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12장-의사
"으극.. 으그극.."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암흑으로 물들었던 정신에 조금씩 불이 들어오면서 나는 간신히 현실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쓰러질 때는 이대로 죽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 쓸데없이 튼튼한 몸뚱이는 나를 쉽게 죽게 내버려두질 않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딜도 역할이나 하라고 하는 걸까.
-움찔.. 움찔..
'최소한 자고 일어나면 회복은 돼야 하는 거 아니야..?!'
대체 쾌락이 얼마나 강했던 건지 아직도 여파가 몸에 남아있다.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면 hp와 mp는 다 회복시켜 줘야하는게 최소한의 상도덕 아닌가.
도트대미지는 남아있는 판정인가?
아니 애초에 여기가 게임이 아닌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여유가 없으니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나온다.
...근데 이건 진짜 따져야겠는게.
'대체 사람 몸이 왜 이딴..'
알아가면 알수록 이 몸은 섹스 외에는 쓸모가 없다.
일반인 여자도 못이기는 신체 능력에 그 천마도 보고 첫눈에 반할 정도의 외모. 거기에 이상할 정도로 민감한 감도와 그 끝을 모르겠는 정력이 합쳐지면 뭐가 나오겠는가.
그냥 살아 움직이는 최상급 딜도였다.
정말 그냥 여자한테 따먹히라고 등을 떠미는 수준.
천지신명님이 구해주신 거랑 천기 읽는 능력을 주신 건 고마운데 왜 하필 이런 몸으로 빙의시켜주신건지는 정말 따질 부분이 많았다.
막 짱짱쎄고 무공도 잘 익히고 그런 몸까진 안 바래도 그냥 적당히 평균 정도 몸으로 해주면 안됐나?
아니면 그냥 지구에 있던 시절 몸으로 환생 시켜주는 건..
'...그 몸도 딱히 좋은 몸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한테 기억이 없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성녀님의 주장 대로면 지구에서도 딱히 평온하게 살았던 건 아니라고 한다.
본인 말로는 본인이 구해준 거라고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원.
'...그래서 여기가 어디지.'
내 처지에 대해 불평하다 슬슬 회복되기 시작한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옷은 천마가 줬던 소교주의 신분을 증명하는 옷이라고 했던 옷이 그대로 입혀져 있었고
깔고 있는 침대가 푹신한 걸 보면 침실로 추정되는데 방의 분위기를 보니 아직 천마의 거처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 아까 천마랑 뒹굴면서 맡았던 냄새랑 비슷한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아마 본인이 쓰던 침대인 것 같고.
거기에 묘하게 몸에서 뽀송뽀송한 느낌이 나는 게 아무래도 쓰러진 동안 천마가 내 몸을 씻겨 놓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챙겨주는구나.
혹시 쓰러졌는데 무시하고 계속 강간하다가 깨어났을 때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면 꽤 상처 받았을 지도 몰랐는데 다행이었다.
무려 그 천마가 몸을 씻겨준다는 봉사를 직접 못 본 건 조금 아쉽지만.
진짜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일텐데 다른 남자들은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면 부러워하지 않을까.
'...퉷.'
남들이 보기엔 호사스러운 인생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이쪽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다.
섹스하다가 쓰러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내가 망가질까 안 망가질까 매일 걱정하면서 지내는 삶이다.
가끔 내가 인격체가 아니라 딜도처럼 다뤄지고 있다는 느낌이라도 받으면 눈물까지 날 정도.
나름 내가 몸밖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사는 삶이었다.
부끄럽고 싫지만 가끔씩 애교를 부리는 이유도 그런 맥락이었다.
딜도가 애교를 부리진 않을 테니.
그래도 나라는 인간이 인격체로서 쓸모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부분이랄까.
...쓸모를 증명하는 방법이 애교라는 게 참 울고 싶어지지만 아까 흘러나온 뒤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닦으며 마음을 추스른 뒤 방금 전 있던 일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삽입은 아니고 유사성행위긴 했지만 나름 천마와의 첫 경험이었으니 앞으로 그녀와 지내려면 제대로 분석해서 공략법을 준비해야 했다.
