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20)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뻔뻔하게 대응하는 게 답이다.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최대한 무덤덤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러자 내 질문에 정신을 차린 박철수 원장이 숨을 몰아쉰다.

여태까지 숨도 참고 있었나.

“…이따금 수정구에서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이 동시에 발현되는 경우가 있네.”

그 말에 조금 안도했다.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이 나타나는 게 아예 없는 현상은 아닌 모양이다.

“수정구에 나타난 속성들끼리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높은 적성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 말일세.”

박철수 원장의 곧은 눈이 내게로 향한다.

“말인즉…, 자네는 모든 속성을 주속성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탁월한 적성을 지니고 태어났다, 라고 볼 수 있겠지.”

그 말을 내뱉는 원장의 얼굴이 더없이 차분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에 대한 욕심으로 그득했던 눈도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깨끗하다.

“자네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군.”

나를 수제자로 들이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듯했다.

그때, 뒤쪽에 있던 윤지안이 스마트폰을 빠르게 터치하며 밖으로 나간다.

아마 이 모든 상황을 협회에 보고하기 위해서겠지.

아아, 들린다.

내 주가가 한없이 솟구치는 소리가.

뿌듯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강단 아래로 내려온다.

나를 비롯한 네 사람의 주속성 확인이 모두 끝난 뒤, 박철수 원장은 엄한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말했다.

“마법이란 지닌 속성으로 끝나는 직업군이 아닐세. 하나의 속성을 상급 마법까지 익힌 자와 다섯 가지 속성을 두루 익혔으나 초급 마법밖에 익히지 못한 자, 자네들이라면 어떤 마법사와 던전을 공략하고 싶겠나?”

누군가 나서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뻔하다.

당연히 상급 마법까지 익힌 마법사지.

한없이 불리한 전황마저도 단숨에 뒤바꿀 수 있는 게 상급 마법사다.

상급 마법 중에는 제대로 적중하기만 하면 마법이 발현된 곳으로부터 수십 미터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마법들이 존재하니까.

그에 반해 기초 마법은 소규모 단위 마법에 불과하다.

아무리 다양한 속성을 다룰 수 있다고 한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단 얘기.

“그러니 주속성이 많다고 자만하지 말고, 적성이 떨어진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얘길세.”

그의 말은 우리 네 사람이 자칫 지니게 될 부정적인 감정들을 미리 덜어내는 역할을 했다.

자만심, 시기, 질투와 같은 감정들을 말이다.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네들은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시작한 축복받은 이들이라는 것을 명심하게. 또 그만큼 높은 위치에까지 올라갈 수 있음을.”

“예.”

“알겠슴다!”

“네에.”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그의 말에 호응하듯 답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축 늘어져 있던 녀석들의 어깨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보인다.

박철수 원장이 새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고작 말 몇 마디로 축 늘어진 학생들의 기운을 되살릴 줄이야.

“자아, 그럼 오늘은 가장 기초적인 마법부터 배워보도록 하지. 속성을 발현하는 술식과 이에 대한 화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마법사로서의 재능은 하늘에 다다르지 못했지만, 교육자로서의 재능만큼은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보였다.

* * *

“어으으…, 피곤해.”

푹 꺼진 매트릭스에 몸을 던졌다.

체력은 물론이고, 마력까지 텅텅 비었다.

새벽에 아침 운동, 오전부터 오후까지 마법을 배우고, 헬스까지.

각성자의 회복력이 좋은 건 자체적인 회복력이 뛰어난 덕도 있지만, 일반인에 비해 체내에 더 높은 마력 수치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데 요즘은 마력까지 바닥이 보일 때까지 사용하고 있으니, 양쪽 모두를 회복해야 하는 만큼 힘겹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만한 보람이 있으니까.”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상태창]

이름: 김도진

성별: 남

나이: 20세

키/몸무게: 164CM / 90.8KG

[근력: 10] [체력: 11] [민첩: 6] [마력: 12]

특성:

상호불가침[2022.06.09]~[2025.12.31]

발설금지[2022.06.09]~[2025.12.31]

“캬아! 빛이 난다, 빛이나.”

