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20)

말이 문제가 아니라, 화자가 문제였던 건가….

“아줌마….”

모든 게 완벽하다.

“왜…?”

푹신한 매트리스, 언제나 비어 있던 옆자리에서 전해지는 포근함, 토닥이는 가슴, 은은하게 들려오는 아줌마의 숨소리까지.

잠들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최적의 환경.

“저 잠들 때까지만, 옆에 있다가 가요.”

“호호…, 우리 도진이가 이렇게 어리광이 많은 애인 줄은 몰랐네.”

나는 가볍게 웃으며 아줌마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잘 때까지 있어 줄 테니까, 마음 놓고 푹 자렴.”

귓전에서 들려오는 간지러운 속삭임을 들으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깊고,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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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탕탕!

요란한 소리가 단잠을 깨웠다.

“끄으응…!”

온몸이 개운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새로 태어난 것처럼 가뿐한 느낌?

탕탕탕탕!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귀를 때린다.

참을성 없고, 배려라곤 요만큼도 없는 걸 보면 일단 아줌마는 아니고.

신유정인가?

“야, 문 열어!”

맞네.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켜 걸어가 잠금장치를 풀…, 어라, 열려 있네.

어젯밤 아줌마가 집으로 돌아간 이후로 쭉 열려 있었겠지.

아날로그식 잠금장치는 이게 문제야.

“도어락으로 바꿔야겠네.”

최소 지문 인식으로 열리는 것 정도로는 바꿔줘야겠다,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몸이 훅 들어온다.

“야, 뭐 하는데 이리 늦게 열어? 딸이라도 쳤냐?”

“아니, 그냥 잤는데….”

나도 모르게 시선을 위아래로 훑는다.

딱 달라붙는 흰색 나시티에 검정색 돌핀팬츠.

집에서나 입을 법한 가벼운 차림새.

옛날에 누군가 말했다.

돌핀팬츠, 레깅스 만든 놈은 노벨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옛날에는 그래봐야 고작 바지인데 오버가 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음.”

받아도 될 것 같다.

녀석이 시선을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비로소 넓어진 시야에 녀석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은색 테두리 상자가 들어온다.

어제 제멋대로 상자를 들고 홀라당 가버린 게 생각났다.

“어제는 왜 갑자기 가버린 거야?”

“어제…?”

내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던 녀석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무언가 나쁜 기억이라도 떠오른 모양.

근데 어제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쁠 만한 기억이 있었나?

으음, 모르겠다.

내 기준으론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행복했던 기억들 뿐이라.

“너…, 후우!”

무언가 말을 하려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저게 바로 그 할많하않이라는 건가.

“됐다, 됐어.”

그러더니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끝내버리곤 내 몸을 옆으로 밀치며 안으로 들어온다.

“어제 일은 묻지 말고, 이거나 까보자.”

책상 위에 상자를 툭 올려놓는 신유정.

조금 의외다.

“아직 안 열어봤네?”

저 녀석 성격이면 옛저녁에 열어봤을 줄 알았는데.

“나 그렇게 경우 없는 년 아니거든?”

그러면서 여전히 남아 있는 상자의 밀봉을 가리킨다.

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밀봉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면 열지 않은 건 확실한 듯한데.

…그래도 어제 네가 한 행동은 경우 없는 짓 맞아, 이년아.

아는 사이니까 그냥 뭔 일이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갔지, 던전 공략을 위해 짜인 파티였으면 지금쯤 구치소에 들어가 있었을 거다.

“암튼, 빨리 와봐.”

“어.”

열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표정으로 내게 오라며 손짓하는 신유정.

저렇게나 궁금해 하면서도 어젯밤 혼자 안 열어본 게 용하다.

“흐흐흥, 뭐가 들어 있을까?”

“글쎄…?”

상자 크기는 대략 15인치 노트북만 한 정도.

이 정도면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금속제 방어구를 제외하면 웬만한 건 다 노려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건 마법서다.

칼라슈는 뛰어난 마법사였으니, 그리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라고 본다.

“자, 그럼 연다?”

눈이 마주친 신유정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눈을 질끈 감으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의 안에는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예상외의 물건 등장에 당황한 신유정이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포션이잖아.”

포션(Potion).

재생력이 뛰어난 몬스터의 피 또는 체액을 이용하여 만드는 상처 회복 물약을 말한다.

힐러가 없을 때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로,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가벼운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는 최하급의 포션도 몇십만 원은 너끈히 나가는 값나가는 물건.

그러고 보니, 칼라슈는 마법사임과 동시에 알케미스트였지.

“응?”

신유정의 시선이 들고 있던 포션에서 상자로 옮겨 간다.

“이건 뭐야.”

상자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은 녀석이 꺼낸 것은 색이 바랜 종이 한 장.

그곳에 언노운 텍스트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으음….”

머리를 긁적이며 종이를 바라보던 신유정이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너 이거 읽을 수 있지 않냐?”

“어…, 잠깐만.”

종이에 은은하게 스며든 마력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짤막한 내용이 한글로 바뀌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내용은 별다른 거 없다.

심술을 부려 미안하다는 내용이 첫 번째.

아,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 나한테 거짓말했었지?

그다음은 부디 일이 원만하게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원만한 해결이라는 건 뭘 얘기하는 거지.

마지막으로 던전을 제작하느라 재화는 모두 팔아서 없고, 유일하게 남은 포션 몇 병 넣어두니 유용하게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남겨져 있다.

나는 불필요한 정보를 제외하고 필요한 정보만 뽑아 신유정에게 전했다.

“던전 공략을 축하한다는데…? 이건 자기가 만든 포션이래. 중급 포션이니 유용하게 쓰일…, 응?”

