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하네.”
다시 한번 의지를 담아 손을 휘저었다.
이번에는 손바닥 위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한주희가 그토록 입이 닳도록 말하던 심오한 학문이라는 마법.
그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의지만으로 마력을 가공하고, 변화시키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과연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호기심이 온몸을 벅벅 긁어댔다.
그 순간,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꺼지고, 강렬한 현기증이 덮쳐 왔다.
“윽.”
아주 오래전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다.
몸속에 있던 소중한 무언가가 전부 빨려 나가고 사라져버린 듯한 탈력감과 허탈함.
체내의 마력을 모조리 끌어다 쓰고 나면 발생하는 마력 탈진 증세의 전조였다.
그제야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 새끼…, 아니, 나 마력 1이었지….”
주변의 마력과 동화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쓰이는 것은 내 몸에 있는 마력이다.
콩알 반쪽도 안 되는 마력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불꽃을 피웠으니, 이렇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어우….”
시야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툭, 하고 끊어져 온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 * *
서정희는 어제와 오늘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그것은 조금 전 옥탑방에 세를 내준 김도진이 청소기를 빌리러 찾아왔을 때부터였다.
3년 전, 오갈 데 없는 것이 불쌍해서 싼 월세를 받고 옥탑방에 지내게 해준 아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측은함과는 별개로, 김도진은 굉장히 나태하고, 게으르고, 지저분했다.
한 번 방에 틀어박히면 며칠은 꼼짝도 안 하고 있다가 과자가 떨어지면 슬그머니 인근 편의점에 들르는 게 전부인 아이.
듣기로는 게임을 통해서 약간씩 돈을 벌고 있다는데, 거기까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매주 반찬을 만들어 가져다 줄 때면 비대한 몸집 너머로 보이는 집안 풍경에 놀라곤 했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인지, 돼지우리인지 모를 정도로 어질러져 있어서.
그렇게 무려 3년이 지났다.
인정이 많은 서정희조차 쟤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할 때.
‘도진이가 청소를…?’
어지르기만 하던 아이가 청소를 하겠단다.
‘심지어 유정이 때문에 우리 집에 오는 걸 꺼려하던 아인데….’
매번 만날 때마다 김도진과 동갑내기인 딸이 사납게 구는 바람에 한껏 겁을 먹은 바람에 잘 찾아오지도 않던 아이가 제 발로 찾아오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걸까.’
문득 어제 김도진이 쓰러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 어딘가에 잘못 부딪혔다거나 해서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느 쪽이든 잘된 거겠지.”
언제까지나 자신이 편의를 봐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김도진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 진짜 변하기로 결심한 거라면 그 무엇보다 축하해줘야 할 일이겠지.
“청소는 잘하고 있으려나.”
하도 청소를 안 해서 묵은 때가 엄청날 텐데.
한 번도 청소를 안 해본 아이가 처리하기엔 쉽지 않은 일인데.
어쩌면 청소라는 벽에 가로막혀 변화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안 되겠다.”
쉬는 날이 아깝지만, 3년이나 함께 지내온 가족 같은 아이인 만큼 변화하겠단 의지를 보인다면 도와줘야지.
편안하게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킨 그녀는 곧장 옥상으로 향했다.
한껏 요란한 소리가 들려올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옥상은 고요했다.
“벌써 다 끝냈나…?”
그럴 리가 없는데.
한눈에 봐도 청소를 하려면 최소 하루 이상은 투자해야만 하는 수준의 더러운 방이었는데.
어쩌면 이미 포기한 채로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곧장 철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도진 학생!”
아무런 대답이 없다.
“도진 학생?”
재차 불러보아도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든 그녀가 곧장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잠금장치를 걸어두지 않았는지, 곧장 문이 열렸다.
“도진 학생…?”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와.”
그녀는 조금 감탄했다.
청소가 제법 되어 있었다.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기는 했지만, 발바닥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더러웠던 방바닥만큼은 합격점을 줄 만했다.
“도진 학생?”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야에 김도진이 들어왔다.
한쪽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
“어머, 혹시 잠든 건가?”
저 무거운 몸으로 방바닥이 이렇게 깨끗해지도록 쓸고 닦았을 테니, 피곤했던 걸까.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도진 학생, 그렇게 자면 허리 나빠져.”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지만, 김도진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녀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도진아?”
다시 한번 부르며 조금 더 강하게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털썩!
벽에 기대어 있던 김도진의 몸이 옆으로 그대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도, 도진아!?”
놀란 그녀가 황급히 어깨를 붙잡고 뺨을 두드려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다.
어제도 쓰러지더니, 오늘도 쓰러졌다.
어쩌면 큰 병이 생긴 것은 아닐까.
“어떡해…! 어제 병원에 데려갔어야 하는 건데!”
김도진이 쓰러진 게 자신의 탓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제 곧장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데려가 의사한테 보여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또 쓰러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1, 119.”
그녀는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어 소방서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행복 빌라 옥상인데요, 사람이 쓰러졌어요! 빨리 구급차 좀 보내주세요!”
구급대원이 전화상으로 알려주는 응급처치를 차근차근 따라하고 있을 때, 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곧장 밖으로 나가 빌라 앞에 선 구급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 여기에요!”
신체가 건장한 구급대원들이 올라와 육중한 그의 몸을 들것에 실었다.
그녀는 쓰러진 김도진과 함께 구급차에 올랐다.
가족이 없는 도진이었기에, 자신이 보호자로 따라가야만 했다.
인근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의사가 다가와 쓰러진 그를 진료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의사가 커다란 기계를 가지고 오더니, 기계에 달려 있던 고리를 손과 발에 걸었다.