사실 그딴 거 안 난다.

남이 보면 여전히 한숨밖에 나오지 않을 능력치.

이걸 보며 내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건 이 몸뚱어리의 원래 수치가 어떠했는지, 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몸뚱어리를 차지하게 된 지도 어느덧 두 달째다.

두 달 동안 키를 4cm 늘렸고, 몸무게는 거의 20kg 이상을 감량했다.

근력, 체력, 민첩, 마력 모두 기존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한 마력이 모일 때마다 신체를 재구축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

전신 성장판, 심장과 폐, 자지까지.

몸을 가꾸는 데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것들의 성장력을 크게 돋웠고, 지금은 근성장을 위해 마력이 모일 때마다 근육에 투자하는 중이다.

“이대로면…, 한국대 입학 전까진 다 끝나겠네.”

한국 대학교 특례 입학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는 9월 1일.

지금이 7월 중순이니까 앞으로 한 달 반 정도 남았다.

그때까지는 전신 근육까지 성장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입학할 즈음이면 사람 같이는 보이겠네.”

지금도 많이 나아졌다.

120KG일 때는 저팔계의 실사판이었고, 100KG일 때는 조금 귀여운 돼지, 90KG까지 도달한 지금은 그래도 토실토실한 아기 돼지의 느낌이 난다.

이대로 다이어트에 매진하면 한 달 반 뒤면 약간 통통한 사람까지는 갈 수 있지 않을까.

“대학이라….”

20대 청춘의 메카, 대학교!

설렌다.

그것도 아주 많이.

왜냐면, 내가 한창일 때는 헌터를 전문으로 육성하는 대학교 같은 게 없었다.

오로지 실전을 통해, 선배들을 통해 배우고 터득할 뿐이었지.

그러다 보니 대학교에 갈 이유도, 시간도 없어서 포기했지만, 뒤늦게 후회가 되더라.

20대 청춘을 전부 몬스터 잡는 데에 갈아 넣느라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 게.

지금에 와선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보지 못했던 것도 좀 후회되고.

“반드시 되고 말겠어….”

폭격기가 될 거다.

한국 대학교의 여심 폭격기가!

조금은 우스운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캉캉캉!

문 두드리는 소리.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에 문을 두드릴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기에.

“도진아, 아줌마야.”

“네, 나가요!”

빠른 걸음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다섯 개의 반찬통을 들고 있는 아줌마가 보인다.

“자, 여기 반찬.”

아줌마가 내미는 반찬을 건네받는다.

최근 한 달은 계속 이런 식이다.

예전에는 괜찮다고 해도 들어와서 냉장고를 정리하고 반찬을 넣어주시더니, 지금은 문 앞에서 건네주고 황급히 돌아간다.

나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어떻게든 줄이려고 하는 거겠지.

“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럴 거면 새벽 운동도 그만두고, 반찬도 안 가져다주면 그만인데 굳이 왜 이런 식으로 어설픈 행동을 보이는 걸까.

“반찬 냉장고에 넣어두고 밥 먹을 때마다 꺼내 먹으렴. 아줌마는 그만 내려가 볼게.”

평소와 같은 목소리와 행동에 약간의 다급함이 묻어난다.

“저, 아줌마.”

나는 뒤로 돌아서는 아줌마를 불러세웠다.

차마 내 부름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흠칫 떨며 재차 돌아선다.

“왜 불렀니?”

한 달이면 많이 참았다.

이 정도면 아줌마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되었을 터.

지금까지는 미련 보이지 않고 돌아가는 아줌마를 붙잡지 않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한 달 동안 굳건해진 땅 위에 또 한 번 발을 내디딜 때다.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아줌마에게 부탁했다.

“실은 요즘 냉장고가 너무 지저분해서요. 정리하는 법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아줌마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이 말에 거짓은 없다.

진짜 냉장고가 많이 더러워졌다.

정리할 줄 몰라서는…, 아니다.

철이 들 무렵부터 혼자였던 내 자취 경력은 십수 년에 달한다.

그 이후로 풍족한 결혼 생활 덕분에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지만, 짬밥이 어디 가겠나.

