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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245화 (245/250)

[245화] 12장-주당

천마의 말을 거절할 명분도 힘도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반쯤 체념한 상태로 천마가 건네준 옷을 입었다.

사실 입을 때 별로 기대를 안 했던 게

내 체형 상 웬만한 성인 남성들이 입는 옷은 제대로 입질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 안에서나 밖에서나 스승님이 만들어준 옷을 계속 빨아서 입고 옷을 빨래 중이거나 불가피하게 다른 옷을 입어야만 하는 상황에선 조금 사이즈가 작은 옷을 찾아서 입는 식으로 해결했었는데..

"...맞네요?"

"다행이군. 눈대중으로만 봐서 확실하진 않았거든."

"...예?"

"무인에게 상대의 체형을 파악하는 건 중요한 일이네."

...딱 맞는 옷을 보며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심지어 이 옷 미리 준비한 거다.

내가 그 잠깐 여소천을 만나러 갔다 온 사이에 없던 옷을 만들진 못했을 테니 그 전부터 미리 준비해둔 옷일텐데 그게 내 몸에 딱 맞는다고?

'대체 뭘 준비해 놓은 거야..?'

점점 천마에 대한 이미지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아니 뭐 어차피 반년 안에 오긴 했어야 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를 바치겠다는 파격적인 거래를 하진 않았을 텐데

먼 미래를 보고 준비를 해 놓은 건지.. 반년 안에 들렀을 때도 쉽게 보내줄 생각이 아니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마냥 웃을수만은 없었다.

'...마교 소교주라..'

정말 말도 안되는 직책이다.

원래 소교주라는 게 교주의 직계 혈족이나 그게 아니더라도 교주의 후계자를 자처할 자격이 있는 직책인 건데 그걸 내가 맡게 되다니.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엄청나게 살벌한 직책이었다.

낙하산도 적당히 해야지 무공 하나 안 익힌 것도 모자라서 일반인 중에서도 최약체인 신체 조건으로 마교의 소교주?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했다간 목이 썰리는 수가 있었다.

...그 농담 같지도 않은 상황이 지금 내 상황이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려고 해도..'

그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게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마교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

기본적인 질서는 있더라도 결국 힘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인만큼 그녀의 말에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런데 저는 무슨 명분으로 소교주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까?"

"음?"

"신교의 하늘께서 임명한다고 하신다면 불만을 제기할 자가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대의명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까."

"뭐 그야 당연히 본녀의 남편 아니겠나."

"...그렇습니까."

어렴풋이 예상한 대답이 나오자 놀란 감정보단 한숨이 먼저 나왔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구나. 방금 전까진 깜짝깜짝 놀라더니."

"...처음 만나셨을 때부터 그 정도로 티를 내셨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부족하진 않습니다."

"아쉽구나. 그대는 놀라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

-움찔.

순간 미래의 천기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나서 몸이 살짝 떨렸다.

아무래도 그 이상한 성격은 실제 성격인 모양이었다.

"소교주라는 직책이 부담이 가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본녀가 갑자기 봉변을 당할 일도 없고 어차피 본교의 업무는 군사가 전부 처리하거든. 그대가 할 일은 임명식에서 모습을 비추는 것 이후로는 딱히 없을 거야."

"원래 교주가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 아닙니까?"

"선대들께서도 정도만 다르지 다 비슷한 처지였을 거다. 수련하기 바쁜 마당에 한가하게 서류 더미나 들여다보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겠나."

'...정작 자기는 방안에서 술만 퍼마시고 있으면서.'

"그래도 선대들보다 강하니 걱정하지 말게."

"?!"

"아. 딱히 생각을 읽은 건 아니야. 의도하지 않아도 가끔씩 '들려'버리거든. 원하는 대로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니 그렇게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되네."

경악할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생각을 읽는 게 무의식적으로 된다고?

이게 뭔..

"자 자.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두고 이제 부부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지 않겠나."

-흠칫

내가 당황한 채로 있자 천마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엔 싫증났는지 내 한쪽 팔을 덥썩 잡았다.

'...드디어 올게 왔구나.'

아직 식도 안 올렸는데 부부라니 진도가 조금 빠른 것 같긴 하지만 호칭만 그렇게 하는 거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나를 바치기로 한 이상 그런 관계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는데 그거 조금 태클 건다고 달라질게 뭐 있겠는가.

내 팔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에 나는 눈을 꼭 감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 살살 해주.."

"자. 저번에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술들이네. 본교의 창고에 있는 귀한 술이란 전부 맛볼 수 있도록 준비해놨지."

"에?"

당황하며 눈을 뜨자 그곳엔 저번에 사용했던 탁자와 그 옆에 수없이 많이 준비되어있는 술잔이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비록 저번엔 그대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서 끝을 보지 못했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도 없으니 한번 끝장을 봐보도록 하지. 특별히 본녀도 내공으로 취기를 중화시키지 않을 테니 누가 진짜 주당인지 한번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뤄보자꾸나."

천마는 탁자와 술잔을 가리키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정말 순수하게 기대된다는 감정이 느껴지는 눈빛.

"...부부..가 해야 할 일이 이것이었습니까?"

"음? 당연히 부부가 처음 만났다면 사이를 돈독게 하는 것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그, 그렇..죠.. 아하하.."

왜 당연히 바로 침실로 직행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계속 천기 안에서 봤던 이미지와 겹쳐 보여서 헷갈리는 것 같은데 애정이 조금 무거울 뿐이지 지금은 처녀 아닌가.

누가 보면 내가 하고 싶은 걸로 오해하겠다.

