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으, 아…!”
지우려고 안간힘을 써봐도 지워지지 않는다.
부정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욱 거리를 좁혀온다.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제 가슴을 주무르며 남기고 간 쾌락의 흔적이.
‘처음이었어….’
지금까지 몇 번인가 기분이 좋아졌던 적은 있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리는 절정은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 하나를 밑으로 내려 제 가슴을 주물렀다.
‘아무런 느낌도 없어.’
예전에는 그래도 미약한 쾌감이라도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마치 그의 손이 아니면 느낄 수 없다는 듯이 무감각하기만 했다.
“하아….”
그녀는 가슴을 만지는 것을 멈추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의 둥근 전등이 꼭 동글동글한 김도진의 얼굴처럼 느껴졌다.
다시 한번 떠오른다.
몰아치는 쾌락에 천박하게 헐떡이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때 그 순간 더없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음을.
한 번 더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돼, 이제 그런 건….”
이미 늦었다.
그렇지만 돌아가야 한다.
되돌려야 한다.
그런 일들을 하기 전의 자신으로, 단순히 세입자와 집주인의 관계로.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마치 몸이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진짜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어? 그런 쾌락을 알아버렸는데, 정말로?’라고.
머릿속이 새하얘져선 그 무엇도 남지 않고 오로지 기쁨만이 남았던 절정의 순간.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자신은 김도진을 단호히 물리칠 수 있을까.
“아윽….”
온몸이 욱신거린다.
벌써 그의 손에 길들어져 가는 가슴이, 아직 내어주지도 않은 음부마저도.
비명을 내지르는 것만 같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적어도 단호할 수는 없겠노라고.
그리 말을 하는 듯했다.
* * *
아줌마와 오전 운동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아줌마는 내게 닿지 않으려는 듯 조금 멀어졌고, 나는 그 뒤를 따르며 걸었을 뿐.
속내가 빤히 보인다.
“원래대로 돌아가려나 본데….”
아줌마도 알고 있을 거다.
아줌마도, 나도.
이미 그러기엔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것을.
진짜 그러고 싶었다면 최소한 화장실에서 내 자지를 빨았으면 안 됐지.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하룻밤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그대로 걸어 잠갔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오늘 나를 보다가 시선을 거둘 때마다 은근슬쩍 자지를 쳐다보진 말았어야지.
“남은 건 직진뿐.”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고.
다만 아줌마에게나, 나에게나 해피엔딩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뿐.
“이럴 때가 아니지.”
방에만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수습해 화장실로 향한다.
몸에 말라붙은 땀을 흐르는 물에 대충 씻어내고 집을 나섰다.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곳은 마법 학원.
오늘이 바로 대망의 첫날이다.
긴장과 설렘을 안은 채 엘리베이터를 통해 7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향하는 곳은 특강반.
나와 비슷한 놈들을 모아둔 각성자들을 위해 창설된 반이라던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마어마한 크기의 강의실이 눈에 들어온다.
어찌나 큰지, 한눈에 다 담기도 힘들 지경.
조금 어이없는 점이라면, 이 거대한 강의실에 사람이라곤 다섯이 전부라는 점이었다.
강단에 선 박철수 원장과 나와 함께 특강을 수강할 세 명의 수강생.
그리고 맨 뒤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헌터 협회 감찰부 소속의 윤지안까지.
그녀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넓은 강의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녀석들의 면면을 살폈다.
딱 봐도 특이한 놈들이다.
한 놈은 머리를 피처럼 빨갛게 물들였고, 한 놈은 세상 다 산 것처럼 달관한 표정이다.
마지막으로 잿빛 머리카락을 한 여자는 턱을 괸 채로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음, 역시.
마법사 중에는 왜 정상인 놈이 하나도 없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답을 좀 찾은 기분이다.
애초에 정상이 아닌 놈들만 마법사가 되는 거였구나.
아니, 그러면 내가 정상이 아니란 거야, 뭐야? 묘하게 기분 나쁘네.
아.
난 마법사가 아니지, 참.
“하하! 어서 오게, 그간 별일 없었나?”
