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양반이 나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참 많이도 가르쳐준 삼촌 같은 양반이라, 가는 길을 지켜보기 위해 찾아갔는데 그때 그러더라.
죽을 때가 되니 체력 스텟이 1이 됐다고.
이놈의 체력이 2인 걸 보면, 이대로 살았다간 얼마 안 있어 죽을 거란 암시가 아닐까.
“대단하다, 대단해.”
놈이 눈앞에 있다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
어디가 크게 아팠거나, 이상한 부분 없이 신체 건장하게 태어나서 오직 먹고, 자고, 게임하고는 개 같은 생활 패턴으로 체력을 여기까지 떨군 거다!
이 정도면 업적으로 인정해줘도 되지 않을까.
“놀라운 건 여기까지가 에피타이저에 불과했다는 거지.”
진짜는 특성과 그 아래 줄줄이 나열된 말도 안 되는 거래 조건이다.
내 몸을 통째로 앗아간 SSS급 능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살다살다 특성칸이 비어 있는 건 처음 보네.”
특성 없는 각성자라니.
그야말로 팥 없는 찐빵, 속 빈 강정, 알 없는 게장이 아닌가.
“이 자식은 대체 왜 SSS급 특성을 버리고 내 몸을 가져간 거야?”
안다, 내 마누라 때문이라는 거.
그래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내 마누라가 예쁜 건 맞지만, 이 정돈 아닌데….”
한주희.
정말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다.
타고난 아름다움, 방대한 마력 그리고 꾸준한 관리까지.
삼박자가 모두 이루어져 40대 중반을 넘었음에도 20대 미녀와 견줄 만한 수준인 건 맞다.
맞는데….
냉정하게 얘기해서 그녀보다 예쁜 사람? 많다.
대한민국에도 제법 있고, 세계를 뒤지면 더 많다.
“햐, SSS급 능력이면 세계 헌터 랭킹 1위도 가능했을 것 같은데.”
고작 S급 특성을 가진 놈들끼리 1위 자리를 두고 박터지게 싸우고 있는 와중에 SSS급 능력자가 나타난다?
조금만 성장해도 순식간에 서열 정리를 끝마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세계의 온갖 미녀란 미녀들이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달려들 텐데.
그 모든 걸 마다하고 한주희라는 여자 하나를 위해 내 몸을 빼앗았다.
“이 정도면 순애로 인정해줘야 하나.”
순애는 개뿔.
애틋한 것 같다가도 괘씸하고, 이 몸의 원주인이 등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냥 시야가 좁아져서 별생각 없었던 거겠지.”
아무튼 안타깝고, 원통하다.
SSS급 특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딱 5년 안에 현재 세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양키 헌터놈 멱살을 잡고 곧장 2위로 주저앉혔을 텐데.
아무튼.
이대로 특성이 없는 채로 살아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특성칸이 비어 있는 게 하도 신기해서 툭 건드려 봤더니, 묘한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능력이 육신에 온전히 정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한 거래를 성립 시켰습니다.]
[영혼과 육체의 극명한 괴리로 인해 특성이 삭제되었습니다.]
[사용자에게 걸맞는 새로운 특성을 탐색합니다.]
[앞으로의 모든 행동이 특성 탐색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
한마디로 이놈의 몸뚱어리와 영혼이 달라져서 새로운 특성을 찾아줄 테니 기다려라, 이거다.
거기에 덧붙여 앞으로 내 행동에 따라 특성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거고.
남은 시간이 ‘???’로 표시되는 걸로 봐선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적당히 여유를 가진 상태에서 기다려 봐야겠지.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하는 시간이 생겼다.
상태창 맨 아래쪽에 적힌 거래 조건들 때문에!
“이상한 데에서 꼼꼼하네, 자식이.”
상호불가침과 발설 금지.
한마디로 자기 만나러 올 생각하지 말고, 남한테 몸 바뀌었다고 떠벌리지 말라는 거다.
무시하면 어떻게 되나 싶어서 한 번 찾아가야겠다, 마음먹으니 곧장 메시지가 떠오르더라.
[상호불가침 조건이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마주칠 경우, 이를 계약 위반으로 간주합니다.]
[이를 어길 시, 사망합니다.]
[우연찮게 마주칠 경우, 아는 체하지 말고 지나쳐가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간단명료하고, 무섭다.
