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20)

“네가 그런 식으로 연락을 씹고 그러면 칭찬을 해줄 수가 없어요. 아시겠어요?”

“알겠어.”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연락 끊기만 해라. 그땐 끝이야, 알겠어?”

끝은 무슨.

내가 여기서 더한 짓을 해도 쉽게 끝내잔 얘기는 못 할 거면서.

아니, 애초에 끝내고 말고 할 사이도 아니지 않나?

이게 은근슬쩍 우리 사이가 뭐 맺고 끊을 게 있는 것처럼 조작하고 있어.

“알았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래도 뭐 일단 기분은 좋으니까 알았다고 해두자.

당근과 채찍의 비율은 1:1이 좋으니까, 한 번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또 한 번은 녀석이 싫어하는 걸 일부러 해서 골려주고.

그러다 보면 되지 않을까.

“엄마가 밥 같이 먹재. 내려올 거지?”

“응, 먼저 내려가 있어. 준비하고 금방 내려갈게.”

그리 말하자, 녀석이 헤드락을 건 팔에 힘을 살짝 더 주며 낮은 음성으로 내게 말을 건넨다.

“경고하는데, 너무 멋부리지 마라.”

“어…, 왜?”

이번엔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

“그, 뭐야. 원래 멋 제대로 부릴 줄도 모르는 놈이 특별한 날이랍시고 힘줬다가 망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

전혀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알겠어. 어차피 난 꾸밀 줄도 몰라서 그냥 대충 입으려고 했어.”

“그래, 그래. 그럼 준비하고 얼른 내려와라?”

“응.”

이제야 간신히 녀석의 품에서 벗어났다.

목이 살짝 아픈 느낌이지만, 지금까지 가슴을 실컷 만끽했으니까.

“우리 강아지, 누나 먼저 내려간다.”

팡팡!

이게 갑자기 강아지 다루듯 엉덩이를 때린다.

근데 나름 나쁘지 않을지도…?

“아니, 아니지.”

정신 차려라, 김도진.

너는 길들이는 입장이지, 길들여지는 입장이 아니야!

뺨을 톡톡 때려 흐트러진 마음을 애써 다잡고 방으로 들어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적당히 몸을 씻어낸 뒤, 물기를 닦아내며 방 한구석에 놓인 옷장을 열었다.

“휑하다, 휑해.”

살이 많이 빠지게 되면서 원래 입던 옷들은 전부 버렸다.

그리고 당장 입을 만한 옷가지 몇 개만 구매했다.

지금은 하루가 멀다고 성장하고 있는 때라 많이 사둬봤자 몇 개월 뒤엔 못 입을 게 뻔하니.

“무난하게만 보이자, 무난하게.”

신유정이 말한 것처럼 난 패션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이다.

손시우일 때는 내 스케줄을 담당하는 매니저나 다른 사람들이 입으라는 대로 입었을 뿐.

그래도 그렇게 입다 보니까 뭐가 좋고, 나쁜지 정도는 알겠더라.

그렇게 길러진 안목으로 웬만해선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만한 심플한 것들로 구매했다.

흰색 와이셔츠에 검정색 슬랙스.

이 단순하고도 정석적인 패션을 보고 내 매니저는 그렇게 말했다.

“몸과 얼굴이 바쳐주면 그 무엇도 더 필요 없는 패션의 끝.”

정말 끝이라서 그렇게 말한 건 아니겠지만, 그만큼 누구에게나 잘 보일 수 있다는 거겠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통을 집어 든다.

머리를 세팅할 때 남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왁스.

뚜껑을 열어 손가락에 살짝 덜어내 머리에 슥슥 발라 앞머리를 가볍게 넘긴 뒤 고정시킨다.

과거 손시우일 땐 앞머리를 깠냐, 덮었냐에 따라 깐시우 또는 덮시우라고 불리곤 했다.

그걸 빌어 얘기하면 오늘은 깐도진 스타일이다.

“됐다.”

전체적으로 세팅된 모습이 마음에 든다.

내 몸에 맞춰 제작된 명품들만 걸쳤던 손시우 시절보다 지금이 더.

