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미 날 것 같다.
안 그래도 땅 흔들려서 죽을 맛인데, 돕지는 못할망정 구역질을 돋우고 있어, 얘는.
빠지직!
점점 더 불길한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의 근원지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었다.
“벽에 금이…!”
윤지안의 말대로 지금 나는 소리와 진동은 벽에 금이 가면서 생겨나는 부수적인 것들이었다.
마력을 공급하는 발광석에서 가장 먼 곳인 바닥과 인접한 부분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서서히 올라가 마침내 발광석이 있던 곳까지 다다랐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해체는 조립의 역순이라고 했었지, 아마.
왜 이런 생각을 했냐면 가장 늦게 금이 간 천장이 가장 먼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거든.
“신유정, 방패!”
“알고 있으니까 넌 대가리나 숙여!”
그럴 수는 없지.
떨어지기 시작한 잔해들을 향해 들어 올린 방패 위로 마력을 덧씌운다.
「실드(Shield).」
방패를 중심으로 얇은 마력의 막이 우리를 감싼다.
이걸로는 저 잔해들을 모두 막기는 힘들겠지.
그럼 하나 더.
「아이스 실드(Ice Shield).」
마나로 이루어진 막 위에 얼음으로 이루어진 막을 하나 더 만들어냈다.
떨어지는 잔해들을 요격할 생각이었는지,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윤지안이 은근슬쩍 자세를 푼다.
“야, 방어 마법 쓸 거면 그냥 쓰지, 왜 내 방패를 중심으로 했냐?”
신유정이 실드 때문에 고정된 방패를 그대로 쥔 채 아니꼽다는 듯이 쳐다본다.
이유야 별거 없다.
“그래야 더 튼튼하니까…?”
실드를 두 겹이나 깔기는 했지만 아직 불안한 건 사실이다.
공격 마법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던 걸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방어 마법도 기대 이상의 효율을 보이리라 생각은 하지만, 추측일 뿐이니까.
“너 일부러 나 엿 먹이는 거 아니지?”
“그, 그럴 리가.”
억울해서 말도 잘 안 나오네.
방패를 중심으로 마법을 발현한 탓에 녀석은 꼼짝없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있어야 하지만, 정말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진짜로.
퉁! 투웅! 퉁!
잔해들이 단단하게 언 얼음에 내리꽂힌다.
떨어져 내린 천장 위로 또 다른 천장이 드러난다.
시선을 내려 똑같이 부서져 내리고 있는 벽면 너머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돌의 비 사이로 언뜻 비치는 것은 커다란 석상이었다.
한쪽 손으론 얼굴에 쓴 안경을 치켜세우고, 다른 한쪽 손에는 책을 품은 채 어느 한쪽을 의연하게 쳐다보고 서 있는.
“…고블린?”
석상을 보며 넋이 나가 있을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칼라슈의 시련(眞)에 입장하셨습니다.]
조금 전 홉고블린은 보스가 아니라 중간 보스였던 건가.
가끔 있는 일이다.
중간 보스가 존재하는 던전은 세이프티 룸 또한 두 번 나타난다.
그래서 던전 완전 공략에 스펙이 모자란 파티는 중간 보스만 잡고 보상을 챙긴 뒤 도망치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한다지, 아마.
여기도 그런 던전의 한 갈래인 듯했다.
“야…, 너도 봤어?”
뒤늦게 메시지창을 확인한 신유정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어, 방금.”
“아까 발광석 맞춘 게….”
“아마 여길 찾는 단서였나 봐.”
“하, 하하.”
어색하게 웃는 신유정의 눈에 차오른 것은 희열이었다.
던전이 처음 발생하면 각 길드들은 이에 대한 공략권을 구매하기 위해 큰돈을 지불한다.
그 이유는.
[칼라슈의 시련(眞)에 최초 입장하셨습니다.]
[던전 공략 시, 보상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던전의 보상은 다섯 단계로 나뉜다.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 다이아.
내가 어릴 적에 유명했던 게임의 랭크 게임 등급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느낌.
이는 나무로 이루어진 보상 상자의 테두리를 뜻한다.
