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20)

“일단 조금만 뛰죠.”

놈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

나는 주저앉은 아줌마를 일으켜 세워 나무와 나무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내 눈은 주변을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중 한 곳이 내 시선을 잡아끈다.

나는 검지로 그곳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빽빽하게 자라 있는 나무 사이를 최대한 이리저리 움직이며 녀석을 헷갈리게 만든 뒤, 조금 돌아서 처음 내가 가리킨 곳에 도달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은 곳.

나는 그중 한 나무 아래에 아줌마를 세워두었다.

“아줌마, 여기에 꼼짝 말고 서 계세요.”

“그, 그러기만 하면 되니?”

“예. 대신, 어떤 일이 있어도 움직이시면 안 돼요.”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두 손을 꼭 잡으며 말을 잇는다.

“믿어주세요. 아줌마가 다치는 일은 절대 없게 할게요.”

몸 전체에 퍼져가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든다.

아줌마는 이내 가볍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이가 이렇게 믿음직스럽게 얘기하니까, 아줌마가 안 믿을 수가 없겠다.”

차분해진 아줌마로부터 멀어지려다가 문득 말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 다시 다가갔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뭔데?”

“오크가 달려오면 좀, 뭐랄까…, 섹시한 포즈 같은 걸 좀 취해주세요.”

“세, 섹시?! 그게 40대 아줌마한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니?”

나는 세상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른 아줌마는 안 되는데, 아줌마는 돼요.”

“도, 도진아?!”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 귀엽다.

하지만 거기에 헤벌레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이것도 작전의 일환이니까 꼭 해주셔야 돼요.”

당혹감 서린 표정을 하고 있는 아줌마를 뒤로한 채, 등을 돌렸다.

내가 향할 곳은 아줌마가 서 있는 나무의 바로 맞은편.

“후우.”

코어에 열심히 뭉쳐둔 마력을 풀어내 팔과 다리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나약한 근육이 내지르는 비명을 무시한 채, 나무 위를 향해 힘껏 뛰어올라 그대로 껴안는다.

그 상태로 등반 시작.

“흡!”

이 몸뚱어리를 지탱하는 것조차 힘들어 부들부들 떨리는 팔과 다리를 위로 뻗는다.

마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강화된 사지가 가까스로 목표한 위치에 닿았다.

“후우, 후우…!”

팔과 다리의 근육이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쓰리다.

“도, 도진아. 괜찮니?”

맞은편 나무에 서서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아줌마가 걱정하는 투로 얘기했다.

“이제부터 제가 있는 곳 보시면 안 돼요. 오크 보이면 무조건 오크만 보세요.”

“그, 그래.”

쿵! 쿠웅!

놈이 시야와 진로를 방해하는 나무를 향해 마구 주먹을 휘둘러대며 다가오는 게 보인다.

거리가 생각보다 더 가깝다.

죽음이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실감하자, 집중력이 더없이 빠른 속도로 상승한다.

“윽…!”

마력을 바라보는 눈의 선명도가 지나치게 상승했다.

잠깐 머무른 곳의 색을 투영하는 투명한 마력의 알갱이.

거기에 색을 입힌다.

이번에 입힐 색은 갈색.

더없이 단단하고, 안정적이게 발 밑을 받쳐주는 대지의 마력.

변화시킨 마력을 한데 모아 내 머릿속에 강하게 떠오른 이미지를 그대로 끄집어낸다.

아무것도 없던 손에 무언가가 잡힌다.

조악한 손잡이, 그 위로 난 날카로운 송곳.

“대지 송곳(Earth Drill).”

이름을 불러가며 머릿속 이미지를 더 강하게 고착화하자, 겉부분에 불안전하게 달라붙어 있던 마력이 안정적으로 합류한다.

“제법 단단해 보이는데.”

가용할 수 있는 마력 대부분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대지 송곳.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단단해 보인다.

나무에 몇 번 부딪혀 강도를 시험해보고 싶지만, 무서우니까 관두자.

지금은 이것만이 녀석을 죽일 유일한 수단이니까.

지금까지 모은 마력은 대다수 신체 성장을 위해 쓰였다.

그래서 매번 지니고 있는 마력 수치가 비루한 편이라, 지금 상태로는 멋들어지게 마법을 사용하여 놈을 죽일 수가 없다.

그러니 별 수 있나.

“직접 쥐고 찌르는 수밖에.”

이 몸뚱어리로는 처음이지만, 내 영혼에 알알이 박힌 그간의 경험들을 믿는다.

대지 송곳을 소중히 품은 채, 놈의 위치를 파악한다.

비로소 일직선상에 놈이 당도했다.

꾸이이이익!

아줌마를 발견한 놈이 흥분 섞인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내가 없어진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

이 정도면 아줌마한테 섹시 포즈 같은 건 부탁하지 않아도 됐었겠는데.

“이, 이렇게 하면 되나…?”

아줌마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허리와 몸을 꺾어 제 몸의 굴곡을 더욱 부각시킨다.

“오우야.”

가만히 있어도 존재감이 과하게 드러나는 넓은 골반과 가슴이 자세의 힘을 얻어 폭발적인 염기를 토해내고 있다.

꾸익! 꾸이이익!

채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서 침이 주룩주룩 나와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아줌마 근처까지 다다른 놈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대로 달려들면 애를 낳게 하기도 전에 죽는다는 걸 알고 있는 듯이.