사실 세팅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간단했지만, 그 몸엔 없고, 이 몸에만 있는 게 있거든.

“젊음이 최고의 패션이지.”

오늘도 이 몸을 내어준 짭시우 군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마지막으로 와이셔츠 소매를 살짝 걷어준 뒤, 현관으로 향했다.

옷 살 때 함께 사두었던 흰색 단화를 신고, 곧장 계단을 내려가 한 층 밑에 있는 아줌마네 집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지금 나가요!”

익숙한 아줌마의 목소리.

덜컥!

“도진이 왔…, 어머나!”

한창 아침 준비 중이셨는지,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엔 뒤집개를 쥐고 마중나온 아줌마가 화들짝 놀라며 남은 한쪽 손으로 제 입을 가린다.

“왜 그러세요, 아줌마?”

“도, 도진이 너….”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의 반응이 절대 부정적인 건 아니라는 걸.

“그렇게 차려입으니까 너무 달라 보인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아줌마의 눈빛이 뜨겁다.

만화에서 보면 이쯤 해서 동공이 하트 모양으로 바뀌던데.

…진짜 언제 한 번 연구해 볼까.

“아! 어, 얼른 들어오렴. 식사 준비 거의 다 됐단다.”

“넵.”

가벼운 걸음으로 앞서 걸어가는 아줌마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섰다.

“유정이는요?”

“글쎄…, 방에 들어가더니 아직 안 나왔나 봐.”

그렇다면 지금 이 주방에는 아줌마와 나뿐이라는 거잖아?

“흥흐흥….”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를 부르며 식사 준비에 한창인 아줌마의 뒤에 슬쩍 다가가 팔을 뻗어 엉덩이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어맛! 도, 도진아…!”

아줌마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진다.

“아줌마, 제가 이렇게 차려입으니까 어때요?”

“그…, 조, 좋더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좋은데요?”

“그, 그냥 다 좋았어. 앞머리 넘긴 것도, 와이셔츠 차림도….”

점점 솔직해지는 아줌마를 볼 때마다 속절없이 애정이 상승하는 느낌.

아줌마는 말없이 식사 준비에 몰두했고, 나는 그런 아줌마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바로 그때.

덜컥!

방문 열리는 소리에 나는 곧장 아줌마에게서 떨어져 식탁 의자에 빠르게 앉았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너 언제 왔…, 아니, 그 차림새는 또 무슨….”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반기던 녀석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진다.

갑자기 왜 저러지?

한껏 인상을 구긴 녀석이 험상궂은 말투로 내게 말했다.

“야, 내가 적당히 꾸미라고 안 했냐?”

내가 꾸민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야 들…, 아니, 안 들어!”

든다는 거야, 안 든다는 거야.

“하아….”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는 신유정.

그때 구세주가 등장했다.

“도진이 멋지게 잘 입었는데 왜 그러니, 넌?”

아줌마…!

“아니, 그니까, 그게 문제라니까?”

“도진이가 잘 차려입은 게 왜 문제인데?”

“그…, 아무튼 있어, 그런 게!”

“어머머, 얘는. 꼭 자기 할 말 떨어지면 짜증부터 내더라.”

“아니거든?!”

“알겠으니까 빨리 앉기나 하렴. 아침 준비 다 됐어.”

짜증이 팍팍 느껴지는 걸음으로 다가와 내 맞은편에 앉는 신유정.

식탁 위에 갖가지 반찬들이 놓이기 시작한다.

평소에 자주 먹던 것들이긴 하지만, 가짓수가 다르다.

거기에 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까지.

식사 준비를 마친 아줌마가 내 옆에 앉는다.

“자, 먹자.”

“잘 먹겠습니다.”

아줌마가 숟가락을 들기가 무섭게 나도 따라 들었다.

곧장 김치찌개를 한 숟갈 떠먹으려 했더니.

“아.”

흰색 와이셔츠가 마음에 걸린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먹어도 한 방울 튀는 순간 이 모든 세팅이 박살 나버리잖아.

“아, 참.”

그때 갑자기 아줌마가 자기 몸에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풀어, 내 목에 걸어주었다.