따지러 가는 순간 죽이겠다는 말이잖아, 이건.
심지어 우연찮게 마주치게 돼도 아는 체하지 말고 지나쳐가란다.
“입이 방정이지.”
이 모든 건 놈에게 건넨 내 말로 인해 벌어졌다.
뜬금없이 몸을 바꾸면 어떻겠냐기에, 딱 봐도 자존감이 낮아 보이는 청년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 몸보다 젊음이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얘기해줬는데, 그게 화근이 됐다.
그 말로 인해 내 몸뚱어리는 이놈보다 가치가 떨어지게 됐고, 그 차이를 메꾸기 위해 놈은 저 말도 안 되는 조건들을 줄줄이 달아놓을 수 있게 됐다.
“최소한 3년은 이 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건데….”
적게 잡아서 3년이다.
그마저도 거래 조건이 풀리는 순간일 뿐이라, 놈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보는 게 맞다.
“흐음.”
기분이 묘하다.
강제적으로 몸을 빼앗기고 들어앉은 몸이다.
억울해야 마땅한데.
“아, 왜 자꾸 웃음이 나오냐.”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도무지 지울 수가 없다!
“우헤헤헤헤!”
원래의 몸은 서류가 남아 있지 않다 뿐이지, 해선 안 될 것들이 참 많았다.
헌터의 아이콘이나 다름없었기에 어딜 가도 매너 있게 행동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집에서는 자유롭게 있을 수 있냐? 그것도 아니다.
웃통만 까고 다녀도 품위 없게 무슨 짓이냐고 긁어댄다.
지금처럼 경박하게 웃는 것도 마찬가지.
상류층에 걸맞는 품위와 양식을 갖춰야 한다며 미친 듯이 쪼아댔겠지.
“아, 진짜. 난 이딴 몸에서 살기 싫은데.”
스무 살이라는 것만 빼면 아무런 장점도 없는 몸.
미친 듯이 뚱뚱하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이런 비루한 몸으로 살아야 한다니!
“하아, 어쩔 수 없지. 계약은 계약이니까….”
만나면 죽인다는데 어쩌겠어.
그냥 꾹 참고 사는 수밖에.
“스무 살이라.”
나와는 정반대로 살아가던 S급 헌터 놈들의 이야기가 귀에 꽂힌다.
욕망대로 사는 게 무슨 죄냐고.
“없지, 응.”
욕망 표출하며 사는 게 죄가 되는 세상은 지난 지 오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놈들을 싫어했던 건 그저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고 사는 놈들이 부러워서였다.
뼈 빠지게 던전 돌고 돌아와 넓은 식탁에 홀로 앉아 밥 먹는 내 모습이 처량하다는 걸 곧 죽어도 인정하기 싫어서 놈들을 싫어했던 거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그랬으면 어땠을까?’하는 식의 작은 욕망만이 전부였던 늙은 몸뚱어리와는 달리, 이 몸은 그야말로 온갖 욕망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더 이상 그런 욕망을 추잡하게 여기며 막아서지 않아도 된다.
왜냐고?
“이 몸은 마누라도, 딸도 없으니까!”
속이 다른 사내와 살게 될 마누라나 딸이 걱정되지 않냐고? 응, 걱정 안 된다.
7년째 손 한번 못 대게 하는 마누라, 나와의 만남 자체를 피하는 딸내미.
두 사람은 속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밀어내느라 바쁠 거다.
“불쌍한 놈.”
갑자기 내 몸을 빼앗아간 녀석에게 측은지심이 느껴진다.
공식 석상에서 잉꼬부부를 연기하는 우리 모습 때문에 몸을 바꾸기로 결심한 걸 텐데.
이를 어쩌나.
“지금쯤이면 알아차렸겠지.”
우리 부부는 하루에 대화 한마디 섞기도 힘든 부부라는 걸.
절규하고 있을까, 발악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미 내가 다 해봤으니까.”
그래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
두 여자 앞에서 울어도 보고, 간곡히 부탁도 해봤다.
근데 씨알도 안 먹혔다.
오히려 왜 그런 식으로 자기들을 나쁜 사람으로 매도 하냐며 핀잔을 들었다.
솔직하게 내 심정을 털어놓는다.
“생각해 보니까 그놈이 아니라 그분이라고 불러야겠네.”