“예.”
강단에 서 있던 박철수 원장이 친근한 태도로 다가왔다.
여전히 나를 포기하지 않은 듯한 눈빛.
조금 소름이 돋았다.
그는 나를 강단 위로 이끌었다.
그리고 우리 전혀 안 친해요, 온몸으로 말하는 듯 자유분방하게 떨어져 앉은 세 사람을 향해 나를 소개했다.
“이쪽은 함께 특강을 듣게 될 김도진 학생일세. 다들 따뜻한 박수로 환영해주게.”
짝짝짝….
힘없는 박수가 뒤를 잇는다.
고작 세 사람밖에 없는데 그중 박수를 친 사람은 고작 두 명뿐이다.
가장 뒤편에 서 있는 윤지안과 빨간 뚝배기를 가진 사내놈.
그마저도 놈이 친 박수는 환영의 인사라기보단 제 시선이 머물러 있는 윤지안이 박수를 치니까 따라서 치는 느낌이다.
꼬라지를 딱 보아하니, 윤지안한테 수작을 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나는 별 느낌도 없는데, 오히려 옆에 있던 박철수 원장이 더 당황하고 있다.
“하, 하하…, 자네가 이해하게. 워낙 개성이 뚜렷한 친구들이라.”
“그래 보이긴 하네요.”
“일단 원하는 자리에 가서 앉게.”
나는 녀석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살폈다.
오른쪽 끝에 하나, 좌측 끝에 하나, 맨 뒤에 하나.
나는 가장 맨앞 정중앙에 앉았다.
좋아, 이로써 우리는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사신수가 되었다.
고작 넷밖에 안 되는데 강의실을 아주 폭넓게 사용하는 수강생들의 모습에 살짝 질린 듯, 몸서리를 친 박철수 원장은 이내 신색을 회복하고 강의를 시작했다.
“자, 마법이란 무엇이냐. 가장 기초적이지만, 이보다 심오할 수가 없는 질문이라네. 먼저 사전적인 정의를 살펴보자면….”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마법의 역사를 시시콜콜하게 설명하는데, 솔직하게 몇 번이나 잠이 올 뻔했다.
다른 놈들도 나와 마찬가지겠지 싶어 슬쩍 뒤를 돌아봤더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놈들이 필기까지 해가며 수업을 듣고 있다.
심지어 윤지안한테 열심히 수작질이나 하고 있던 빨뚝마저도 필기를 하고 있다!
뭐지, 내가 이상한 건가?
생각해 보면 마법사들은 자부심이 유달리 강한 이들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따분한 역사에 열을 올리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고, 내가 오히려 비정상이구나 싶다.
“자, 마법에 대한 역사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슬슬 실전으로 들어가 보도록 할까.”
두꺼운 책이 드디어 덮어지고,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다.
“모두 앞으로 나오게.”
그의 부름에 하나둘씩 일어나는 수강생들.
뒤늦게 일어난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은 가볍게 학생들의 주 속성이 무엇인지 파악해보도록 하지.”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교탁 아래에서 무언가 둥실 떠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한 수정구였다.
박철수 원장의 염동력(psychokinesis) 마법에 의해 떠올랐던 수정구가 교탁 위에 안착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보았다.
그가 일필휘지로 그려간 마법진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주변 마력이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
염동력 자체가 중급에 속하는 마법이라 마력 소모가 어마어마해서 오래는 못하겠지만, 아주 잠깐이라면 가벼운 물체 정도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집에 가서 리모컨이나 옮겨 봐야지.
“차례대로 여기에 손을 얹을 걸세. 누가 먼저 해보겠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제가 한 번 해보겠슴다!”
오른쪽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던 빨간 뚝배기다.
“좋아, 윤민규 학생이 먼저 하도록 하지.”
그는 원장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단 위로 올라가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자, 그 상태로 마력을 천천히 흘려 넣어보게.”
천천히 눈을 감고 마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하는 빨뚝.
마법이란 다양한 원소를 기반으로 지역 또는 몬스터의 특색에 맞춤으로 마법을 발현하는 다재다능한 딜러 직업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마법사들은 모든 속성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느냐? 그것은 또 아니다.
