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오가다 멈춰 선 숫자는 99.8.
“우왁!”
이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몸무게가 세 자릿수에서 두 자릿수로 내려왔다.
계기판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신유정이 피식 웃으며 팔꿈치로 내 팔을 툭 건드린다.
“야, 너 키도 컸다?”
“진짜?”
어, 진짜네.
계기판에 161.3cm가 찍혀 있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성장이기는 했다.
2주 전쯤인가, 그때까지 모은 마력을 대부분 투자해서 아직 닫히지 않은 성장판에 전부 몰아넣었다.
젊은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걸 꼽자면 얼굴, 키, 아랫도리 크기 아닌가.
아랫도리는 이미 해결했고, 얼굴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패스.
자연스럽게 하나 남은 키에 몰빵하는 건 당연한 이치.
고작 2주 됐는데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이열, 새끼. 살 좀 빠지니까 좀 낫다?”
체중계에 올라선 채로 앞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살이 찐 건 맞는데, 살에 파묻혀 있던 이목구비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붙은 살에 억눌려 있던 눈이 조금 커졌다.
얼굴 살이 조금 빠져서 그런지 코도 조금은 더 도드라진 것 같고.
약간 뭐랄까, 눈이 쪽 찢어진 저팔계 스타일에서 귀여운 돼지가 된 듯한 느낌?
나는 고개를 돌려 신유정을 보았다.
“다 네 덕분이야.”
그녀가 없었어도 살을 뺄 수는 있었을 거다.
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라도 누군가가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는 큰 법.
얘가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어준 덕분에 훨씬 더 빨리 뺐다.
“흠흠! 뭐, 잘 아네.”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까 괜히 쑥스러워한다.
과거 이 몸을 그토록 괴롭히던 신유정이 맞나 의심하게 될 정도.
“고, 고마우면 뭐…, 밥이라도 한 끼 쏘든가. 너 그 뭐야, 저번에 협회에서 보상금도 두둑하게 받았다매.”
이야, 놀랍다.
지난 3주간 오직 헬스장에서만 얼굴을 마주하던 애가 밥을 사달란다.
그새 나름 정이라도 들은 건지, 아니면 저것도 나를 길들이기 위한 하나의 수법인 건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미안, 나 오늘 갈 데가 있어서.”
오늘은 내가 시간이 없거든.
신유정의 얼굴이 뾰로통하게 변했다.
“…방구석 폐인 새끼가 갈 데가 어딨는데?”
이런.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게 실시간으로 눈에 보인다.
여전히 자기보다 한참 밑이라고 생각한 찐따가 자기 제안을 거절한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언짢은 기분을 단숨에 반전시킬 카드가 있다.
“오늘 협회에서 마법 학원에 등록시켜 준다고 했거든.”
“뭐…? 협회에서?”
바로 협회 카드.
“어, 내가 저번에 말 안 했나? 협회에서 2학기부터 한국 대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준다고 했거든. 그래서 그 전에 기초 마법부터 배우라고 하더라.”
잔뜩 성이 나 있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진다.
알기 쉬운 녀석 같으니.
“그러니까…, 협회에서 너 마법도 가르치게 해주고, 대학교도 보내준다고…? 그것도 특례 입학으로.”
“응.”
어어, 저거 봐라.
입꼬리 올라가는 거 억지로 참고 있는 거 뻔히 보인다.
“흠흠! 그럼 네가 내 동기가 되는 거네. 하, 참나. 찐따 주제에 좀 컸다…?”
“하하, 그런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자, 녀석이 내 등을 팡팡 두드린다.
“자자, 그런 일이면 빨리 가. 괜히 협회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고.”
“그, 그래.”
녀석의 등쌀에 떠밀려 탈의실로 들어왔다.
대충 땀만 빠르게 씻어내고 나와서 옷 갈아입고 나오니 비슷한 타이밍에 신유정도 여자 탈의실에서 젖은 머리를 흔들며 나오고 있었다.
“머리 또 안 말렸네.”
“아, 귀찮아. 네가 좀 말려줘.”
한 번 보여줬더니 매번 써달라고 난리다.
하는 수 없이 탈수 마법을 이용하여 녀석의 머리를 뽀송뽀송하게 말려주었다.
“이 마법은 진짜 내가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개편해, 진짜.”
“언제든 얘기해. 내가 대신 써줄게.”
아쉬워하는 신유정에게 은근슬쩍 내 존재감을 들이민다.
“하, 새끼. 은근슬쩍 들이대는 거 봐라?”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짝다리를 짚는 신유정.
난 당황한 연기를 하며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네가 편하다고 했으니까.”
거하게 뒤통수를 치기 위해선 사전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
녀석에게 조금씩 친밀감을 느끼고, 종속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풍겨주어야 한다.
내 대답이 제법 만족스러운지, 녀석이 내 어깨에 팔을 둘러온다.
“새끼, 바로 갈 거냐?”
“응. 여기서 별로 안 멀어.”
“아~ 저쪽에 있는 마법 학원인가 보네.”
녀석은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을 빼내며 멀어졌다.
“그럼 나 간다. 낼 보자.”
“어, 잘 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녀석이 멀어질 때까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휴.”
신유정이랑 있다 보면 기가 쪽쪽 빨리는 기분이다.
다 이 몸뚱어리 탓이다.
저 얼굴만 보면 온몸에 긴장감이 쫙 서린다.
그래도 보다 보니까 예전보다 낫기는 한데, 아예 사라지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다.
3년간 굴려졌는데 고작 한 달 만에 잊혀지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하지.
녀석이 걸어간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내가 다녀야 할 마법 학원이 있다던데.
“어디 보자….”
