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나는 다시 만나게 된다.
그때 나는 과연 어떤 감정을 품게 될까.
궁금증이 들끓었다.
* * *
아무리 주어져도 찰나처럼 느껴지는 방학이 끝나고, 개강일이 다가왔다.
신유정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유는 단 하나.
“김도진….”
그 때문에.
그녀는 제 몸을 덮고 있는 얇은 이불의 끝자락을 잘근잘근 씹으며 화를 참았다.
“어떻게든 방학 중에 더 구워삶았어야 했는데…!”
칼라슈의 시련에서 그의 마법을 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그의 재능이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웃돈다는 것을.
낭중지추라고 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제 능력을 사용하지만, 이걸 보는 사람의 눈은 휘둥그레진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다.
보는 눈이 영 꽝인 사람이 봐도 그의 재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이대로 입학하면 온갖 것들이 난리 쳐댈 게 뻔해.’
그래서 개강 전에 그와의 접점을 더욱 늘릴 생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더 오래 붙어 있으면서 정이 됐든, 몸정이 됐든 깊게 하려 했건만.
“으으…!”
순간적으로 치솟은 화를 참지 못한 그녀가 주먹으로 베개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대체! 왜! 뭐 때문에! 얼굴 보기가 힘든 건데!”
그의 얼굴을 못 본지가 어느덧 3주째다.
분명히 방에 있는 것 같아서 찾아가 보면 없고, 헬스장에도 안 나온다.
그렇게 허탕만 치다가 개강일이 다가왔다.
“오늘은 볼 수 있겠지.”
그녀에게 오늘이 개강일이라면, 김도진에게는 특례 입학자들의 입학식이 열리는 날이다.
지금까지 요리조리 잘 피해다녔다만, 오늘만큼은 만날 수밖에 없다는 뜻.
“뒤졌어, 넌.”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이를 바득바득 갈며 침대에서 일어나는 신유정.
곧장 샤워를 하고, 옷장을 연다.
단출한 옷들 중에서 그나마 친구들이 예쁘다고 했었던 것을 골라 몸에 걸친다.
다리에 딱 달라붙는 스키니진에 흰색 크롭티.
거기에 카키색 얇은 항공 점퍼를 걸친다.
언제나 그렇듯 정돈된 머리 위에 모자를 눌러 쓰려다 가까스로 멈췄다.
“이건 아니지.”
그녀는 안다.
제 외모가 남자의 마음을 휘어잡는 데에 훌륭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평소에는 그것이 싫어 모자를 쓰고 다녔지만, 오늘은 아니다.
한껏 보여주어 김도진의 눈을 휘어잡아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러니 모자는 패스.”
모자를 도로 걸어둔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제 차림새를 확인해 보았다.
“뭐…, 괜찮네.”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깔끔한 패션.
그녀는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흡족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탁탁탁탁!
주방에서 칼과 도마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 한창 아침 식사 준비에 한창인 서정희의 앞으로 다가갔다.
“엄마!”
“깜짝이야!”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서정희.
그런 그녀를 향해 신유정이 재차 입을 열었다.
“오늘은 김도진이랑 밥 같이 먹자.”
“…도진이?”
서정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따금 같이 밥 먹자고 얘기 꺼내면 싫다고 펄펄 날뛰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문득 그녀가 김도진을 향해 사윗감이니 뭐니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얘가 설마…?’
그때는 가벼이 웃고 넘겼지만, 지금은 조금 위기감이 느껴졌다.
왜냐하면.
‘지금 도진이 얼굴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살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김도진의 외모가 무척이나 뛰어나기에.
그러나 그녀는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괜찮겠지.’
자신과 뜨거운 밤을 보낼 때 김도진이 짓던 표정이 떠올랐다.
닿으면 뜨겁다 못해 녹아내릴 것만 같은 눈빛과 손길.
그것은 애정이 담겨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들이었으니.
“김도진 불러온다?”
“그래, 오랜만에 같이 먹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제 엄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갔다 올게!”
신유정은 그저 싱글벙글하며 현관을 나섰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생각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위장 공략부터 해야겠어.”
남자를 잡으려면 위장부터 사로잡으라는 말이 있다.
물론 본인이 직접 만드는 음식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나중에 배우면 다 되는 건데.”
언제가 됐든 제 엄마에게 배우기만 하면 다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선 그녀는 곧장 옥탑방의 문을 두드렸다.
캉캉캉!
“야, 김도진! 엄마가 밥 같이 먹자고 내려오래!”
그 말과 동시에 문에 귀를 가져다 대는 신유정.
“없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문에 가져간 귀 너머로 약간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기에.
콩콩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곧장 얼굴을 원래 위치로 복귀시켰다.
이윽고 유리에 그의 실루엣이 비쳤다.
철컥!
문이 열리고, 지난 3주간 보지 못했던 김도진의 얼굴이 마침내 나타났다.
그녀는 곧장 열린 문으로 달려들어 그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지난 3주 동안 대체 뭘…!”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누구세요?”
엄마가 김도진을 내쫓고 다른 사람을 새로 들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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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캉캉캉!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그보다 더 요란한 소리가 내 잠을 깨웠다.
“야, 김도진! 엄마가 밥 같이 먹자고 내려오래!”
쟤는 아침부터 기운도 좋아.
“끄으응-”
힘겹게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3주 만에 만나는 건가.
