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 씨도 고생하셨어요.”
그녀가 손을 뻗는다.
“방어구는 이리 주십시오. 한 번 세탁해서 김도진 씨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방어구가 담긴 꾸러미를 손에 쥔 그녀가 우물쭈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저어, 그…,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곳에서의 일은 비밀로….”
“걱정 붙들어 매세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때 비밀은 지킬게요.”
최대한 그녀가 안심할 수 있는 말들을 골라서 내뱉었다.
그때 일로 어색해져서 나에 대한 관리를 그만두면 곤란하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처음에는 그쪽으론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다.
사연이야 어떻든, 그녀는 내게 핸드잡과 펠라를 해주었다.
내 몸은 그에 대한 기억을 또렷하게 각인시켰고.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는 수밖에.
“가시죠.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할게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장 차에 올라탔다.
원래는 버스든, 택시든 타고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정신은 마법 때문에, 육신은 사정 때문에.
양쪽 모두 지쳐버렸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든다.
창문 밖으로 풍경이 빠른 속도로 지나쳐간다.
그러면서도 승차감은 더없이 편안하다.
그녀의 운전 실력이 뛰어난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마법이다.
최근 고가 자동차에는 다양한 마법이 내장되어 있다.
충격 흡수 마법과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항시 일정 온도로 맞춰주는 마법 등.
물론 마법이 발동될 때마다 마정석이 더 빠르게 소모되긴 하지만, 그만큼 편리함만큼은 보장된다.
“졸리시면 눈 좀 붙이셔도 됩니다.”
전방을 주시한 상태에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윤지안.
그녀 말대로 내 몸은 굉장히 노곤노곤한 상태다.
창문에 얼굴만 갖다 박으면 당장이라도 깊게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참았다가 집에서 푹 자려고요.”
“아, 그게 낫겠습니다.”
어설프게 잤다가 잠기운 날리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지.
“도착했습니다.”
어느덧 집 앞이다.
한껏 피로에 찌든 몸을 억지로 움직여 밖으로 나와 열린 창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에게 하고픈 말이 남아 있기 때문.
“그, 던전에서 보니까 뒤에서 이것저것 체크하시던데, 그게 제 평가표였죠?”
“예, 맞습니다. 혹시 걱정되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역시 그랬구나.
내가 기준에 부합했냐,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저라면 그 평가표, 그대로 제출하지 않을 거예요.”
윤지안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그녀가 물었다.
“그래야 지안 씨를 오래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끝으로 창문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마지막으로 인사를 남긴 뒤, 곧장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듣겠지.”
헌터 사회가 안정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협회는 조금씩 썩어가고 있다.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선 본신의 능력보다 인맥이 중요해진 상황.
그런 상황에서 윤지안이 말도 안 되는 결과가 적힌 평가표를 들이밀면 어떻게 될까.
아직 말단에 불과한 윤지안은 곧장 내 관리를 그만두게 될 거다.
그보다 높은, 그리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양반이 내게 손을 내밀겠지.
“그래서야 곤란하지.”
윤지안이라면 괜찮다.
인간관계라는 게 맑고 깨끗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그녀 정도라면 나를 적정한 선에서 이용해 먹어도 상관없다.
근데 다른 사람은 안 된다.
특히 남자는 더더욱.
“어후…!”
아니, 근데 이놈의 계단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계단을 전부 에스컬레이터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은 없나?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계단 전체에 고정되어 있는 땅을 마법으로 움직이게 만들면 되긴 하겠다.
마력을 미친 듯이 잡아먹겠지만.
허튼 생각을 해가며 가까스로 계단을 다 올랐다.
그런데 문 앞에 예상치 못한 사람이 서 있다.
“아줌마…?”
아줌마다.
“아, 도진아….”
내 목소리를 듣고 뒤로 돌아선 아줌마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다.
뭐랄까.
걱정을 한가득 끌어안고 있는 듯한 모양새라고 해야 하나.
아줌마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양팔을 붙잡는다.
“어디 다친 데는 없니? 부러졌다던가, 찌, 찔렸다던가….”
어라, 설마 저 얼굴에 묻어나오는 걱정이 전부 내 거야?
알고 보니 엄청 귀한 얼굴이었네.
누군가에게 이토록 걱정 받는 건 오랜만이라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기분을 조금 더 느끼고 싶지만, 아줌마 얼굴이 워낙 안 좋아 보여서 관뒀다.
“전 괜찮으니까 진정하세요.”
웃으며 말하자, 아줌마의 얼굴이 한층 누그러든다.
“휴우….”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는 아줌마.
“30분 전에 유정이가 옷도 제대로 안 갈아입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들어오길래 걱정했지, 뭐니.”
“아….”
다행히 신유정도 집에 잘 들어가긴 한 모양이네.
“던전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엄밀히 말하면 저는 있었는데, 걔는 없었어요.
가슴에 얹고 있던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뻗어 나오더니, 볼을 감싸쥔다.
아, 이 보들보들한 감촉.
“얼굴이 엄청 피곤해 보이네…. 첫 던전이라 많이 힘들었나 보다.”
“그러게요.”
약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사실 던전 공략 때문보다는 정액을 하도 싸질러서 피곤한 게 더 큰 것 같은데.
아니지, 그 행위 자체가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행위였잖아?
음, 그렇지.