“마법사에게는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속성이 있기 마련이네. 우리는 이를 주속성이라 부르지.”
그의 설명과 동시에 빨뚝의 손바닥 아래에 있던 투명한 수정구에 붉은 기운이 차오른다.
투명한 마력 알갱이들이 그의 마력에 감화되어 붉게 물들더니, 불꽃으로 화했다.
“윤민규 학생의 주속성은 불이로군.”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점차 사그라들더니 투명해진 수정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것은 바람일세. 윤민규 학생의 두 번째로 적성이 높은 속성이 바람이라는 뜻이지.”
불, 바람, 번개, 대지, 물 등.
속성들이 차례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가장 앞에 나온 속성이 주속성이고, 맨 뒤에 나온 것이 가장 적성에 떨어지는 약속성이란다.
“적성이 높은 속성의 마법을 사용할 때는 같은 마법을 발현해도 그렇지 않은 이보다 마력 소모량이 적어지지. 적성이 아닌 마법을 사용할 때는 반대로 그만큼 소모량이 많아지고.”
한마디로 저 빨뚝은 불 계열 마법을 사용할 땐 효율적이지만, 물 계열 마법을 사용할 땐 그만큼 연비가 구려진다는 뜻.
놈은 제 주속성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빨갛게 물들인 머리카락을 슥슥 만지며 웃고 있었다.
녀석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역시나 뒤편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윤지안이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인상을 팍팍 쓰고 있는데, 저놈은 눈치란 게 없나.
“자, 다음은….”
다른 두 사람도 속성 확인을 끝마쳤다.
잿빛 머리 여자, 정효린의 주속성은 바람, 뒤를 따르는 부속성은 불이 나왔고.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놈, 조동진의 주속성은 대지, 부속성은 물이 나왔다.
“자, 이제 김도진 학생 차례일세.”
원장의 기대어린 눈을 한 몸에 받으며 강단 위에 올라섰다.
뒤편에 서 있던 윤지안 또한 눈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 듯 보인다.
그렇게나 내 주속성이 궁금한가.
뭐, 사실 궁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혼자 몇 가지 마법을 사용해봤다.
얼음꽃도 만들어보고, 불꽃도 피워올리고, 돌로 송곳도 만들어봤지만, 그중 하나가 특출나게 어렵거나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과연 내 몸뚱어리에 주속성이란 게 있을까, 있다면 대체 무엇일까.
과한 긴장과 기대에 조금은 경직된 팔을 뻗어 수정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코어에 잠들어 있는 마력을 조금씩 팔을 통해 수정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투명한 수정구 안에 차 있던 마력 알갱이들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화르륵!
수정구 중앙에서 불꽃이 퍼지고.
휘이이잉-
어딘가 스산한 느낌을 주는 바람이 불어닥친다.
콰드득-!
수정구 밑바닥에 땅이 생겨나더니.
빠지직!
그 위가 하얗게 얼어붙는다.
쏴아아-
수정구 윗부분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꽈릉!
마침내 위에서 아래로 한 줄기 금색 벼락이 내리친다.
수정구 안에 나타난 것은 작게 압축해둔 종말 그 자체.
“오, 쒸.”
개멋있어.
근데 이거 이래도 되나.
남들은 하나씩 등장했다가 사라지던데 왜 나만 이 모양이지.
고개를 들어 강단 아래에 있는 원장과 세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하나 같이 입이 쩍 벌어져선 턱이 땅에 닿을 지경.
뒤에 있던 윤지안도 비슷했다.
봐선 안 될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예쁘고 단정한 이목구비 전체가 경악으로 물들어 있다.
“음.”
아무래도 이 몸뚱어리가 사고를 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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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럽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만큼 이쪽을 향해 있는 다섯 쌍의 시선에서 쏟아지는 관심이 매서웠다.
뻘쭘한 마음에 수정구 위에 올라가 있던 손을 슬며시 거둬들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투명한 상태로 돌아온 수정구.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저 다섯 사람의 얼굴도 이 수정구처럼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