어질러지는 걸 그저 방치했을 뿐이다.

이날을 위해서.

아줌마를 안으로 들일 아주 자연스럽고,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내, 냉장고….”

아줌마의 시선이 방 안에 있는 냉장고 쪽으로 향한다.

근래 한 번도 정리해준 적이 없으니 엉망이 되었으리라 짐작하고 있는 듯하다.

그와 동시에 나와 단둘이 되려는 걸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하는 표정.

자, 여기가 분수령이다.

아줌마가 진정 나와 멀어지고 싶다면 여기서 거절해야 한다.

어느 정도는 아줌마도 깨닫고 있을 거다.

내가 던진 냉장고라는 키워드는 단순히 하나의 핑곗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이에 맞지 않게 순진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던진 수 하나를 읽어내지 못할 만큼 순수한 여자는 아니니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이도 저도 못 하는 아줌마.

나는 조금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선택을 재촉했다.

“안 될까요?”

갈팡질팡하는 아줌마의 정신을 보여주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춰 선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는 아줌마.

이내 나를 힐끔 쳐다보며 물음을 던진다.

“그…, 많이, 더럽니?”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예, 이것저것 많이 쌓여서….”

쌓여 있다.

냉장고에도, 내 부랄에도.

일부러 방치하고, 정리하지 못해 아주 한가득 쌓여 있다.

우물쭈물하던 아줌마가 이내 결단을 내렸다.

“이번만 정리해줄 테니까…, 오늘 아줌마 하는 거 보고 다음부터는 직접 하렴.”

“네, 그럴게요.”

아, 됐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옆으로 비켜 서서 길을 터주었다.

“들어오세요.”

주춤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온 아줌마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쿵!

나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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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제법 정리가 되어 있는 방 안에 조심스레 발을 들인 아줌마.

하지만 아줌마는 냉장고 문을 열기가 무섭게 나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이건 하나도 안 변했구나.”

이것저것 가득 차 너저분해진 냉장고 안.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냉장고 안의 모습은 이 몸의 옛 주인의 기억을 참고했다.

“여기 옆에 앉으렴.”

아줌마가 자신의 왼쪽 바닥을 손바닥으로 두들긴다.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하기만 한 냉장고를 정리해가는 아줌마를 지켜보았다.

새삼 좋은 여자라는 걸 깨닫는다.

고작 세입자의 냉장고를, 그것도 주인조차 손대기가 난감할 정도로 어질러둔 걸 거리낌 없이 정리한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알겠다.

“다 먹은 반찬통은 바로 꺼내서 씻어야 해. 아니다, 그냥 씻지 말고 아줌마한테 가져오고… 아, 저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알려주고 있는데, 미안하게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내 눈과 정신은 아줌마의 겉모습을 살피느라 바쁘거든.

발목까지 내려오는 진회색 주름치마에 박시한 흰색 티셔츠.

한 달 사이에 아줌마의 옷차림이 많이 바뀌었다.

야시시한 회색 원피스는 어디로 가고, 몸매의 굴곡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둘렀다.

그것이 나쁜 의미로 보이지는 않는다.

뒤늦게 제 몸매를 감춘다는 건 그만큼 내 시선을 의식한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아줌마는 모르나 보다.

아줌마 몸매는 고작 펑퍼짐한 치마 한 장, 품 넓은 티셔츠 한 장으로 가릴 수 없다는 걸.

저 몸매를 제대로 가리려면 여름에도 롱패딩을 입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노력은 가상하지만, 내 꼴림을 막을 순 없단 얘기.

아줌마의 손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냉장고에 없던 질서가 생겨난다.

“휴우!”

아줌마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어느덧 한여름이다.

장마도 지나갔고,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될 거라고 뉴스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상황.

심지어 내 방은 옥탑방이고, 에어컨도 없다.

이 몸뚱어리 기억을 살펴보면 매년 여름마다 돈을 아껴서 에어컨을 사겠다고 다짐하고선 다 처먹는 데에 써서 지금도 없다.

지금은 여윳돈이 제법 있으니까 조만간 한 대 사러 가야지.

“아줌마, 많이 더우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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