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12장-거래
이미 천마가 말을 해둔 것인지 나는 금방 천마에게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같이 따라온 여소천이 너무나 특징적인 외형 탓에 정체를 들켜 경계를 받긴 했지만 천마한테 전음을 받기라도 한 건지 경계가 거둬지고 그녀도 같이 따라 들어올 수 있었다.
다만 천마의 방까지 가는 걸 허락받은건 나 뿐이었기에 여소천은 그 옆방에서 기다리게 됐고
"오랜만.. 이라고 하기엔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구나.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결국 이번에도 천마의 방에서 천마를 혼자 독대하게 되었다.
"반년까지는 아직 기한이 제법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꽤 서둘렀구나. 나야 좋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친우를 만나러 오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야 만나러 오겠습니까."
"흐음.."
천마는 내 말을 듣고 손을 입으로 대면서 작게 웃음을 지었고
"본녀는 거짓말을 싫어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오싹!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이, 이런 미친.'
그러고 보니 저번에 찾아왔을 때 거짓말을 싫어한다고 했었는데 이걸 잊고 있었다.
이미 내가 스스로 못생겼다고 말했던 것과 미래의 천기에서 봤다고 말했던 게 거짓말인 게 들킨 상황이었는데 또 거짓말을 해버렸다.
마지막 기회라고 협박하듯이 말했던 거 같은데 시작부터 함정카드를 밟아버렸..
"뭐,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으니 그냥 사회생활의 일부로 봐주도록 하지.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말게나."
...다행히 이번은 봐주려는 모양이었다.
'휴우우우우....'
하마터면 무슨 말을 하기 전부터 망할뻔했다.
아니 솔직히 이런 간단한 사회생활 화법도 거짓말로 쳐버리면 진짜 어떻게 살라고.
최소한의 융통성은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앞으로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나? 반년을 꽉꽉 채워서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괜히 돌려 말했다가 방금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그냥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도움을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호오?"
"제 스승님이 얼마 전 혈교와 싸우다 쓰러지셨는데.."
그 뒤 나는 그녀에게 스승님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스승님이 마(魔)의 기운이 오염되셨는데 스승님이 기운의 오염에 취약하신 분이라 마(魔)의 기운을 분리하지 못하면 목숨이 위험하신 상태라고.
그리고 스승님에게서 마(魔)의 기운을 빼내기 위해 찾은 방법이 더 큰 마(魔)에 이끌린다는 그 특성이라고.
"그래서 본녀가 그대의 스승님에게 침범한 마(魔)의 기운을 빼내주면 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구나. 그대의 말대로 마(魔)는 더 큰 기운에 이끌리기 마련이니 본녀가 빼낼 수 있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천마도 그 특성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됐다면 대화가 편해지..
"그러면 거래 조건도 가지고 왔겠지."
"..."
괜찮다. 예상한 일이다.
원래 세상이 주는 게 있어야 받는 게 있는 법.
괜히 아는 사이니 뭐니 그런 거 들먹이면서 날로 먹으려 하는 것보다 이쪽이 솔직하고 좋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니까.
...그래도 기왕이면 내가 생각하는 것까지 안 가고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돈은 필요 없으시겠죠."
"본녀가 몸을 움직여서 금을 벌어야 할 정도로 궁해 보이나?"
"...농담 삼아 해본 말입니다."
어차피 이건 기대도 안했다.
아마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겠지.
그러면 다음으로 생각해볼 만한 건 천마가 확실히 관심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술 정도인데
"귀한 술은 어떠십니까?"
"본녀가 한번도 마셔본 적 없는 술을 정말 구해올 수 있다면 고려해볼만 하지만 구할 수 있겠나? 본녀가 밖으로 움직이지 않을 뿐 본교의 창고에 축적되어있던 천하의 술이란 거의 대부분 맛 본지 오래다만."
"...아닙니다."
이것도 별로 기대는 안했다.
정말 온 중원을 뒤진다면 구해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스승님이 완전히 침식되기 전에 찾을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으니
결국 다른 걸 제안해봐야..
"찔러볼 수 있는 건 이번 기회를 마지막으로 하도록 하지."
"...예?"
"왜 놀라나. 물건을 가지고 있는 상인이 협상을 무한히 받아주던가? 3번정도면 찔러보기엔 적당한 숫자지. 더군다나 본녀는 상인 또한 아닌데 말이야."
"아.."
그녀는 비스듬히 앉아있던 자세를 틀어 턱에 팔을 받치고 엎드리는 자세를 취했다.
이 이상 협상이 안되면 그냥 드러누워 버리겠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제스쳐.
아무래도 돼도 않는 걸로 찔러보고 있는 걸 간파당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걸지도.