우선 시작하게 된 계기는 별거 없었다.
그냥 둘 다 취해서 이상한 짓을 하다가 그대로 분위기에 이끌려서 일어난 일이었고 서로 즐겼으니 강간 같은 것도 아니었다.
첫 단추는 잘 낀 것 같았으니 이건 넘어가도 될 것 같고.
예상했던 대로 처녀도 맞았다.
남자의 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던 데다 테크닉도 솔직히 내 몸이 워낙 민감해서 그렇지 능숙한 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테크닉이 늘어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는 것.
자지를 몇 번 핥아보더니 금세 내 약점들을 파악하곤 어떻게 핥아야 정액이 더 많이 나오는지 순식간에 터득해나가기 시작했다.
기절하기 직전 시점에서 그 정도 테크닉이면 거의 당아영의 목 끝까지 따라온 정도.
-부르르..
하루도 아니고 고작 몇 시간 만에 그 정도로 늘어나면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건지 두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처녀 특유의 어리숙한 테크닉을 보고 적어도 한동안은 조금 여유가 있겠구나 했는데 당장 이 정도 테크닉이면 숨도 못 쉴 정도로 쥐어짜일 수 있는 레벨이었다.
지금 내가 그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천마가 성욕이 당아영 만큼 많지 않을 거라고 기도하는 것 뿐..
'응. 글렀네.'
이미 천기 안에서 보고 나왔다.
기대하긴 글렀다.
그냥 살살 해달라고 애원이나 하는 수밖에.
내가 그렇게 좆됐음을 실감하고 있는 와중 방 한구석에 있는 문이 열리며 안에서 천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일어났나."
"...씻으셨습니까?"
"그대를 씻기는 건 금방 되던데 본녀는 꽤 걸리더구나. 특히 머리카락에 묻은 정액을 떨어트리는 게 쉽지 않았어."
"...아."
그건 오래 걸린다고 들었다.
그래서 당아영이 웬만해선 다 삼키려고 노력했던 거고.
...그런데 잠깐만.
"...하늘이시여. 제가 지금 기억이 완전하지 않아서 그러는데 질문 좀 해도 되겠습니까?"
"무엇인데 그러느냐."
"그.. 제 정액은 다 삼키셨던 겁니까? 양이 꽤 많았을텐데."
생각해보니 천마가 처음에 아예 입으로 막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곤 정액을 삼키다 뱉거나 아예 밖으로 튀는 모습을 못 봤었다.
그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닐텐데?
자랑은 아니지만 이 쓸데없이 정력이 좋은 몸뚱이는 사정량도 많아서 당아영마저도 가끔씩 실패할 때가 있는데 그걸 방금 전까지 처녀였던 사람이 해냈다고?
"음.. 양이 적진 않았지만 그게 문제가 있나? 그대의 말과 달리 맛도 꽤 괜찮았고."
"..."
이 사람도 여소천 과였던 모양이다.
그걸 다 삼킨 건 어..
술을 워낙 많이 마셔서 식도가 단련됐다거나 그런 거 아닐까.
아무튼 이건 이렇게 넘어가고
"...그러면 다른 질문입니다만."
"말해 보거라."
"...왜 옷은 안 입고 계십니까?"
나는 천마의 옷차림을 지적했다.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외 호텔 같은 데서 쓰는 커다란 수건 있지 않나.
그걸로 몸을 가리고 방금 전 방에서 나온 상황이었다.
옆 방 안쪽에서 보인 수증기와 몸에 묻어있는 물기에서 지금 씻고 나왔을 거라고 추측한 거고.
"그야 방금 씻고 나왔으니 이런 차림인 것 아니겠느냐. 옷은 아까 그대가 내 몸을 핥는 동안 더럽혀져서 당장 입을 수 없는 상황이고."
아.
내가 당연한 사실을 듣고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 하게 있는 사이 천마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스륵
"혹시 이 안이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면 마음껏 봐도 좋다만."
"우와아아악!!!!"
내 표정을 잘못 이해했는지 그대로 수건을 벌려버리는 모습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옆에 있는 이불을 집어 앞을 가렸다.
잠깐 스쳐 지나간 걸로 봤을 때 피부가 완전히 하얀색이었다.
