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20)

“으응, 그렇지.”

“근데 저 여자는 온전히 너만을 걱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알아들어?”

“…알겠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최대한 어리숙한 표정으로 녀석의 말을 따라주었다.

그러자 녀석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진다.

“앞으로 고민 같은 거 있으면 나한테 다 얘기해.”

“진짜 다 얘기해도 돼…?”

너 보면 자꾸 자지가 발기 된다고 말하면 뭘 해줄지 궁금한데.

“그래, 뭐든지. 이 누나가 다 해결해줄 테니까. 알았어?”

“응.”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지금 보인 일련의 행동을 통해 비로소 확실해졌다.

신유정은 나를 자기 없인 못 사는 바보로 만들 생각이다.

그것이 나쁘게 보이냐고? 아니, 전혀.

오히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뭐.

녀석에게 있어 내가 가진 가장 큰 가치는 재능 있는 마법사라는 것.

바꿔 말하면 본인이 탱킹을 하고 있을 때, 몬스터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을 수 있는 뛰어난 딜러를 원한다는 거 아니겠나.

나는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파고들 생각이다.

나라는 딜러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으로 개조시키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나 이제 다 쉬었어.”

“그래? 그럼 보스 잡고 돌아가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신유정이 보스 룸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서서 내게 물었다.

“그럼 연다?”

“응.”

그녀가 문의 중앙에다 손을 얹었다.

그러자 문에 이리저리 나 있던 줄에 푸른색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 빛줄기가 문 전체에 퍼지면 비로소 문이 열린다.

그때였다.

【…를 증명하라.】

조금 전에 들려왔던 기분 나쁜 소리가 재차 들려온 것은.

여전히 작지만, 조금 전보다는 커진 목소리.

무엇을 증명하라는 것 같은데, 대체 그 무엇에 대한 부분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지금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크게 들렸다는 건 그 근원에 더 다가갔다는 뜻.

저 육중한 문이 열리고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려오면 그때는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겠지.

푸른 빛줄기가 마침내 문 전체에 퍼졌다.

크그그긍….

육중한 문이 돌 부스러기를 마구 흩날리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준비해.”

수십 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법한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중앙에 낡고 허름한 투구와 갑옷, 이가 나간 검과 닳아빠진 방패를 쥐고 있는 녹색 피부에 언뜻 붉은색이 섞여 있는 고블린이 이쪽을 강하게 노려보며 서 있다.

홉고블린.

나와 엇비슷한 키에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진 녀석.

개체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 고블린에 비해 최소 열 배 이상 강하다고 알려진 홉고블린이 이곳 보스 룸의 주인이다.

옆에서 신유정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한다.

“지금처럼만 해.”

“응.”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키에에에에!”

녀석이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괴음을 내지르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아앗!”

이를 확인한 신유정 또한 기다렸다는 듯, 기합성을 토해내며 달려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힘찬 움직임.

카앙! 챙!

고블린의 방패는 신유정의 검을.

신유정의 방패는 고블린의 검을.

서로의 검과 방패가 맞물린다.

“키이이…!”

홉고블린은 이를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데에 반해, 신유정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녀석을 막아서고 있다.

사실 신유정 정도 실력이면 혼자서 홉고블린 셋 정도는 가볍게 해치울 수 있을 거다.

그럼에도 수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이곳이 내 실전을 위한 자리이기 때문.

휴식 덕분에 차오른 마력을 이용하여 주변의 마력을 끌어당겼다.

마력의 흐름이 내 주변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마법사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척도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다중 캐스팅이다.

최소 두 개, 많게는 열 개까지.

여러 개의 마법진을 동시에 그려 여러 마법을 단 한 호흡에 사용하는 방식을 말한다.

각각 획수가 다르고 긋는 방향도 다른 마법진을 동시에 그린다는 건 왼손으로 세모를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네모를 그리는 것과 다름없다.