갈색의 테두리로 이루어져 있으면 브론즈, 은빛 테두리면 실버 등.
테두리가 어떤 색이냐에 따라 그 안에 담긴 보상 또한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
아까 전 마정석 하나만 달랑 품고 있던 상자는 당연히 브론즈였고.
“그럼 보상이 최소 실버란 거잖아…!”
실버 등급 보상.
이게 브론즈 바로 위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서 마정석 플러스 장비 하나 좋은 거 나오면 수백에서 천은 벌 수 있다.
헌터 장비가 워낙 고가라서 그런 거기는 한데, 우리 같은 헌터 지망생에게 던전 한 번에 수백만 원이면 어마어마한 거지.
마침내 잔해가 모두 떨어져 내렸다.
“야, 빨리 실드 해제해 봐, 빨리!”
잔뜩 흥분한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곧장 실드에 남은 마력을 회수했다.
앞을 가로막는 투명한 막이 사라지고, 자유를 되찾은 녀석이 방패를 등에 메고선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고블린 동상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애는 애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앞부터는 새로운 던전이라고 봐야 하는데,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 줄 알고 멋대로 달려가는지.
옛날 내 공략대원이 저랬으면 곧장 쪼인트 까버렸을 거다.
“시, 신유정 씨!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윤지안이 급하게 불렀지만, 그마저도 잘 안 들리는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아간다.
어쩔 수 없지.
“따라가죠. 혼자 두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그녀는 고민 끝에 나와 함께 신유정의 뒤를 따랐다.
무너진 잔해로 이루어진 경계선을 벗어나자, 이윽고 보이는 것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공동이었다.
“야아! 여기 빨리 와봐!”
어느덧 고블린 석상 앞에 도착한 신유정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우리를 부른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녀석을 보며 나와 윤지안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엄연히 새로운 던전의 영역.
무엇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라 난이도도, 나오는 몬스터도, 함정의 구조도 알지 못하는 와중에 저런 천진함이라니.
“아, 빨리이!”
하도 재촉을 해대는 통에 터덜터덜 걸어간 고블린 석상 앞.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닌데.”
안경에 책을 펼치고 있는 고블린이라.
앞서 말했듯, 고블린은 개체 안에 종류가 다양하다.
그중에는 샤먼도 있고, 주술사도 있기는 한데.
저렇게 학자처럼 생긴 고블린은 없다.
“이거 봐봐, 이거.”
그 짧은 기다림마저 참지 못한 신유정이 내 어깨를 붙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거대한 석상의 발아래, 알 수 없는 글씨로 쓰인 석판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이건…, 언노운 텍스트군요.”
뒤늦게 도착한 윤지안이 석판을 보며 말했다.
언노운 텍스트(UnKnown Text).
던전에서 이따금 발견되는 석판이나 벽에 쓰인 언어를 총칭하는 말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통해 던전을 지구와 연결된 이세계의 일부 지역임을 설파하고 있다.
언어가 있다는 건 문명이 존재했다는 뜻이고, 이는 지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언어이니 이세계가 분명하다면서 말이다.
뭐…,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헌터들 입장에선 여기가 이세계든, 지구든 별 상관없다.
지금 내 관심을 끌어내는 것은 석판에 파인 글씨를 따라 줄기차게 흐르는 마력들이다.
“흐음….”
이건 또 뭘까 싶은 호기심에 석판 위에 손을 가져갔더니,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가장 첫 번째 줄과 함께 흐르던 마력이 내 손을 통해 빨려들었다.
그리고 그 마력은 내게 힘이 아닌, 지식을 전달해주었다.
“반갑다, 자격을 증명한 자여. 나는 이 던전을 만든 고블린 알케미스트, 칼라슈다…?”
마력이 머릿속에서 간질거리는 대로 읊었더니 두 사람의 고개가 내 쪽으로 휙 돌려졌다.
“너, 방금 뭐라고…?”
“설마 지금 이 텍스트를 읽으신 겁니까…?”
“아니, 읽은 건 아닌데….”
나는 다시 한번 석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나는 그 어떤 글씨도 읽을 수가 없다.