속옷 하나도 안 입고 있는 진짜 알몸이란 말이다.
"빠, 빨리 다시 가리십쇼! 외간 남자 앞에서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이제 곧 부부가 될 사이인데도?"
"그, 그런 사이여도 안되는 건 안되는 겁니다! 침대 위에서라면 모를까 그렇게 대놓고 몸을 노출하는 건.."
"호오."
...아.
또 말 실수했다.
"그, 그! 침대 위라고 했던 건 정말 물리적으로 침대 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풀썩!
"꺄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누가 보면 위험에 빠진 소녀인 줄 알겠구나. 뭐, 본녀는 그대라면 성별이 어떻든 상관 없었겠지만."
내 말을 들은 천마는 그대로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침대 위로 몸을 올렸다.
올라오자마자 수건은 아예 옆에 내팽겨친 상황.
필사적으로 이불을 끌어올려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침대에서 전해지는 무게감을 통해 천마가 지금 내 다리 사이에 와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튕기는 건가. 이미 일선을 넘은 사이끼리."
"아, 안 나와요! 이제 안 나와! 못해! 적어도 하루는 쉬어야..!"
"그 말 참인가?"
-멈칫.
"만약 더 낼 수 있다면 어떻게 책임질 거지?"
"..."
"본녀는 거짓말을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씨."
나는 필사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던 이불을 다시 침대에 내려놨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이불이 사라지자 천마의 새하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나고 이미 반쯤 몸을 세우고 있던 아들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너무 그렇게 튕기기만 하지 말게. 본녀에게 몸을 바치겠다고 한 건 그대 아닌가."
"...그래도 상냥하게 해주시길 바랬어요."
"그건 그대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겠지."
-스륵
천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 턱을 잡더니 눈을 마주쳤다.
"아까 그대가 했던 말 중에 궁금한게 있는데.. 그대가 내게 바친 건 정확히 말해서 '그대'였지."
"...그랬죠?"
"몸은 당연히 포함되는 것일 테고.. 그곳에 마음도 포함되나?"
"...원하신다면요."
"그렇다면 본녀가 약속 하나 하지."
-텁
천마가 침대를 짚고 있던 손을 움직여 내 손을 잡더니 그대로 깍지를 꼈고
"그대가 본녀에게 주는 마음만큼은 절대 배신하지 않고 그대를 대해주겠다고."
"..."
"그대를 바치겠다곤 했지만 아직 그대가 본녀에게 별로 마음이 없다는 건 알고 있네."
-흠칫.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절로 몸을 움츠렸다.
"그대를 탓하는 건 아니야. 그대와 본녀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 직전의 애인들까지 있던 남자가 바로 다른 마음을 품겠나. 오히려 바로 변하는 것이 이상하겠지."
"그.."
"하지만 그대가 본녀에게 마음을 주는 만큼 본녀도 그대에게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하지."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대로 멈춘 상태로 그녀의 눈을 마저 바라봤다.
항상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의 그녀였지만 이번 말 만큼은 거짓이나 기만이 아니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꼬옥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은 물론이고.
"..."
"바로 대답하진 않아도 되네. 시간은 많지 않나. 그대도 아직 본녀에게 궁금한 게 많을 테니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여보?"
"..."
반쯤 농담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천마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한 10초정도 있었을까
"...싫은 호칭은 아니지만 이전에 부르던 호칭을 써줬으면 좋겠군. 그 호칭도 나름 그대가 지어준 애칭 아닌가."
"...알겠습니다 하늘이시여."
아무래도 천마는 간신히 무언가를 참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방금 큰일 날 뻔 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나는 조용히 천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면.. 그대의 의사도 확인했으니 이것부터 해야겠군. 아까부터 거슬렸거든."
"...?"
천마는 살짝 인상을 지으면서 내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내 머리에 뭐가 묻기라도 했나 싶어 고개를 올려 천마의 손이 향한 곳을 바라봤고
-쨍강!
"그대는 본녀의 것이라면서 혼에 무슨 이상한 짓을 해 놓은 건가."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이제 거의 익숙해졌던 영혼에 잠긴 자물쇠가 깨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