그만큼 어렵고, 난해하다는 뜻.

박철수 원장에게 다중 캐스팅에 대해 이야기 들었을 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마법진을 그리지 않고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나는 다중 캐스팅이 쉬울까, 어려울까.

결론부터 말하면 쉽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더욱 직관적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나는 그저 마법에 사용될 마력을 각각 나누고 원하는 색을 입힌 뒤, 마력의 배열만 달리 가져가면 되는 일이었기에.

주변에 모여 흐르는 마력을 양손을 기준으로 반씩 나눈다.

그리고 각각 다른 색을 입힌다.

왼손에는 신유정의 머리통만 한 크기의 붉은 구체가, 오른손에는 비슷한 크기의 반투명한 구체가 만들어졌다.

기초를 넘어 초급에 해당하는 볼 시리즈 마법들.

「파이어 볼(Fire Ball) & 에어 볼(Air Ball).」

파이어 볼은 사실 파이어 미사일과 비교했을 때 파괴력을 제외하면 크게 달라지는 게 없다.

더 큰 만큼 날아가면 좀 더 큰 폭발을 일으키는 것뿐.

에어 볼은 말 그대로 공기를 압축시켜 만들어낸 구체.

원하는 지점에 닿는 순간 압축된 공기를 터뜨려 충격을 발산한다.

이 두 개를 배웠을 때, 좀 더 강력한 사용 방식이 떠올랐다.

에어 볼 안에 파이어 볼을 집어넣어서 함께 던지면 훨씬 강력하지 않을까, 하고.

원하는 지점에 닿는 순간 에어 볼이 터져서 공기가 비산하고, 그 길을 따라 파이어 볼의 불길이 치솟으면?

양손을 서로 가까이 가져가 파이어 볼과 에어 볼을 하나로 합친다.

물론 그냥 들이민다고 합쳐지는 건 아니고, 마력을 움직여 터지기 전까지 양쪽에 어느 간섭도 하지 않게 만들게끔 조정했다.

투명한 유리구슬 안에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듯한 모양새의 마법이 만들어졌다.

이름은 뭐가 좋을까.

“음, 파이어…, 봄?”

불꽃이 펑 하고 시원하게 터질 테니, 이런 직관적인 이름도 나쁘지 않겠지.

파이어 봄을 홉고블린 녀석에게 겨냥한 뒤, 신유정을 향해 소리쳤다.

“뒤로 물러나!”

그와 동시에 녀석을 믿고 좀 전에 만들어낸 시동어를 입력해 마법을 쏘아냈다.

「파이어 봄(Fire Bomb).」

신유정이 빠르게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쏘아낸 마법이 어리둥절해 하는 홉고블린의 몸통에 다다랐다.

겉을 둘러싸고 있는 에어 볼이 터지면서 뭉쳐 있던 공기가 터져 나온다.

그 다음은 파이어 볼의 차례.

타오르는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공기를 잡아먹으며 몸집을 부풀렸다.

“어.”

문제가 생겼다.

불꽃이 부푸는 크기가 내 예상보다 훨씬 큰데…?

이대로 두면 신유정이 있는 자리까지 불꽃이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아…!”

이를 눈치챈 신유정도 화들짝 놀라며 방패를 들어 올린다.

저 바보가!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데 몸통밖에 못 가리는 방패로 어떻게 전부 막겠다고!

“탱커들은 저게 문제라니까.”

자기 몸 튼튼하다고 피하기보다 막기를 선택했다가 더 크게 다치는 거.

내가 나중에 풋워크부터 하나하나 다 가르쳐야지.

곧장 마력을 끌어모아 신유정의 주변을 촘촘하게 가로막는다.

「실드(Shield).」

시동어를 입력하자, 그녀의 주변으로 희뿌연 보호막이 생성됐다.

그리고 그 순간.

뻐어엉-!

삐이이-

굉음과 함께 마침내 불꽃이 폭발을 일으켰다.