잠시 후, 기계에서 종이 한 장이 뽑혀 나왔다.
“서, 선생님. 어떤가요?”
그녀가 다급한 마음에 의사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묻자,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마력 탈진 증상이네요.”
“예에…? 마, 마력 탈진이라고요?”
그녀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마력 탈진이라니, 그것은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각성자 또는 헌터들이 체내의 마력을 무리하게 사용할 때 발현되는 증상 아닌가!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도진이는 각성자가 아니에요, 선생님.”
그녀가 말하자, 의사는 조금 전 기계에서 뽑혀나온 종이를 보여주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결과지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김도진 환자의 체내에서 희미한 마력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각성자가 아니라면 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 그럴 수가.”
충격적인 결과에 그녀는 황망해진 눈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김도진을 바라보았다.
각성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걸까?
‘아니, 그건 아니야.’
오래전부터 숨겼다면 이렇듯 갑자기 마력 탈진 증상으로 쓰러질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에 각성을 경험하게 됐다는 얘긴데.
“아!”
문득 어제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진 김도진의 모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각성자들은 하나 같이 특성을 몸에 새길 때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쓰러진다고 하던데.
‘혹시 그게…?’
각성의 전조 현상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그래, 그래서 그랬던 거야.’
뜬금없이 변화를 꾀하듯 청소기를 빌리러 온 것도 이해가 간다.
각성자가 되었으니 어떻게든 새롭게 출발하고자 마음을 먹었던 거겠지.
마력 탈진 증상이 일어난 건 자신의 특성을 시험해 보려다가 그렇게 된 것일 테고.
뒤죽박죽 섞여 있던 퍼즐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아무튼 크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니 마력 수액만 맞으면 금세 정신을 차릴 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간호사가 그의 팔에 카데터를 꽂고, 수액을 연결한다.
서정희는 그의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김도진을 바라보았다.
‘설마 도진이가 각성자가 될 줄이야.’
각성자는 특성과 상태창을 부여받고 인간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자격을 갖춘 이를 뜻한다.
온갖 이형의 괴물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이들.
동시에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는 던전을 공략하고 보상을 손에 쥘 수 있는 헌터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기도 했다.
각성자가 얻는 특성은 광범위하다.
전투에 적합한 특성이 있는가 하면, 후방 지원에 적합한 능력도 존재했고, 심지어 생활에 오히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특성이 존재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모두가 헌터가 될 수는 없었다.
파멸적인 난이도의 헌터 시험을 통과해야만, 각성자들 중 극히 일부만이 헌터가 될 수 있다.
“혹시 헌터가 되고 싶었던 걸까….”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살포시 닦아주는 서정희.
그랬을지도 모른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고아원에서 학대당하며 살아온 제 삶을 펼 수 있는 수단은 그것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일지도.
그의 속내는 짐작할 수 없다.
3년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지냈지만, 방에 틀어박혀 혼자 시간을 흘려보낼 뿐, 자신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마음을 내주지 않는 아이였기에.
‘깨어나면 알게 되겠지.’
그녀는 의자에 앉아 김도진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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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에서 미약하게나마 마력이 조금씩 흘러들어오고 있는 게 느껴진다.
“끄응.”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흰색 커튼과 팔에 꽂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수액이 보인다.
마력 탈진에 걸린 이들에게 처방되는 각성자 전용 수액.
“아, 마력 탈진….”
마력을 내 의지대로 다룰 수 있다는 충족감에 사로잡혀 깝치다가 쓰러졌던 게 기억났다.
궁금증이 남는다.
누가 날 데려왔지? 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오….”
아줌마가 의자에 앉아 내가 누운 침대 구석에 몸을 엎드린 채 잠들어 있다.
어쩌다 내 방에 올라와서 쓰러져 있는 날 발견한 건진 모르겠지만.
이번이 두 번째다.
두 번 쓰러지고 일어나서 아줌마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까, 음.
“묘하네….”
챙겨지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내가 바라던 게 이런 건데.”
챙겨주고, 챙겨지기를 바랐을 뿐이다.
한쪽이 아프면 옆에 앉아 손을 꼭 잡아주고, 힘들 때면 어깨를 토닥여주고, 기쁠 때면 서로를 껴안은 채 두 배로 만끽하는.
부부이기에, 가족이기에 응당 나눌 수 있는 감정의 교류를 바란 게 그리도 큰 죄였던가.
“으음….”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던 아줌마의 몸이 서서히 솟구친다.
졸린 눈을 비비며 작게 입을 벌려 하품하던 아줌마와 내 눈이 마주쳤다.
“어머, 도진아. 깼니?”
“하하…, 네. 아줌마가 절 병원에 데려오신 건가요?”
걱정어린 눈빛이 이쪽을 향한다.
“그래. 청소나 도와줄까 싶어서 올라갔는데 쓰러진 널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그때가 떠올랐는지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줌마.
그러다 별안간 새초롬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런데 도진이 너, 각성했니?”
“아, 그….”
이 몸의 원주인 김도진이 각성한 것은 불과 며칠 전.
아줌마가 모르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혹시 저번에 아줌마 앞에서 쓰러졌을 때야?”
좋은 변명거리가 먼저 건네졌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아요. 그때 갑자기 통증이 쫙 퍼지더니 깨어나고 보니까 각성했다고 뜨더라고요.”
“역시! 그랬구나.”
이미 내가 깨어나기 전에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그렇게 아귀를 맞춰둔 듯했다.
그럼 나야 고맙지, 뭐.
“그래서 달라지려고 마음먹은 거니?”
“네. 저도 언제까지 그러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변화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사실이니까.
아줌마의 얼굴이 환희로 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