그것이 내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꾸히이익!

이 몸뚱어리가 넘칠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는 게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살이다.

움직일 때마다 사정없이 출렁거리는 이 지방 덩어리들.

없어져야 마땅한 대상이, 지금만큼은 내 무기다.

한 걸음, 한 걸음.

놈이 내가 올라서 있는 나무 아래에 당도한 순간.

나는 지체하지 않고 녀석을 향해 힘껏 뛰어내렸다.

일말의 체공도 없이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하는 육중한 몸뚱어리.

손에 쥐고 있던 송곳이 녀석의 목덜미를 겨냥했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양손으로 쥔 송곳을 녀석의 목덜미에 박아 넣으려 할 때.

꾸익!?

놈의 머리가 위로 젖혀졌다.

그와 동시에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내 팔을 붙잡는 오크.

다만 가속도 붙은 몸뚱어리를 이겨내기는 힘들었는지 내 팔을 붙잡은 채로 뒤로 자빠진다.

“이익…!”

억지로 몸을 틀어가며 녀석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붙잡힌 두 팔에 온몸의 무게를 싣는다.

꾸익!

“크으…!”

녀석에게 붙잡힌 두 팔이 비명을 내지른다.

놈의 어마어마한 악력에 그대로 팔이 부러질 것만 같은 느낌.

꾸이이익!

녀석의 두 팔이 내 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그대로 죽게 생겼다.

녀석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다.

어떻게 하지?

펼쳐지는 무릎에 로우킥을 갈겨 봤지만, 오히려 내 다리만 아프다.

“씨발…!”

아, 이딴 D급 몬스터한테 죽는 건 진짜 아닌데.

땅에 닿아 있는 나머지 한쪽 무릎마저 일어나면 그 순간 내가 도달하는 곳은 죽음.

그 순간, 기발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녀석의 무릎 밑에 짓눌린 마력의 알갱이들에 시리도록 푸른색을 덧씌운다.

물? 아니, 얼음.

녀석이 무릎에 힘을 줄 타이밍에 땅바닥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얼린다.

“얼음(Ice)!"

꾸익?

힘이 잔뜩 들어간 놈의 무릎이 미끄러진다.

그와 동시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신체가 급속도로 무너져 내린다.

내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놈의 팔이 떨어질 정도로.

승리를 확신한 나는 웃으며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땡.“

푸욱!

어마어마한 무게가 실린 송곳이 놈의 목덜미에 닿았다.

덜 여문 연둣빛 가죽을 거침없이 꿰뚫고 손잡이만 남긴 채 녀석의 안으로 사라졌다.

꾸익, 꾸히이….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를 내며 놈의 동공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 순간, 내 눈에 무척이나 흥미로운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오크의 몸에서 검은색 마력의 알갱이가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그것은 잠시 오크의 몸 위에 둥둥 떠 있더니, 서서히 형태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안 되지.“

본능이 내 몸을 이끌었다.

저걸 사라지게 두면 안 된다는 듯, 손을 휘저어 사라져가던 마력을 내게로 끌어당겼다.

검은색 마력의 알갱이들이 내 모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마력은 마침내 다다른 코어 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크의 시체로부터 마력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력 수치가 3 상승합니다.]

[흡수한 마력은 정화 작업을 거친 후 사용 가능합니다.]

[정화까지 남은 시간: 23:59:55]

”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죽은 몬스터의 시체에서 마력을 흡수하는 헌터의 이야기 따위.

이 몸뚱어리가 특별한 걸까, 아니면 내 영혼이 어떤 작용을 하는 걸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어쨌든 둘 다 내 거니까.

”도, 도진아!“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하던 생각을 멈추고 아줌마를 향해 뒤를 돌아보는데.

”아.“

느껴진다.

체내가 텅 빈 듯한 감각.

또냐.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아줌마가 보인다.

나는 그런 아줌마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줌마, 나이스 포즈.“

그때 본 포즈는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꺼내선 안 되는 말을 속으로 되뇐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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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진이 쓰러진 직후.

서정희가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119를 누르고 있을 때.

“찾았습니다!”

조금 전 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협회 직속 헌터들이 등장했다.

한없이 늦게 등장하긴 했지만, 그들은 빠른 속도로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도진과 서정희는 곧장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자신들이 놓친 오크에 의해 죽을 뻔했다는 부채감 때문인지, 검사 또한 곧장 진행됐다.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서정희는 단순한 찰과상, 타박상에 그쳤고, 김도진은 마력 탈진 현상과 좌측 자뼈 부분에 금이 간 정도.

하루 정도는 안정을 취하라며 의사는 두 사람에게 각각 1인실을 내어주려고 했지만.

“아뇨, 그냥 2인실로 주세요.”

그녀가 거절했다.

그렇게 2인실에 나란히 입실한 두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몬스터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수업 도중에 뛰쳐나온 신유정이 문을 거세게 열고 들이닥쳤다.

“엄마! 괜찮아?”

“응, 엄만 괜찮아.”

서정희는 애써 웃는 얼굴로 딸을 반겼다.

사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지만, 딸아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병실 안쪽 침대에 누워 마력 수액을 맞고 있는 김도진에게로 향했다.

“도진이가 엄마 구해줬어.”

“저 돼지가?”

“얘는, 엄마 구해준 사람한테 돼지가 뭐야, 돼지가!”

돼지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서정희가 신유정의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짜악!

“아, 진짜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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