솔직히 3주가 아니라 석 달을 만나지 못했어도 얼버무리기 힘든 몸이지만, 뭐 어쩌겠나.
이제부턴 같은 대학교에 다니게 돼서 더 이상 피하지도 못한다.
적당히 일을 꾸며내서 말하는 수밖에.
철컥!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어젖히자, 신유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 부스스한 모습을 한 나와는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준비를 마친 예쁘장한 모습.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달라붙는 옷에 품이 넓은 점퍼.
직접적으로 살결이 드러나는 노출은 없는데도 야릇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아줌마도 그렇고, 쟤도 그렇고.
몸매 굴곡 하나만큼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런데 얘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
반갑다고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피해 다녔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날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다.
때마침 녀석의 입이 열렸다.
“…누구세요?”
“…….”
순간 맥이 탁 풀린다.
왜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나 했더니, 날 못 알아봤던 거였나.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만큼 내 모습이 파격적으로 변하긴 했으니.
하지만 나는 이런 때일수록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나아가야 한다.
“누구긴. 나야, 도진이.”
최대한 친근하고, 갑자기 왜 그러냐는 식으로.
이런 식으로 우기고 조금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를 알아보게 되어 있다.
대격변 수준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얼굴은 원판 그대로 살만 빠진 거라 자세히 살펴보면 알아볼 만한 구석이 몇 개 남아 있으니까.
“미친….”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녀석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3주 동안 나 피해서 병원이라도 다녔냐?”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되묻자, 녀석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나 몰래 전신 성형이라도 한 거 아니냐고!”
제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나온 가장 현실적인 답안이 성형인 모양이다.
하지만 조금 더 잘 생각해보면 그것도 불가능하긴 마찬가지다.
“그런 거 안 받았는데….”
“그런 게 아니면 지금 모습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아니, 설명하라고 해도 특별하게 한 게 없는데….”
내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자 꼿꼿하게 치솟아 있던 녀석의 눈썹이 살짝 내려왔다.
화를 조금 누그러뜨린 모양.
“후우…, 그럼 지난 3주 동안 뭐 했는지, 나한테 얘기해봐.”
“그냥 더 열심히 운동하고, 마법 연습한 거 말곤….”
그 이상은 없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녀석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계속해서 무언가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모양인데, 슬슬 필살기를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넌 내가 살 빠진 게 싫어?”
최대한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거기에 실망어린 어조를 살짝 담아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애써 새어 나올 뻔한 웃음을 삼킨다.
넌 나를 강하게 추궁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유정아.
내가 실망해서 너한테 등을 돌려버리면 네가 머릿속에 그려둔 그림이 전부 망가지잖아.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나도 좋아, 좋지!”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말을 이어가는 신유정.
나는 쟤가 저럴 때마다 왜 이렇게 귀여운가 몰라.
“근데 이…, 살이라는 게 그런 거거든? 갑자기 확 빼버리면 부작용이 올 수도 있고, 그 뭐야, 남이 좋다고 건네주는 거 함부로 먹었다가 오히려 몸 망치는 경우도 생기고 그러니까!”
횡설수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뭐, 이쯤에서 봐주도록 할까.
“그러니까 넌 나를 걱정한 거였구나.”
“어…? 어, 그래, 그거! 걱정! 걱정한 거지, 새꺄! 너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어?”
“그럼 다행이다. 난 또 네가 날 싫어하는 줄 알고….”
“그럴 리가 있냐! 난 그냥 좀…, 어, 서운한 거지.”
별안간 녀석이 맹수의 눈을 하더니 내게 달려들어 팔을 뻗어온다.
전력을 다한 것 같지도 않고, 지금의 내 신체 능력으로 충분히 피할 수 있을 듯했지만, 그냥 내버려 뒀다.
그러자 뻗어나간 녀석의 팔이 내 목을 휘감아 헤드락을 걸어 제 가슴팍으로 가져간다.
오랜만에 느끼는 뭉클한 감촉.
좋은 선택이었다….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냐?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도와줄 테니까 언제든 말하라고 했어, 안 했어.”
“해, 했지.”
“그런데 3주 동안 연락조차 안 하는 건 뭔데.”
“미안…, 난 그냥.”
“그냥 뭐.”
사람이든, 동물이든.
무언가를 길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두 가지.
당근과 채찍.
3주간 못 만난 건 다른 의미로 녀석에게는 채찍이나 다름없었으니, 이제는 당근을 던져줄 차례다.
“너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그랬지.”
“뭐…, 날?”
“응. 살 다 빼면 네가 칭찬해줄 줄 알고….”
내 목을 조이는 팔의 힘이 서서히 풀린다.
고개를 살짝 들어 녀석의 표정을 확인해 보니, 입꼬리가 물결처럼 씰룩거리고 있다.
“그러니까 나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그랬다?”
“그렇지…? 네가 내 트레이너 선생님이나 마찬가지니까.”
여기서 한 번쯤 제동을 걸어주고.
“뭐…, 그, 그렇지. 음, 트레이너.”
살짝 기분이 가라앉은 듯하지만, 아직까지는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듯 보인다.
“그래, 뭐…, 잘했어, 잘했는데!”
다시 목을 조이는 팔의 힘이 세졌다.
아픈 정도는 아니고 적당하게 압박인 느껴지는 정도?
그만큼 얼굴 한쪽이 가슴에 밀착돼서 오히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