 보내고 말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지.

그게 안 되면 능력 좋은 데릴사위를 들이자고 했던가.

“그러니까 내 말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이니까 혹시 마음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접는 게 좋을 거다, 이거야.”

그러면서 눈을 게슴스레하게 뜨더니, 은근슬쩍 내 어깨에 팔을 휘감는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손서연 선배가 아니라, 네 주변을 잘 둘러봐. 혹시 또 아냐? 너랑 훨씬 잘 맞는 짝이 있을지.”

이제는 점점 노골적으로 자기를 어필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애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귀여워지고 있다.

이제는 과거의 트라우마 같은 건 거의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

“알았어. 주변을 잘 둘러볼게.”

“크흠, 그래.”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리는 신유정을 보다가 나도 앞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당장은 그럴 마음이 요만큼도 없지만, 만약 결혼을 꼭 해야 한다면 신유정은 나름 훌륭한 선택지다.

왜냐고?

쟤랑 결혼하면 아줌마도 따라오는 거잖아.

한 명과 결혼했는데 여자는 둘이 되는 거니까 어찌 나쁠까.

“자, 공식적인 오리엔테이션 행사는 여기까지. 지루한 얘기 듣느라 다들 고생했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어라, 벌써 오리엔테이션 끝인가.

“이제 다음부터는 비공식적인 행사로 넘어가야죠?”

“예!”

박진우의 말에 모두가 환호성 내지르듯 큰 목소리로 대답한다.

비공식적인 행사라고 하면….

“학교 앞 호프집 예약해 뒀으니까 다들 그쪽으로 이동할게요. 말했다시피 비공식 행사니까 시간이 여의치 않은 학우분들은 참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좀 이따 봐요!”

손을 흔들면서 마이크를 내려놓고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박진우.

기시감과 함께 녀석이 서연이를 소개할 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후배….

“아.”

이제야 생각났다.

처음 박진우를 봤을 때 어디서 본 것 같다 싶더라니.

나는 술 마실 생각에 싱글벙글인 신유정의 팔을 붙잡고 녀석에게 물었다.

“혹시 박진우 선배 집안이 유성 길드야?”

“어. 근데 너 그거 어떻게 알았냐? 저 선배 웬만해선 그런 티 잘 안 내는데.”

유성 길드.

대한민국에 랭킹 3위에 빛나는 헌터 길드다.

길드장은 박정팔…, 아니, 박정민.

S급 근처까지 다다른 A급 헌터.

헌터로서의 능력도 출중하지만,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좋은 녀석.

그래, 내가 왜 저 얼굴을 잊고 있었을까.

옛날의 정팔이…, 아니, 정민이 얼굴을 빼다 박았는데 말이야.

나는 과거에 녀석을 본 적이 있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딸내미가 건강을 회복하고 한창 뛰어다니기 시작할 무렵이었나.

친구 만들어주겠다고 녀석의 아들내미와 이따금 만나 놀게 해줬었지.

그때 우스갯소리로 둘이 크면 결혼시키면 되겠다고 주희랑 정팔…, 정민이가 하하호호 웃을 때 나만 열받아서 몰래 녀석에게 꿀밤을 때렸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 그렇게 만나다가 애들 한창 중, 고등학교 다닐 때는 소원해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자기들끼리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던 건가.

“몰랐네….”

하긴, 내가 아는 게 뭐가 있겠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제 아빠랑 밥도 같이 안 먹으려고 하지도 않는 다이어트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던 녀석인데.

“알 리가 없지.”

생각해 보니까 열받네.

“유정아, 나은아!”

“왜.”

“어…?”

“술 마시러 가자, 술!”

오늘은 좀 마셔야겠다.

* * *

공식적인 오리엔테이션 행사를 끝마친 뒤.

그녀, 손서연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OT 이후의 술자리.

말로는 비공식적인 행사라곤 하지만, 사실상 필참이나 다름없는 행사다.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친분이 적지 않기에.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딱히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술 자체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옛날의 트라우마 때문에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한 사람의 단단한 가드에 가로막혔다.

“가볍게 한 잔만 마시고 가자. 나도 금방 일어날 거야.”

“…….”

그녀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아직 갚지 못한 마음의 빚이 남아 있기 때문.

결국 손서연은 강의실에서 보았던 학생들이 대다수 모여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술판에 조용히 끼어들었다.

앞에 놓인 맥주 한 잔을 하염없이 홀짝이며 시간을 보냈다.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했으니까….’

박진우가 자리를 뜨는 순간 자신도 바람처럼 사라져버릴 요령이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금방 떠날 거라던 박진우는 이 자리, 저 자리를 오가며 술잔 받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하….”

작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알딸딸하게 취한 듯한 동기 하나가 술잔을 들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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