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20)

잔잔한 말투에서 은은한 분노가 느껴진다.

본인한테는 전혀 하지 않는 걸 윤지안한테는 하고 있다는 것에 살짝 열이 받은 것 같다.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은 부채질밖에 없겠지.

“아무래도 업계 선배시니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

내 대답을 듣고선 말없이 생각에 잠기는 신유정.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두워진 표정만 봐선 지금 같은 수준으로는 안 되겠다, 뭐 그런 생각일 것 같은데.

신유정은 고민하고, 나는 얘 표정을 보면서 궁금해하고 있을 때, 윤지안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첫 수속이라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희가 해야 하는 걸 대신해주신 건데, 오히려 고맙죠.”

귀찮은 일 대신해주고 우린 노가리나 까고 있었는데 미안할 게 있을 리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윤지안을 내 직속 비서로 사용해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

그녀에게 진한 애사심이 있지 않고서야, 내가 협회보다 나은 동아줄이라는 걸 증명만 해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럼 가시죠.”

그녀가 앞장서서 우리 두 사람을 이끌었다.

튼튼하게 지어진 석조 건물.

그 앞을 지키고 선 두 경비원을 통과해 들어가면 널따란 공간이 나온다.

이 건물은 누군가 상주하기 위해서 지어진 게 아니다.

눈앞에 있는 허공의 거대한 균열을 시민들로부터 숨기기 위한 역할일 뿐.

허공을 양손으로 틀어쥐고 양옆으로 힘을 주어 찢어버린 듯한 모양새.

이를 한국에서는 균열이라고 부른다.

외국 애들은 저걸 뭐라고 불렀었지?

아, 생각났다.

균열을 영어로 하면 크랙인데, 걔네는 그렇게 안 부르고 게이트라고 부른다.

저길 넘어가면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니까, 이 균열이 일종의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던가.

어쨌든.

이 균열에서는 끊임없이 마력이 새어 나온다.

그 양은 일반적으로 공기 중에 흐르는 마력량의 평균보다 높아 일반인들에게 자칫 위해를 가할 수도 있기에 이와 같은 식으로 마력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보호한다.

부차적인 이유로는 자신들의 인가 없이 던전에 몰래 숨어드는 쥐새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사방이 뻥 뚫려 있는 것보다, 입구 하나만 지키는 게 훨씬 나으니까.

“그럼 출발할까요?”

탁!

내가 먼저 균열에 손을 대려 하자, 윤지안이 급하게 내 손을 가로막았다.

“김도진 씨.”

“예.”

내가 대답하자, 그녀가 다른 한쪽 손으로 정장 안주머니에서 금박지에 싸인 동그란 알약을 꺼내 들었다.

“우황청심환, 안 필요하십니까?”

“괜찮은데요.”

내가 짬밥이 몇 년인데 이런 걸로 긴장을 할까.

아, 얘네는 모르겠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요?”

“제가 이번 던전에 동행하는 이유는 두 가집니다.”

윤지안이 제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

“하나는 보호, 다른 하나는 평가입니다.”

“보호는 알겠는데, 평가라고요?”

갑자기 웬 평가?

내 재능이 실전에서는 어떻게 발휘될지, 보고 싶다는 건가.

“예, 김도진 씨가 옆에 계신 신유정 양과 함께 던전을 얼마나 잘 헤쳐 나가시는가를 평가할 예정입니다.”

“그런가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재능이 넘치는데 실전에서 죽 쑤는 녀석들도 생각보다 많거든.

그녀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만약 김도진 씨가 큰 문제 없이 던전을 공략하신다면, 지금 입고 계신 장비 일체를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라.

예상치 못한 보상이 던져졌다.

“지원한다는 건…, 이 장비들을 얘한테 다 준다는 거예요?”

옆에 있던 신유정도 나만큼이나 놀랐는지, 내가 할 질문을 자기가 던진다.

그러자 윤지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기한 대여…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지.

구태여 말하지 않았지만 헌터 협회 이놈들, 엄청 짜다.

