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20)

“정말 개판이네, 이 새끼들.”

목동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최소 두 시간은 걸릴 텐데, 이놈이 여기 올 때까지 헌터란 새끼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내 몸만 안 바뀌었어도 그 새끼들 전부 자격증 말소시키는 건데.”

내 몸을 가져간 (신)손시우 씨께 감사해라, 새끼들아.

발끝이 향해 있는 방향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또 다른 족적이 보인다.

넓게 띄워져 있는 족적과 족적 사이.

보폭이 넓은 것으로 보아선 놈이 뛰기 시작한 게 틀림없다.

이쪽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쫓아간 건가.

또 다른 흔적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떨어져 흙바닥을 적신 액체.

“킁킁.”

손가락으로 흙덩이를 퍼 냄새를 맡아 보았다.

“우엑.”

인간의 침에 비해 수십 배는 역한 오크의 침 냄새가 헛구역질을 유발한다.

오크가 땅바닥에 침을 질질 흘리는 경우는 단 한 가지.

“극도의 흥분 상태.”

어떤 이유에서건 오크는 극도로 흥분하면 길게 자라난 엄니 때문에 꽉 다물어지지 않는 주둥이 사이로 침을 줄줄 흘린다.

말인즉, 놈이 무언가에 의해 잔뜩 흥분한 상태라는 건데.

“씨발.”

아줌마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오크는 번식력이 매우 뛰어난 개체.

여자라면 일단 환장하고 보는 종족이지만, 나름대로 가릴 건 가리는 놈들이다.

얼굴을 보냐고? 아니다.

놈들이 보는 건 체형이다.

골반이 넓고 튼실한 여자.

자신의 아이를 숨풍숨풍 낳아줄 수 있는 체형의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

아줌마는 골반이 넓다.

몸매가 드러난 회색 원피스나, 레깅스를 입고 있으면 그 굴곡이 여실히 살아나 사내들의 음심을 자극한다.

“이 개 같은 감각은 어째 틀리지를 않냐.”

스마트폰을 꺼내어 119에 전화를 걸었다.

“댁들이 놓친 오크 여기 있으니까 빨리 잡으러 오쇼.”

좋게 말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서 좀 띠껍게 말해놓고 전화를 끊었다.

이러면 내 위치를 추적해서 곧장 오겠지.

신고를 하긴 했지만, 헌터들이 오길 기다리며 손가락만 빨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나는 오크가 달려간 곳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이 저질스러운 몸뚱어리가 또 내 발목을 잡는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숨이 차면 대체 어쩌자는 거냐고.

속력이 자꾸만 느려진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조금만, 후욱, 더…!”

보폭이 조금씩 좁아지고 있다.

그것은 녀석의 걸음이 천천히 멈춰 서기 시작했음을 뜻할 터.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쿨럭, 쿨럭!”

턱끝까지 차오른 숨에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눈은 땅바닥을 훑는 걸 멈추지 않는다.

오크의 족적 외에 또 다른 족적이 보인다.

오크에 비하면 작고 아담한 사이즈.

인간, 그것도 여성.

앞서간 여인의 발길이 산속 곳곳을 누비고 지나갔다.

꾸이익! 꾸익!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오크의 분노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대충 예상이 간다.

그토록 쫓던 여인이 숲속 어딘가로 숨어버린 거다.

오크는 이를 찾아내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거고.

“아직…, 후우! 시간은 있다.”

숨을 고르며 포효가 들려온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보인다.

쿠웅!

숲속을 헤매며 주먹으로 나무를 마구 두들기고 있는 오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잔뜩 성이 났는지, 등근육이 꿈틀거리고 있다.

꾸에에엑!

목소리가 생각보다 굵지 않다.

피부색도 예상보다 훨씬 옅고.

“어린놈이네.”

어리다는 말은 좀 그렇고.

덜 여문 개체라고 해야 할까.

오크는 피부의 색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 가죽이 질기고, 단단해진다.

놈의 피부는 연두색에 가까운 녹색.

전투력이 그다지 높지 않음을 의미했다.

그렇게 산출해낸 등급은 D급.

그중에서도 말단에 불과했다.

오크 중 가장 약한 개체라는 건 불행 중 다행이지만, 사실 크게 다행이랄 것도 없다.

“그래도 나보다 강하잖아.”

아무리 약한 놈이라도 이제 막 담금질을 시작한 이 몸뚱어리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하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놈보다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는 여자를 찾아내서 도망치는 것.

“집중하자, 집중.”

여인의 족적이 향한 곳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오크가 헤집고 있는 방향에서 조금 틀어진 곳에 위치한 빽빽한 나무들.

그곳에 살짝 튀어나온 옷자락이 보인다.

조금 더 빠르게 올라가 그곳을 살펴보니, 익숙한 뒤태가 보인다.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패악질을 부리고 있는 오크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 여인은 아줌마였다.

곧장 달려가려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다.

내가 뒤에서 불렀을 때 아줌마가 소리라도 질렀다간 모든 게 끝장이니.

천천히 다가가 아줌마의 손을 뻗어 아줌마의 입을 막았다.

“읍!”

다급하게 아줌마를 뒤로 돌려 내 얼굴을 확인시켰다.

“아줌마, 저예요.”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위아래로 들썩이는 가슴이 짧은 순간에 아줌마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보여준다.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사죄의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아줌마가 놀라서 소리 지르실까 봐.”