늙어가는 몸뚱어리와 인기라는 이름 뒤에 숨은 수많은 책임과 의무.
길 가다가 침 한번 잘못 뱉어도 곧장 뉴스 기사에 오를 정도로 관심받는 삶.
그 모든 걸 가져가고, 내게 젊음과 자유를 주셨으니 말이다.
“고맙습니다, 손시우 씨.”
우리 집이 있는 방향을 가늠하여 육중한 몸으로 큰절을 올렸다.
“부디 잘 사십쇼. 과거는 그리워하지 마시고. 제가 기도 많이 하겠습니다.”
나는 그저 바랄 뿐이다.
그러한 인생이, 녀석…, 아니, 그분의 체질에 맞는 삶이기를.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한 탓인지,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손시우로서 생각하는 건 딱 오늘 밤까지다.
눈이 완전히 감기고 잠에 곯아떨어진 뒤, 내일의 아침을 맞이한 나는.
“나는 김도진이다…, 나는 김도진이다….”
김도진이라는 이름으로 살 것이다.
착한 척 가식은 개나 줘 버릴 거고.
남을 위하는 삶은 개한테도 주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릴 거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모두 누리고, 욕망이란 욕망은 모두 충족시키며 살 테다.
“아이, 씨.”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상황에서 왜 눈물이 나냐.
마지막으로 한 번쯤, 마누라하고 딸내미 얼굴이 보고 싶다.
매몰찬 여인들을 뭐가 좋다고 새출발 다짐하는 와중에 보고 싶다는 건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이제부터 이 몸으로 그걸 제대로 알아보려고 한다.
그렇게, 급속도로, 잠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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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전에 잠에서 깼다.
조금 많이 잔 것 같기는 하지만, 몸뚱어리가 몸뚱어리인 만큼 어쩔 수 없겠지.
“아우, 무거워.”
이불 위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것조차 버겁다.
120kg이라는 몸무게가 확실하게 체감된다.
“살부터 빼야겠지.”
내 목표는 오직 하나다.
스물의 젊음을 제대로 만끽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살부터 빼야지 싶다.
“이 몸뚱어리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키와 몸무게의 차이가 숫자로 고작 40밖에 차이가 안 나는 게 말이나 되냐고.
“끙차.”
매일 같이 깔아두었던 이불을 개고, 방구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널린 과자 봉지들.
이 몸의 주인이 얼마나 게을렀는지를 알려주는 흔적들을 하나둘씩 주워담는다.
“허억, 허억…, 미친….”
미치겠다.
이 좁은 방구석 조금 돌아다녔다고 숨이 차냐.
“끄응.”
이 선선한 날씨에 땀이 줄줄 흐른다.
커다란 몸 때문에 사정없이 늘어난 회색 티셔츠가 땀에 젖어 짙어져 간다.
“후우….”
큼지막한 것들은 다 치웠고….
“청소기가…, 있을 리가 있나.”
청소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자식이 방에 청소기를 사두었을 리가 없지.
“아줌마한테 빌려달라고 할까.”
아래층에 살고 있을 아줌마라면 청소기쯤은 빌려주겠지.
슬리퍼를 신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한 계단, 한 계단 내디딜 때마다 무릎이 후들거린다.
“미치겠네, 정말.”
상체와 허벅지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릎과 주변 인대들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이쯤 되니 확신이 든다.
이 몸의 원주인이 내 몸을 빼앗지 않고 그대로 살았으면 빠른 시일 내에 죽었으리라는 걸.
“사람 하나 살린 셈치자….”
당장에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은 위험한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고작 한 층, 한 층 내려오는데 초도 아니고 분 단위가 걸렸다.
이 몸으로 스무 살을 즐기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휴우.”
이마에 흐른 땀을 팔로 대충 닦아내고 주인 아주머니가 살고 있는 집의 문을 두드린다.
텅텅!
“아주머니, 저 도진인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안쪽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잠금쇠가 열리고, 문이 열렸는데.
“야, 돼지. 누가 우리집에 함부로 오래?”
아줌마가 아닌 아줌마 딸내미가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고 비딱한 시선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목까지 내려오는 금색 똑단발, 이쪽을 푹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 으르렁거리는 입.
잠들어 있던 기억에서 빠르게 정보를 뽑아낸다.
신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