잠깐만.

중급 포션…?

“너 지금 중급 포션이라고 했어…?”

신유정이 얼빠진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나도 약간 넋이 나간 채로 대답했다.

“어….”

포션은 최하급부터 최상급까지 총 다섯 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 최하급은 몇십 바늘 정도 꿰매야 하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수준.

하급, 중급은 중경상에 달하는 상처를 경상으로 격하 또는 거의 완치시킬 수 있는 수준이고.

상급은 전투로 인해 입을 수 있는 웬만한 상처는 다 치유가 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신체 일부분이 잘려 나가도 3분 안에 주워서 갖다 대고 상급 포션을 뿌리면 붙는다.

물론 딱 붙기까지만 해서, 이후 손상된 신경을 회복하기 위해 제법 오랜 시간 힐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어디 하나 없이 사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최상급은…, 지금까지 딱 한 번 발견됐다.

어디였더라?

미국 길드의 공략대였던 것 같은데.

아무튼, 발견만 되고 사용은 되지 않아서 어느 정도의 효율을 보이는지는 모른다.

결국 현재 시중에 사용되고 있는 포션 중 최고는 상급이고 그 아래가 중급이라는 거다.

“이, 이, 이게 주, 중급 포션.”

신유정이 깊은숨을 내뱉으며 한 손에 덜렁 쥐고 있던 포션을 소중히 끌어안는다.

그리곤 조용히 상자 안에다 돌려놓았다.

보이는가.

중급 포션이 가지는 위용을.

쟤가 왜 저런 행동을 보이냐면, 중급 포션 한 병당 가격이 무려 500만 원이 넘기 때문이다.

“이, 이게 다 몇 병이냐. 하나, 두울, 세엣….”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정신연령이 퇴화했나.

가로랑 세로 곱하면 그만인 걸 왜 저렇게 하나둘씩 세고 있는 거지?

어쨌든 녀석은 결국 하나하나 다 세어봤다.

“여, 열다섯 병.”

어디 보자.

500만 원짜리가 열다섯 병이니까….

“오…, 7,500만 원.”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이를 들은 신유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가슴을 두드린다.

“치, 칠천…, 히끅, 오, 오, 오…, 백…!”

딸꾹질까지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기쁜 모양.

“진정하고 숨 쉬어, 숨.”

나는 녀석의 등을 두드리며 심호흡을 유도했다.

내 호흡을 따라 천천히 숨을 내쉬는 신유정의 신색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이토록 놀라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한다.

솔직히 들인 노력에 비해 보상의 값어치가 매우 큰 편이니까.

핸드잡, 펠라만 당했는데 7,500만 원이 들어온다?

이건 정말…, 대마법사 칼라슈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반쯤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상태로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녀석이 휙 돌아선다.

“어우.”

반사적으로 나간 손을 겨우 멈췄다.

하마터면 가슴 만질 뻔했네.

…그냥 만질 걸 그랬나?

아니다.

그랬다가 또 쟤가 무슨 지랄발광을 했을는지.

“이 복덩이 새끼!”

“억.”

물끄러미 날 쳐다보고 있던 신유정이 기쁨에 겨워 나를 껴안는다.

느껴진다.

지난번에는 빌어먹을 강철 흉갑 탓에 느끼지 못했던 그 감촉이!

아줌마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풍만한 가슴.

얼굴을 들이박으면 퉁 튕겨나올 것만 같은 탱글탱글함이 느껴진다.

아줌마 가슴이 마시멜로 같은 느낌이라면, 신유정 가슴은 탱탱볼 같은 느낌이랄까.

같은 풍만한 가슴이라도 이토록 느낌이 다를 수가 있다니, 그 어마어마한 다양성에 더 많은 가슴을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고작 헌터 지망생이 7,500이라니. 아악, 씨발 진짜!”

이제는 양팔로 내 머리를 끌어안고 방방 뛰어댄다.

이러다 아랫집에서 올라와, 이년아….

아, 얘네 집이지.

그렇게 한참을 발광하듯 날뛰던 녀석의 움직임이 멈췄다.

여전히 내 머리를 끌어안아 가슴에 품은 채로 죽은 듯이 서 있다.

그때.

“훌쩍, 크흥….”

녀석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이 감정의 극명한 변화는.

당황하고 있을 때 녀석이 중얼거린다.

“이거면 이제 등록금 걱정 안 해도 돼…, 크흥!”

“…….”

나야 뭐 특례 입학이라 입학비 면제에, 이후 성적에 따라 등록금도 면제가 된다지만, 신유정은 아니다.

한국대의 한 학기 등록금은 대략 1,000만 원.

1년이면 2,000만 원이고 4년이면 무려 8,000만 원에 달한다.

그뿐인가?

헌터로서 필요한 장비들도 구매해야지, 장비 유지 보수하려면 관리비 필요하지….

헌터 지망생은 돈 먹는 기계다.

물론 헌터가 되기만 하면 그만큼 많이 벌기는 하지만, 그 전까지는 일반 가정집에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액수임은 확실하다.

그나마 아줌마는 낡긴 했지만 서울 변두리 빌라의 주인이고, 아저씨는 지방직 각성자 공무원이라 벌이가 괜찮은 편이다.

그럼에도 이 당돌한 녀석이 가슴 졸일 만큼 돈이 많이 나가고 있었다는 거다.

탱커가 원래 또 이것저것 착용해야 해서 장비 값이 만만찮은 직종이기도 하고.

“괜찮아, 괜찮아.”

나도 모르게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다.

자기 부모 등골 조금 덜 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흘리는 눈물인데 어쩌랴.

지금은 조용히 위로해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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