“괘, 괜찮아. 그보다 도진이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아줌마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게 물었다.

“아줌마가 안 보여서 찾으러 왔죠.”

“너, 너 미쳤니?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도망을 쳤어야지…!”

내 어깨를 가볍게 내리치며 핀잔을 주고 있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그려져 있다.

내심 기분이 좋아 보인다.

“제가 없어졌다면 아줌마도 절 찾았을 것 같아서요.”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줄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놈이 엄한 곳 뒤지고 있는 사이에 반대로 빠져나가요.”

“그, 그래.”

녀석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아줌마의 어깨를 살포시 감싼 채로 몸을 일으켰다.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몸을 일으키던 아줌마가 재차 주저앉는다.

“어, 어떡하지. 다리가 풀려서….”

극도로 긴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가 나를 만나면서 조금 풀린 게 문제가 됐다.

힘없이 주저앉은 아주머니의 다리를 잡아 쭉 뻗게 만든 뒤, 손을 놀려 주무르기 시작했다.

“도, 도진아.”

“이렇게 주무르면 좀 더 나아질 거예요.”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왕복하며 다리를 주무른다.

“으응…!”

기분 좋은 신음이 귀를 간지럽힌다.

“아윽…!”

자칫 잘못하면 오크한테 걸려 목숨을 잃을 상황에서 할 만한 생각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운동을 해온 덕인지 허벅지가 정말 탱탱하다.

적당히 주무른 뒤에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 아줌마를 보았다.

얼굴이 조금 붉어지긴 했지만, 아까보다 한결 나은 표정.

“이제 일어나실 수 있죠?”

“으, 응. 가능할 것 같아.”

아까보다 수월하게 몸을 일으킨다.

“그럼 가죠.”

녀석과의 거리가 조금 전보다 좁혀졌다.

지능은 한없이 낮은 오크지만, 동물적인 감각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다.

조금만 더 가까워졌다간 놈의 예민한 후각에 의해 우리의 위치가 발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지금이에요.”

또 한 번 나무가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원래 있던 자리를 벗어나 녀석이 있는 곳의 반대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헉, 허억…!”

이곳까지 뛰어오느라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탓에 금세 숨이 찼다.

아줌마도 온몸을 조여오는 긴장감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숨이 거칠다.

얼마 더 뛸 수 없을 것 같지만, 괜찮다.

조금만 더 멀어지면 놈과의 거리가 충분하게 멀어질 테니.

서서히 가슴에 들어찬 위협이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즈음.

문제가 생겼다.

“윽!”

흙바닥 위로 튀어나와 있던 나무뿌리에 발이 걸렸다.

신형을 잃은 육중한 몸이 허공에 잠시 떠올랐다가 산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도, 도진아! 괜찮…, 흡!”

놀란 아줌마가 소리치며 내려오다 제 입을 틀어막았다.

꾸아아아아악!

놈의 포효가 들려왔다.

늦었다.

포효가 향하는 방향이 정확하게 이쪽을 향해 있다.

아줌마의 목소리를 들은 게 틀림없다.

“아아…!”

제 입을 막으며 탄식하는 아줌마.

멀리서 달려오는 놈을 보며 여기저기 까지고 상처 입은 몸을 일으켰다.

“그럴 때가 아니에요, 아줌마.”

“도, 도진아. 미안해, 아줌마가 정말 미안해….”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아무래도 자기가 소리 지른 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나 보다.

뭐, 맞는 말이다.

죽을 확률이 매우 높기는 하지.

하지만 난 궁지에 몰렸다고 해서 순순히 죽어줄 만큼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거든.

“제 말 들어보세요, 아줌마.”

“으, 응.”

내 진지한 목소리에 아줌마도 흘리던 눈물을 닦아내며 나를 쳐다본다.

도망치는 건 글러 먹었다.

놈이 우리보다 몇 배는 더 빠를 테니, 금세 잡힐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저 오크, 우리가 잡아야겠습니다.”

직접 잡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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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크, 우리가 잡아야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아줌마의 눈이 당장에라도 앞으로 쏟아져 나올 듯이 커졌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요. 아줌마도 아시잖아요?”

우리 두 사람은 지칠대로 지쳤고, 놈은 쌩쌩하다.

신체적인 차이 또한 어마어마하다.

평범한 달리기로는 놈을 절대로 떼어낼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차라리….”

입술을 꽉 깨무는 아줌마.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차라리 아줌마가 다른 쪽으로 유인할 테니까, 도진이 너라도 도망가렴.”

가족도 아니고 고작 이제 조금 친해졌을 뿐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단다.

거짓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고결한 진심에 새삼 깨닫는다.

이 여자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인가를.

나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같이 죽을까요. 전 아줌마랑 함께라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뭐, 뭣…!”

말문이 막혔는지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는 아줌마.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거짓.

이런 여자와 함께라면 같이 목숨을 잃어도 전혀 억울하지 않겠다는 건 진심이지만, 같이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쉽게 죽어주기는 좀 아쉽잖아요. 제 말 한 번만 따라 주실래요?”

내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아줌마의 눈동자에 빛이 스며든다.

“그래, 네 말대로 쉽게 죽어주는 건 싫으니까. 한 번 해보자.”

난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는 했지만, 타박상으로 몸 곳곳이 욱신거릴 뿐, 달리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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