나는 각오한 대로 원래 준비했던 협상 카드를 그녀에게 제안하려고 했으나
"..."
-뻐끔..
이미 오기 전부터 각오했던 일이었음에도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입을 벌려봐도 나오는 건 작은 '아' 소리가 전부.
그 이상으론 무언가에 막히기라도 한 듯 목 너머로 말이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망설이나. 아마 그대 또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
그러나 말문이 막히던 것도 잠시
"스승님을 살려야 하지 않겠나?"
-움찔
-꾸욱..
천마의 말에 결국 무릎에 붙이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며 심호흡을 했고
"...........저를 드리겠습니다."
결국 그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짧은 말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음절 하나하나 내뱉을 때마다 온몸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비명을 지를 정도.
그리고 끝내 마지막 음절까지 내뱉고 나서야 다 끝났다는 듯이 힘이 쫙 빠지며 지친 느낌이 온몸을 휩쓸었다.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호오."
천마의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자 절로 몸이 움찔거렸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죽도 밥도 안됐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에 힘을 쥐어 짜내 자세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고
"그대를 주겠다는 건 무슨 말인가?"
"..."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인 주제에 내숭을 떠는 천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미 올 데 까지 왔다.
여기서 더 물러날 곳도 없다.
"...그 말대로입니다."
-스륵
입고 있던 망토의 모자를 내려 얼굴을 드러낸 다음 팔을 앞으로 뻗어 바닥에 엎드렸다.
"신교를 위해 점을 보라고 하신다면 점을 볼 것이고 술벗이 필요하시다면 술벗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몸을 원하신다면 원하시는 대로 내어드리겠습니다."
-부들부들
알고 있었다.
지금 이게 내 스스로 무덤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무덤으로 기어 들어가야 스승님을 살릴 수 있었으니까.
벌써부터 몸이 비명을 지르며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떨고 있었지만 나는 몸의 반항을 억지로 억눌렀다.
지금 상황에서 몸에게 주도권이 있어봐야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대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렸다."
"...그렇습니다."
지금 몸 어딘가에서 이 순간에도 아니라고 대답하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시 억눌렀다.
그리고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으면서 왜 앞의 2개는 그렇게 시원찮은 것들만 제시했던 건지."
천마는 이번 제안이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보기 드문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좋다. 거래를 승낙하도록 하지. 그래서 그대의 스승님이라는 분은 어디에 계시지? 그때 봤던 여인 중 한 명인가? 그렇다면 섬서까지 가야.."
"신교의 하늘꼐서 직접 몸을 움직이실 필요는 없고 이 구슬에 해주시면 됩니다."
"음?"
나는 당장 스승님을 치료하러 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에게 스승님의 여우구슬을 건넸다.
"... 이 구슬은?"
"스승님의 분신과도 같은 물건입니다. 이곳에 있는 마의 기운만 몰아내 주셔도 스승님이 기운을 차리실 겁니다. 스승님까지 모시고 오기엔 이곳이 너무 외진 곳이라.."
"흠.."
천마는 내게서 구슬을 받아 들고 한참을 이리저리 쳐다보기 시작했다.
저건 나도 이해가 갔다.
생긴 게 되게 예뻐서 괜히 산속에 있을 때부터 내가 가지고 놀던 게 아니었..
"생긴 게 조금 달라져서 헷갈렸다만 저번에 그대가 꺼냈던 그 구슬이 맞군. 그땐 야명주라고 착각했었는데 그대의 스승님의 물건이었나."
"...아. 네.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미 저번에 보여줬었지.
이 구슬 때문에 내가 천기에 직접 들어갔다가 그 난리가 났었던 거고.
'...'
-삐질삐질
그때의 일을 생각하자 다시 등에 식은땀이 절로 났다.
진짜 그때 못나왔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했다.
"흠.. 푸른색이 원래 구슬에 담겨있던 기운이고.. 검붉은색이 그 오염됐다는 기운인가?"
"그렇습니다."
"그땐 몰랐는데 구슬에 담긴 기운이 굉장히 정순하고 많구나. 이 작은 구슬에 대체 얼마나 많은 기운이 담겨있는 건지.."
-흠칫
순간 천마의 말에 깜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이건 스승님이 수련한 기운이 담긴 여우구슬이었다.
무려 구미호가 1000년 동안 모은 기운이라는데 그 기운이 어디 보통 가치겠는가.
힘을 숭배하는 마교라면 스승님의 기운을 탐낼 가능성도 충분히..
"흡."
-슈륵
"자. 된 것 같군. 가지고 가게."
"에."
-툭
방금 전까지 걱정하던게 무색할 정도로 간단히 검은색의 무언가를 흡수하더니 내게 구슬을 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