“도진이 흰색 와이셔츠에 빨간 국물 튀기면 안 되지.”

그러면서 내 허리에 팔을 감아 뒤쪽에 끈으로 매듭까지 지어준다.

“자, 이제 됐지?”

자애롭게 웃는 아줌마.

이게 바로 정실력 넘치는 행동이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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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는 아주 좋았다.

매일 혼자 먹다가 같이 먹을 때의 즐거움이 생기니 아는 맛도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자, 이것도 먹어봐.”

한 숟가락 뜰 때마다 반찬을 얹어주는 아줌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하, 누가 보면 내 엄마가 아니라 네 엄만 줄 알겠다.”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째려보며 질투를 보내오는 신유정 또한 좋았다.

고작 반찬 올려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질투하는데, 나중에 내가 자기 엄마랑 섹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하려나.

엄마와 딸을 동시에 겹쳐놓고 섹스하는 상상을 하니 참을 수 없는 배덕감이 치솟는다.

옛날의 나를 생각해보면 지금은 어딘가 망가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막 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도덕적으로 50년 가까이 살았으니 비도덕적으로도 50년 정도는 살아도 되지 않을까?

“잘 먹었습니다.”

꾹꾹 눌러 담은 밥 두 공기를 해치우고 나서야 식사가 끝이 났다.

먼저 다 먹고 맞은편에 턱을 괴고 앉아 기다리고 있던 신유정이 내 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일어나선 팔을 잡아당긴다.

“야, 이제 가자.”

“그래.”

이렇게 맛있는 밥을 손가락만 움직여 먹었는데 식기 치우는 거라도 도와드려야 하지 않나 싶지만, 아줌마는 괜찮다며 내게 가라고 손짓한다.

“엄마, 다녀올게.”

“다녀…, 오겠습니다?”

뭔가 이상한데.

난 이 집 사람도 아닌데 다녀오겠다는 말이 맞는 건가.

내 말을 들은 아줌마는 웃는 얼굴로 다가와 입고 있던 앞치마 때문에 조금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해주며 내게 말했다.

“잘 다녀오렴.”

묘한 느낌에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어떨 때는 마누라 같고, 또 어떨 때는 엄마 같고.

두 사람만의 어떤 애틋한 감정에 휩싸이려고 할 즈음.

신유정이 내 팔을 확 잡아당긴다.

“야, 빨리 가자니까.”

“엇….”

무드 없는 년.

“넌 우리 엄마가 그렇게 좋냐?”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도중, 녀석이 내게 물었다.

“좋지?”

성적인 감정을 말끔히 배제해도 아줌마는 좋은 사람이지.

내 말에 녀석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면 울 엄마가 너네 엄마였으면 좋겠고 막 그러겠다?”

“뭐…, 그렇…지?”

처음에는 저런 사람이 내 엄마였다면 참 좋았겠다, 싶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보다 더 좋은 관계가 됐는데, 굳이?

“흐흥, 방법이 있지 않을까? 울 엄마가 네 엄마도 되는 방법.”

“…그런 게 가능한가?”

이 녀석이 무슨 수작을 부리나 했더니, 감히 내 앞에서 결혼 카드를 꺼내 들어?

갈!

결혼은 지옥이거늘!

“자~알 생각해봐. 엄청 좋은 방법이다?”

그래도 부끄러운지 지 입으로 결혼이라는 단어는 안 꺼내네.

나랑 결혼하면, 따위의 말을 꺼내는 순간 파이어볼을 갈겨버리려고 했더니.

운 좋다, 신유정.

“아, 버스 왔다.”

마침 도착한 버스.

버스에 올라 카드를 찍으려 하자, 녀석이 내 손을 막아선다.

“아저씨, 두 명이요.”

그러고선 자기가 내 몫까지 찍더니, 날 보며 씨익 웃는다.

뭐 어쩌라고….

애가 꼭 하는 짓이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이것저것 막 해보는 숫기 없는 남자 같냐.

그런데 또 얼굴은 예뻐서 그 갭이 나름대로 마음에 든단 말이지.

“야,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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