정확히 말하면 협회가 아니라, 협회장.

애국심이 뛰어난 건지, 아니면 돈 자체가 아까운 건지는 모르겠는데.

자기 돈도 아니면서 엄청나게 아껴댄다.

그 양반의 짠돌이 기질 때문에 언성 높여가며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 내가.

“그 정도면 충분하죠. 기한이 없다는 건 원하는 만큼 쓰고 줘도 된다는 거잖아요?”

“예, 맞습니다. 나중에 김도진 씨가 성장하셔서 더 상위 장비를 쓰게 되어 더 이상 필요없다고 판단이 들 때 돌려주시면 됩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속셈이 숨어 있다.

아무래도 무기한 대여면 어쨌든 돌려주긴 해야 하니까, 내 것처럼 험하게 쓰지는 못 하잖나.

더군다나 언제가 됐든 돌려받으면 좋고, 만약 망가지면 내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생기니까.

직접적으로 보상하라고 말하진 않겠지만, 빚을 지워두는 거나 다름없게 되는 셈이다.

영악한 스크루지 영감 같으니.

에이, 생각해봤자 짜증만 난다.

최대한 빨리 쓰고, 깨끗하게 돌려주면 그만이지.

“그럼 이제 진짜 출발할까요?”

“네, 그러시죠.”

그녀는 우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생명이 위급하기 전까진 끼어들지 않는다고 했으니, 저 거리를 유지하며 우리를 따라오겠지.

“야.”

균열에 손을 가져가려 할 때, 옆에 있던 신유정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른다.

“응?”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건넨다.

“그, 뭐냐. 저 여자가 말하는 펴, 평가 말인데.”

뭐지.

무슨 말을 하려고 말까지 더듬는 걸까.

“그거 통과하면…, 나도 상 줄게.”

“…상?”

“그래, 상.”

흐흐.

억지로 웃음을 참아내며 넌지시 물었다.

“무슨 상인지 물어봐도 돼…?”

“그….”

대답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이는 신유정.

“아,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조, 좋은 거!”

그러면서 갑자기 내 어깨를 후려쳤다.

퍼억!

“억!”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년이 건틀릿 낀 손으로 사람을 쳐?

짜증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려 하자, 녀석이 나보다 먼저 균열에 손을 가져간다.

서서히 몸이 사라져가는 신유정의 얼굴이 붉다.

“이건 백퍼다.”

분명히 자기 몸을 내건 보상이 분명하다고, 내 머리와 자지가 동시에 외치고 있다.

아, 고블린 새끼들 진짜 다 뒤졌다.

나는 그대로 균열에 손을 올려 신유정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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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어디론가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

눈을 뜨니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어둠이 내려앉은 캄캄한 동굴.

[칼라슈의 시련에 입장하셨습니다.]

떠오른 메시지가 내가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음을 실감케 한다.

“칫, 생각보다 더 어둡잖아.”

앞서 입장한 신유정이 혀를 차며 투덜거린다.

확실히 어둡다.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불의의 일격을 당할 수도 있을 정도.

전위에게는 여러모로 좋지 않은 환경이다.

“이걸 쓰십시오.”

맨 마지막에 입장한 윤지안이 우릴 향해 팔찌 하나를 건네주었다.

“라이트 마법이 내장된 팔찌입니다. 세 시간 정도는 충분할 겁니다.”

“오, 감사….”

신유정이 웃으며 그걸 건네받으려 할 때, 손을 뻗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녀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째려본다.

“야, 뭐 하냐.”

“저런 거 없어도 충분해.”

곧장 주변의 마력을 끌어당겨 손바닥만 한 크기의 구체를 그녀의 눈앞에 만들어냈다.

여기에 시동어를 입력하면.

“라이트(Light).”

녀석의 눈앞에 둥실둥실 떠오른 상태로 은은한 빛을 내뿜던 구체에 번쩍, 하고 빛이 터져 나왔다.

“악!”

아, 깜빡했다.