침대 위로 올라가는 순간 무자비하게 겁탈당할 게 뻔한데 그런 걸 누가 좋아한다고..

"자, 무슨 술부터 먹어보겠나? 저번에 맛봤던 술들도 있으니 혹시 기억나는 것 있으면 말해보게. 어차피 이제 돌아갈 곳도 없으니 몇날며칠동안 술만 마셔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나."

천마는 우선 나를 탁자 앞에 앉혀 놓고 옆에 있는 술을 몇 병 들어 올렸다.

"술.."

그리고 그 말에 천마를 향해 올라가 있던 마음속의 가드가 조금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술 정도는 괜찮지 않나?

애초에 서로 잘 맞는다고 느꼈던 이유가 취미가 맞아서였고..

당장 침실로 안 갔다 할 뿐이지 어차피 몸도 바치겠다고 아까 선언한 지 오래였다.

만약 이대로 술을 마시다가 언제 그녀가 내 양팔을 잡고 바닥에 짓눌러버려도 내게 거부할 권리는 없는 상황.

'즈, 즐겨도 되겠지?'

그러니까 이건 내가 유혹에 굴복한 게 아니다.

어차피 내줘야 할 거 나도 즐길걸 즐기겠다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원래 10만원짜리 과금 패키지를 7만원으로 할인할 때 사면 3만원 이득인 것과 비슷한 것 아닌가.

"그, 그러면 저번에 마셨던 푸른색 빛이 나는.."

"아. 청운주 말인가. 그거라면 여기..있군."

-쪼르륵..

천마가 내 잔에 술을 따라준 뒤 말없이 내게 병을 건넸고 나는 자연스럽게 병을 받아 천마의 잔에 따랐다.

이런 건 이제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으레 보통 사람들이라면 술을 마시기 전 건배를 하면서 축사라던가 그런 말을 나누기 마련이었지만 우리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작게 잔을 짠 하고 부딪힌 뒤 곧바로 잔을 입으로 기울였고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이 없어질 때까지 더 이어졌다.

* * *

그 뒤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저번과 달리 이번엔 여기서 쓰러져도 상관 없다는 방패가 생긴 탓에 저번보다 훨씬 더 잘 들어갔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진작에 간에 구멍이 뚫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안주 하나 없이 술만 계속해서 퍼마셨는데

"후..후... 좋은 자세네.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군."

그건 천마도 마찬가지였다.

안주엔 손도 안대고 나와 맞추면서 같은 종류의 같은 술만 계속 마셨는데 내공으로 취기를 억누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중인지 이번엔 얼굴에 홍조가 꽤 짙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거 아십니까..? 지금 하늘께서 얼굴이 굉장히 빨개지셨습니다."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만?"

"그렇습니까아...?"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정신이 평소랑 다르게 몽롱하고 어지럽고 사물이 두 개로 보이기 시작하는 등 이상한 느낌은 있지만 딱히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본녀도 오랜만에 취한 기분을 느끼는 거라 기분이 꽤 좋군. 혼자서 마실 땐 취기를 억지로 올려봐야 할 일도 없어 괜히 쓸쓸하기만 했는데."

"저도 이렇게 취하는 건 꽤 오랜만입니다.."

"전 여인들이랑은 술자리를 잘 가지지 않았나보지?"

"마실 기회가 잘 없긴 했죠.."

다들 바쁘기도 했고 3명중 2명이 도사라서 술을 마시자고 하기도 그랬다.

그나마 당아영이랑은 몇 번 마시긴 했는데 당아영이 술을 즐기는 편이라고 하기엔 뭐했고.

"앞으로 자주 마시면 되지 않겠나. 술이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쪼르륵

천마는 그렇게 말하며 또 내 잔을 채웠고 나 또한 병을 받은 뒤 그녀의 잔을 채우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사고가 일어났다.

-툭

-주르르륵..

"왓?!"

"오.."

취기가 올라왔다고 해도 몸에 익혀둔 감각이 사라지는 게 아닌 천마와는 달리 나는 완전한 일반인인 탓에 손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술잔을 따르다 말고 병을 놓친 탓에 술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빠, 빨리 닦을걸.."

"뭐 취하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나는 정신이 확 듦과 동시에 주변을 훑어 수건으로 쓸만한 걸 찾아 탁자 건너편에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고

-움찔

그 장면을 보자마자 몸이 절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얇은 옷이 젖어 몸에 그대로 달라붙으며 심지어 전부 흡수하지도 못한 모양인지 남아있던 술이 그녀의 하반신을 더럽히고 있었다.

허벅지 사이로 붙어있는 틈새에 술이 고여 천천히 아래쪽으로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었고 미처 어딘가에 고이지 못한 물방울은 그녀의 몸을 따라 자취를 남기며 옆으로 흘러내렸다.

아무리 내성이 조금 있다곤 하지만 남성으로서 이런 장면을 보고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알코올에 뇌가 범벅이 된 상태에서.

"아.."

나는 닦을 걸 들고 온 것도 까먹은 채로 그 장면을 그대로 감상하고 있었다.

이내 그런 내 모습을 눈치 챈 걸까

"기껏 닦을 걸 가져오고 닦아주지 않는 건가? 이대로 굳어버리면 몸이 꽤 찝찝해지는데."

"아, 아.. 죄, 죄송합니다."

천마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나무라자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수건을 들어 올렸고

"그대만 괜찮다면 다른 걸로 닦아줘도 된다만..?"

-스륵

-흠칫

그 특유의 미소와 함께 손끝으로 옷깃을 잡아 올리는 모습을 보자 나는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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