귀를 울리는 기분 나쁜 이명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훅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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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마법의 수준을 뛰어넘은 불길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그라들기 시작한 불길 속,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터져나간 홉고블린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를 빨아들인 뒤, 불길을 향해 달려들었다.

“신유정!”

명백히 내 실수다.

마법이란 것을 너무 우습게 본 건지, 아니면 내 마법이 특이한 건지.

예상치 못한 위력에 그녀마저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황급히 실드를 걸어두긴 했지만 저 정도 위력이면 실드 속에서도 온전히 무사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솟구친 불길에 잠시 가려졌던 신유정의 모습이 드러났다.

걸치고 있는 은빛 갑주에 검댕이 여기저기 묻기는 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

“헉.”

시발.

신유정의 머리가 좀 탔다.

아예 상한 건 아니고 끝부분만이긴 한데….

저년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한 소리 하고도 남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저기, 그…, 괜찮아?”

일단 말부터 걸어보자.

최대한 넙죽 엎드리면 뭐, 자기가 어쩔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불길이 치솟은 방향을 향해 방패를 치켜든 채 굳어 있던 신유정이 내 목소리에 반응한 듯,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야.”

넋이 반쯤 나간 듯한 목소리.

“이거, 네가 쏜 거…, 맞지?”

“어…, 미안.”

“그렇지. 쏠 사람이 너밖에 없지….”

뭐지.

분위기가 이상하다.

노발대발하며 달려들 줄 알았는데…, 왜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는 거지?

“흐, 흐흐.”

이젠 웃는다.

“유정아, 괜찮…?”

왜 저러나 싶어 한 걸음 더 다가갔을 때 일은 벌어졌다.

흐릿하던 녀석의 동공에 급속도로 빛이 차올랐다.

“이 새끼!”

격한 음성을 토해낸 신유정이 팔을 뻗어 내 머리를 붙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

아차 하는 사이 당겨진 내 얼굴이 향한 곳은 우람하게 솟은 두 산봉우리, 신유정의 가슴이었다.

이게 웬 떡…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얼굴로 스며드는 차갑고 딱딱한 흉갑의 감촉.

빌어먹을 강철 흉갑이 나와 가슴의 도킹을 방해했다.

아무래도 신유정은 화가 난 게 아니라, 더없이 기쁜 듯했다.

“으흐흐흥! 좋아, 아주 잘했어!”

헤픈 웃음을 마구 흘리며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 걸 보면 말이다.

조금 전 공격이 녀석의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아, 근데 이거 왜 이렇게 좋지.

개 같은 흉갑은 마음에 안 드는데, 녀석이 내 머리를 꼭 끌어안고 마구 쓰다듬는 손길에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

이러면 안 되는데….

한창 기분 좋은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갑자기 녀석의 손이 멈췄다.

“흐흥흥.”

불길한 웃음소리.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음흉한 시선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신유정과 눈을 마주쳤다.

“야, 좋냐?”

“…아, 아니?”

아닌데? 아닌데?

…빌어먹을.

적당히 좋아했어야 했는데 이 몸이 제멋대로 녹아내렸다.

“우리 애기, 누나 품이 좋아쪄요? 우쭈쭈.”

강아지나 아기한테 하듯, 우쭈쭈 소리를 내며 내 턱을 손가락으로 긁어댄다.

굴욕적인데 기분은 좋은,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때 신유정이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다음엔 갑옷 벗고 해줄까? 응?”

“…진짜?”

“흐흥, 진짜겠냐. 비융신.”

“아.”

순간 화가 치솟았다.

감히 남자의 본능을 은근슬쩍 건드려놓곤 장난이라고 뒤로 빼다니!

“뭐, 네가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해줄 수도?”

“…열심히 할게.”

그래, 열심히 하자.

자존심과 가슴.

나는 후자를 택했다.

남자란 원래 가슴이 시키는 존재니까.

“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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