“후후…, 유정이도 그랬었어. 첫 던전 다녀와서 죽을상을 하고서는 어찌나 힘들어 하던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그때를 회상하던 아줌마가 갑자기 내 옆으로 오더니 허리에 팔을 두른다.
오, 뭐야.
“얼른 들어가자. 아줌마가 밥해줄 테니까 먹고 푹 자자.”
이게 연상의 매력…?
홀린 듯 방으로 들어가자, 아줌마가 곧장 나를 화장실로 밀어 넣는다.
“밥 하는 동안 얼른 씻고 나오렴.”
“네.”
고분고분 대답하고 곧장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어 땀과 먼지를 씻어내린다.
따뜻한 물로 씻으니 피로가 조금 녹아내리는 느낌.
화장실 밖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들어와 코를 간질인다.
“이게 삶이지.”
고블린 몇 마리 나오는 던전 공략하고 따뜻한 밥을 얻어먹다니.
고작 서너 달 전만 해도 S급 던전 공략하고 돌아와서 혼자 밥 차려 먹던 손시우의 삶이 이렇게나 바뀔 줄이야.
가슴이 웅장해진다….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어머나, 도진아!”
아줌마가 나를 보더니 얼굴을 붉힌다.
왜 저러시지?
“적어도 속옷은 입고 나와야지…!”
뭐야, 그거 때문이구나.
나는 방구석에 놓인 서랍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에 속옷이랑 옷이 다 있어서요.”
“그, 그럼 아줌마한테 갖다 달라고 얘기를 하지….”
문득 장난기가 솟는다.
“흐음….”
서랍장에서 꺼낸 속옷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나체인 상태 그대로 아줌마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이미 다 봤으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푸근한 엄마 같더니, 지금은 또래 소녀 같다.
아줌마의 매력은 대체 어디까진가…!
“그만 놀리고 빨리 옷이나 입으렴. 그러다 감기 걸려.”
“넵.”
장난은 여기까지.
옷을 다 입었을 즈음엔 자그마한 밥상 위가 갖가지 반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언제 했는지, 뜨거운 김이 솟는 김치찌개도 한 그릇 듬뿍 떠져 있다.
“찌개는 도진이 너 씻을 때 집에서 가져온 거야. 저녁에 먹고 남은 건데, 괜찮지?”
“아유, 그럼요.”
일주일이나 열흘 전도 아니고 고작 한두 시간 전에 먹은 건데, 안 괜찮을 리가 있나.
“잘 먹을게요, 아줌마.”
“그래, 식기 전에 어서 먹어.”
갓 지은 밥을 한 숟갈 크게 뜨자, 아줌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찬 하나를 집어 올려준다.
케첩이 콕 찍힌 작은 햄 한 조각.
옛날 생각 난다.
신혼일 때는 한주희도 이렇게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곤 했었는데.
요리를 못해서 맛은 더럽게 없었지만.
“왜 안 먹니?”
아줌마의 말투에서 걱정이 묻어나온다.
“누가 밥 위에 반찬 올려준 건 두 번째라서요.”
“아….”
아무래도 말을 잘못 꺼낸 것 같다.
나를 바라보는 아줌마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한가득 들어가고 말았다.
저런 표정을 보려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부터 아줌마가 가끔 해줄 테니까, 일단 얼른 먹자. 알았지?”
좋은 선택이었을지도…?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밥의 고소함과 케첩의 달콤새콤함, 햄의 짭짤한 맛까지.
누구나 알 법한 익숙한 맛인데 오늘따라 유독 색다른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자, 이것도.”
밥을 한 숟갈 뜰 때마다 반찬이 올라온다.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어서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고양된다.
그렇게 밥 한 공기를 다 먹고.
“밥 더 줄까?”
“그럼 조금만 더….”
“한 숟가락만 주면 정 없어.”
으레 엄마들이 할 법한 대사로 꾹꾹 눌러 담긴 밥 한 공기를 더 해치우고 나서야 식사가 끝이 났다.
“잘 먹었습니다….”
어우, 너무 먹은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빵빵한 배가 터질 지경이야.
최소 1kg은 더 찐 것 같다.
“자, 밥도 먹었으니까.”
밥상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두고 매트리스 위에 눕는 아줌마.
그러고선 비어 있는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때리며 나를 부른다.
나는 홀린 듯이 걸어가 아줌마의 옆자리에 드러누웠다.
따뜻한 밥해주고, 반찬 올려준 것만으로도 이미 서비스 수준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나 보다.
“괴물이지만 살아있는 생명체의 목숨을 빼앗아서 힘들지…?”
아뇨, 별로….
“솔직히 좀 힘드네요.”
겉과 속이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아줌마가 누워 있는 내 가슴을 토닥이며 속삭인다.
“괜찮아. 도진이는 오늘 세상을 조금 더 안전하게 만든 것뿐이란다.”
첫 던전 실습을 끝마친 이들에게 으레 던지는 말.
과거의 나도 들었던 말이다.
생명체의 숨통을 끊어내는 더러운 기분을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해댈 때, 선배 헌터가 등을 토닥이며 말했었지.
죽인 게 아니라, 지킨 거라고.
그때는 진짜 요만큼도 와닿지 않아서 뻑큐를 날렸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내가 토한 자리에 그대로 뻗어버렸었지.
분명히 그랬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그 말이 푸근하게 들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