라이트가 상상 이상으로 효율 좋은 마법이라 조금만 많이 넣어도 빛이 강해진다는 걸.

“야, 너 이씨…!”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곧장 손을 뻗었다.

“미, 미안! 고의는 절대 아니었어.”

미안하다고 싹싹 빌자 녀석의 걸음이 멈춰 선다.

“…조심해. 다음은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알았어.”

윤지안이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앞에 두고 나한테 마구잡이로 화를 내는 게 껄끄러웠는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가 준다.

“저, 그래도 팔찌를 쓰시는 게 낫지 않을지….”

뒤에 있던 윤지안이 넌지시 말을 건네왔다.

나는 고개를 저어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던전에 들어온 이상 지안 씨는 철저히 방관하셔야죠.”

“김도진 씨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돌아서는 윤지안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다.

자신의 도움을 거절하는 내 마인드가 마음에 들어서겠지.

나는 라이트 구체의 위치를 신유정의 머리 위쪽으로 조정했다.

“이러면 잘 보이지?”

“어…, 그러네.”

마법사가 각광받는 이유가 이래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마법사가 없다면 윤지안이 건넨 것처럼 라이트 마법이 내장된 팔찌를 이용하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횃불을 만들어야 하는데, 둘 다 단점이 있다.

전자는 팔찌 구매 비용과 더불어 이를 이용할 때마다 작은 마석이 소모된다는 거고, 후자는 횃불을 손에 쥐어야 하니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단점이 있다.

근데 마법사가 있으면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된다.

말했듯 라이트 마법은 효율이 매우 뛰어난 마법이라 던전 공략 내내 띄워둬도 아무런 무리도 끼치지 않거든.

“야, 김도진.”

신유정이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킨다.

“앞은 내가 든든하게 막아줄 테니까, 네가 원하는 마법 다 써봐. 알았냐?”

딴에는 자기 믿고 열심히 해보라는 식인데, 눈빛만 보면 그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내가 얼마나 마법을 잘 쓰는지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은 것 같다.

앞뒤로 나를 평가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구먼.

“알았어, 고마워.”

“고맙긴, 우리 사이에.”

이게 은근슬쩍 우리 사이라는 말을 쓰네.

우리 사이가 뭔데.

3년간 빵셔틀과 일진이었다가 사회에서까지 엮이게 된 최악의 사이 아닌가.

“그럼 앞장설 테니까, 적당히 거리 유지해서 따라와.”

“응.”

신유정은 가볍게 쥐고 있던 방패를 좌수로 단단히 틀어쥐고, 우수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숏소드다.

몸만 봐도 제법일 줄은 알았는데, 검을 보니 녀석에 대한 평가를 높여야겠단 생각이 든다.

전위이자, 탱커인 신유정은 전투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몬스터와 몸을 맞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긴 장검보단 숏소드가 훨씬 더 편하다.

빠르게 찌르고, 벰으로써 상대의 정신을 쏙 빼놓을 수 있을 테니.

물론 대형 몬스터를 만나면 무기를 바꿔야겠지만, 고블린처럼 몸집이 작은 녀석을 상대할 때는 저만한 게 없지.

키이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동굴 너머로 조악한 울음이 들려온다.

얼핏 어린아이 목소리 같으면서도 가래가 들끓는 듯한 소음.

“앞에 있어.”

신유정의 머리 위에 고정시켜둔 광원에서 나오는 빛의 세기와 방향을 앞으로 조정했다.

구불구불 이어진 동굴의 길과 녀석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90cm에서 130cm 사이의 작은 키와 진녹색 피부.

맨들맨들한 머리에 길쭉하게 솟은 귀, 아래로 축 늘어난 매부리코에 삐죽삐죽 솟은 이빨.

허리에 허름한 가죽 하나 둘러치고 있는 고블린 한 마리가 난데없이 쏟아진 빛줄기에 놀라 눈을 가린 채 허둥대고 있다.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당겨 구체 하나를 만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붉은색 구체.

“파이어 미사일(Fire Missile).”

처음에는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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