다만 마력이 전달한 뜻을 그대로 입밖으로 냈을 뿐.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잔뜩 흥분한 그들을 진정시킨 뒤 다시 석판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두 번째 줄.
“그대가 이 석판을 보고 있다는 건 내가 만든 장치를 작은 단서를 통해 훌륭히 풀어냈다는 뜻일 테지.”
미안한데 단서 같은 건 못 찾았다.
그냥 사기적인 눈의 힘을 빌려서 강제로 열어젖혔을 뿐.
곧장 세 번째 줄에 손을 가져갔다.
“이 던전에는 내가 평생을 일구어 만든 보물이 잠들어 있다. 이것은 오직 내 장치를 파훼하여 자격을 증명한 그대만이 가질 기회를 얻을 수 있음이니….”
그다음 네 번째 줄.
“자격이 없는 자는 그대와 함께할 수 없음이라…?”
이야기를 읽은 바로 그때였다.
덜컥! 덜컥!
고블린의 석상을 기준으로 좌우에 나 있는 문이 열렸다.
“저 문이 갑자기 왜 열린 거야?”
“글쎄…?”
신유정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요상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일단 다음 줄을 읽어볼까.
“자격이 없는 이는 열린 문으로 들어가라…,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이 던전에서 영원히 고립되리라…, 는데?”
방법이야 어쨌든 이 던전의 비밀을 풀어낸 사람은 바로 나.
결국 내가 자격을 증명해낸 자라는 뜻이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격이 없는 이가 된다.
끼이익-
아주 느린 속도로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생각할 시간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걸 보니 하나는 확실히 알겠네.
칼라슈란 놈은 지독하게도 시간에 인색한 놈이라는 거.
“일단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윤지안이 먼저 오른쪽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유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문이 아닌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야. 지금 돌아가는 거 보니까 너한테 우리 운명이 걸려 있는 것 같다.”
“…그러게.”
아, 어깨가 무거워지는 상황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신유정이 주먹을 들어 내 가슴팍을 가볍게 후려쳤다.
퍽!
“윽….”
분명 가볍게인데 대체 왜 아픈 거냐고.
쟨 그냥 주먹 자체가 단단하다.
타고난 하드 펀처라는 건 저년을 두고 하는 말인 게 틀림없다.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는 순간, 녀석의 체취가 훅 하고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쪽!
순식간에 다가온 녀석이 내 입술에 입을 맞춘 것.
찰나에 불과했지만, 입술에 느낌이 진하게 남아 있다.
“이, 이건 아까 던전 공략한 보상.”
충격적인 행동을 한 녀석이 얼굴을 붉히며 등을 돌렸다.
“이번 던전도 무사히 공략하면…, 이것보다 더 좋은 보상 나간다.”
그 말을 남기고 반쯤 닫힌 왼쪽 문 안으로 쏙 들어간다.
“…….”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키스 다음이 뭐지?
가슴 만지기, 빨기, 아니면 펠라…, 그것도 아니면, 설마 파이즈리?
“아, 놔.”
떠오르는 게 너무 많다.
신유정 이 요망한 년.
“뭔지 알려주고 가야지….”
이 던전 못 깨면 내게 번뇌를 남기고 간 네 탓인 줄 알아라.
다음화 보기
이럴 때가 아니지.
짝짝!
가볍게 뺨을 두드려 머릿속에 찬 번뇌를 지워낸다.
석판에 남은 마력은 단 한 줄기.
곧장 손을 가져가 보았다.
마력이 팔을 타고 흐르며 마지막 문구가 뇌리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곧 길이 열릴 것이다. 그 길의 끝에 닿아라. 그리하면 새로운 길이 열릴지니.”
석판에 있는 마력을 모조리 빨아들였을 때, 손에 대고 있던 석판이 난데없이 뒤로 밀려났다.
쿠구구궁
석판이 있던 자리에 구멍이 나 있다.
빨리 내려오라고 말하는 듯한 계단도 함께.
“이 길로 들어가서 끝까지 가라는 거지….”
아, 이거 살짝 긴장되네.
이렇게까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던전 공략에 나서는 게 얼마 만인지.
기분 좋게 심장이 뛴다.
적당히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