스마트폰으로 전송된 지도를 보며 길을 따라 걸었다.
한 5분쯤 걸었나.
“어, 여긴가.”
다른 건물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크고, 삐까뻔쩍한 5층 건물이 보인다.
건물 꼭대기에 ‘박철수 마법 학원’이라는 간판이 떡하니 박혀 있다.
건물을 향해 가까이 걸어가자, 지난 번과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는 윤지안이 보인다.
“안녕하세요.”
“아, 오셨군요.”
앞장서는 그녀를 따라 학원으로 들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제법 많은 이들이 학원 안을 서성이고 있다.
“와…, 이게 다 각성자에요?”
“예, 그렇습니다.”
“확실히 마법사 위상이 어마어마하긴 하구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마법에 재능이 있어서 학원을 찾은 게 아니다.
혹시 나한테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찾은 이들이다.
마법사가 될 수만 있으면 그야말로 귀족이 되는 거니까.
과연 저들 중 진짜 마법사의 재목은 몇이나 될까.
두 명에서 세 명 정도만 돼도 많지 않을까 싶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꼭대기 층인 5층으로 향한다.
“이곳입니다.”
원장실, 이라고 적혀 있는 문.
윤지안이 열어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가 희끗한 중년 사내가 보인다.
저 사람이 건물 간판에 떡하니 걸린 박철수 원장이겠지.
뒤따라 들어온 윤지안이 그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십니까, 원장님.”
“어서 와요, 윤지안 씨. 아, 이쪽이 그…?”
원장의 시선이 나를 힐끔 쳐다본다.
“예, 맞습니다. 이번에 특강을 듣게 된 김도진 씨입니다.”
윤지안의 시선도 내쪽으로 향한다.
그녀의 눈치를 읽어들인 나는 곧장 박철수 원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김도진입니다.”
“반가워요, 박철수 원장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자, 일단 앉아봅시다.”
박철수가 먼저 자리에 앉고, 나와 윤지안은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래요. 듣기로는 마법을 독학으로 성공시켰다고 들었는데….”
“예, 어스 니들을 성공했습니다.”
“허어…, 공용 마법도 아니고 속성 마법을 성공시켰다니.”
공용 마법은 속성의 변화 없이 마력의 배열만을 이용해 사용하는 마법을 뜻한다.
매직 미사일이라던가, 실드 같은 마법들이 이에 속한다.
아무래도 속성 변환을 담당하는 마법진의 획이 줄어들다 보니, 조금 더 난이도가 쉬운 편.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네.”
그의 제안에 곧장 주변의 마력을 끌어당긴다.
이미지로 떠오르는 대지의 이미지를 마력에 덧씌우고, 이를 모아 형태를 잡는다.
이번에는 미튜브에서 보았던 형태 그대로의 모습을 구현했다.
이윽고 눈앞에 떠오른 날카로운 갈색 바늘들.
“여기요.”
결과물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자, 이를 확인한 박철수 원장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야, 왜 저래.
* * *
밤이다.
마법 학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오후였는데.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마법사 중에 정상인은 없다는 걸.
“좀 느리게 쓸걸….”
박철수 원장이 놀란 건 딱 하나.
어스 니들을 만들어내는 속도였다.
이제 막 마법을 배우는, 마법사라고 아직 부르기도 힘든 초보자들이 어스 니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대략 20초 안팎이란다.
초급 마법사는 대략 10초 내외라고 하고.
근데 내가 어스 니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걸린 시간은 단 5초.
마법을 배운 적 없는 각성자가 선보여선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속도였던 것.
그때부터 시작됐다.
박철수 원장의 구애가.
“어우, 소름돋아.”
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기세로 매달려서 자기 수제자 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더라.
마법 학원의 원장 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부 기관을 통해 철저한 검증을 통과한 마법사만이 학원 설립을 허가받을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박철수 원장은 국가에서도 보증한 실력자라는 뜻.
다른 이들이라면 곧장 받아들였겠지만, 난 거절했다.
내 능력만 잘 사용하면 우리나라 마법사들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이에게도 제안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인데, 굳이?
“뭐…, 그래도 기분은 좋네.”
박철수 원장이 그렇게 나와준 덕분에 윤지안은 더없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간 그녀는 협회에 이를 그대로 보고할 테고, 내 주가는 더욱 상승하겠지.
아마 무언가 슬쩍 요청하면 웬만한 건 다 해주지 않을까 싶다.
흐뭇하게 웃으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아…, 도진아.”
때마침 문을 열고 나온 아줌마와 마주치고 말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주변을 잠식한다.
“아, 안녕하세요. 아줌마….”
최대한 어수룩한 모습으로 아줌마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그래.”
거의 3주 만이다.
이렇게 아줌마와 얼굴을 마주하는 게.
아침 운동? 안 했다.
그런 식으로 헤어지고 나서도, 아줌마는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팔이 아파서 운동을 못할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신유정과는 오후마다 같이 운동을 했다.
아마 한 번쯤 그녀를 통해 내가 운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지 않았을까.
아줌마와의 관계를 끊어내기 위해서? 아니다.
보다 더 깊어지기 위한 일 보 후퇴라고 보면 된다.
보지 않음에도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기 위한 고도의 노림수.
남자와 여자 사이의 고도의 테크닉 따위, 내게는 없다.
다만, 내 방식대로 풀어가고자 할 뿐.
어찌 보면 비슷하지 않은가.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여자를 상대하는 것도.
전부 상대방의 심리, 행동 패턴을 파악해 보다 좋은 위치를 선점하는 것은 말이다.
“저…, 도진아.”
적막이 흐르는 사이, 아줌마가 나를 불렀다.
표정이 묘했다.
어색하지만, 무언가 불만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