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12장-이름
"음.. 그러니까 일단 설명을 해줄게요 지금 이 여자가 어떤 상태냐면.."
성녀님에게 한바탕 쓴소리를 한 뒤 보기 드문 내 화난 모습에 여소천이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구슬 아시죠..?"
"...스승님의 여우구슬 아니에요?"
"맞아요. 구미호라는 특성 상 지금 이 구슬은 사실상 이 여자의 분신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동화 되어있는 상태인데.."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여소천의 설명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승님은 지금 뱀파이어들로부터 나온 이상한 기운에 오염된 상태고 그 상태는 여우구슬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원래 100% 순수한 기운만 담겨있던 스승님의 몸에 불순물이 침입한 탓에 지금 스승님이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가장 간단하면서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 불순물을 몰아내는 건데..
"잠깐만. 이 구슬이 스승님의 분신이라고요?"
"네.. 그렇죠..? 1000년 묵은 여우에게 여우구슬이면 사실상 자신의 반쪽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이걸 제가 들고 다녔었는데요?"
"뭐.. 그만큼 당신을 아꼈다는 거겠죠 아마. 설마 들고 나가버릴 것까진 예상 못했겠지만."
"..."
-꾸욱
뭔가 나오려는 말을 입술을 물어 삼킨 다음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래서 이 불순물을 몰아내는 방법이.. 찾긴 찾았는데 조금 위험한 방식이라.."
"...대체 뭐길래."
혹시 인륜을 져버리기라도 해야 하나?
인신공양 같은 끔찍한 짓이라도 저질러야..
"......천마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해요."
....................
"네?"
* * *
순간 끓어올랐던 감정이 확 식어버릴 정도로 충격적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 제가 잘못들은 거 같은데 다시 말해주실래요?"
"...천마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 제대로 들은 게 맞구나.
...
"왜요?!"
왜 뜬금없이 그 여자가 여기서 나와?!
알고 보니까 혈교랑 마교랑 한패기라도 한 건가?!
사실 천마가 흑막이었어?!
"자, 잠깐만 진정해요. 딱히 천마가 이 일의 배후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제 생각은 또 어떻게 알아요?!"
"딱 봐도 생각하는 게 그거.. 아, 아니 아무튼 들어봐요."
여소천은 내 어깨를 누르며 나를 강제로 진정 시킨 뒤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마교와 혈교가 딱히 서로 연관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전 혈교도 물론이고 현 혈교도 그 어떤 연관성도 없어요."
"그런데 왜 천마를..?"
"두 조직 사이에 연관은 없지만 쓰는 힘의 종류는 비슷하거든요."
이어진 설명은 이러했다.
마교와 뱀파이어 사이에 연관이 없다고 해도 둘 모두 다루는 힘은 마(魔)에 가깝기에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둘 모두 하늘과 자연을 거스르는 역천(逆天)의 힘이고 아무리 뿌리가 다른 세계라고 한들 만류귀종이라는 말마따나 그 분야에서 극에 오를수록 마(魔)에 가까워져 있는 상태라고.
그리고 마(魔)가 가진 근본적인 특성이 있는데
"마(魔)는 더 큰 마(魔)에 이끌려요."
비교적 작은 크기의 마(魔)는 더 큰 마(魔)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지금 스승님의 기운을 더럽히고 있는 기운은 필연적으로 마(魔)의 기운을 품고 있는 셈이고
이 기운을 끄집어내기 위해선 더 강한 마(魔)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세계에서 뱀파이어 로드보다 더 강한 마(魔)의 기운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천마뿐.."
"..."
적어도 지금 당장은 한 명 밖에 없었다.
-멍..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진짜?
진짜 한 명 밖에 없다고?
"아니.. 그.. 하.."
무슨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여기서 천마가 튀어나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일단 냅두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혈교부터 해결한 다음에 그나마 여자 문제인 천마를 해결하려고 했던 건데 혈교는 혈교대로 놓치고 나중으로 미뤄뒀던 천마를 지금 끌어와야 한다고?
'...누가 짜기라도 한 거야 뭐야..'
억까도 적당히 해야지 진짜 왜 여기서 천마가..
"...천마 말고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뒤져보면 있을 수는 있죠.. 중원은 넓으니까.. 하지만 중원에서 마(魔)를 다루는 사람은 9할9푼이 마교에 몰려있고.. 마교에 있는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천마의 시선을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결국 이러나 저러나 그 여자와 연관될 수밖에 없죠."
"도가계열 무공으로 마(魔)를 쫓아내는건요?"
"...시도해볼 가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더 안쪽으로 파고들 가능성이 높네. 비유하자면 건물에 숨어있는 쥐를 빼내야 하는 상황인데.. 대놓고 칼을 들고 잡으려고 들면 쥐가 얌전히 목을 내밀러 나오진 않지 않겠나."
"..."
"물론 정 방법이 없다면 이거라도 해야겠지만.. 더 악화될 여지도 없는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시도해볼 만한 수지 당장 쓰기엔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네. 물론 이건 개인적인 의견일 뿐 판단은 그대에게 맡기겠네. 당장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할 수 있는 건 그대 뿐이니."
...스승님의 보호자가 나..
"...스승님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죠?"
갑자기 가슴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스승님의 보호자를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다른 사람들은 스승님이랑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이니까.
"특별한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에요. 당장 침식 속도를 보면 그 정도고.. 더 빨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죠."
"..."
"너,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세요. 천마에게 의존하지 않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을 한번 찾아볼 테니까요. 공동파의 복마검법이라는 비전 무공이 있는데 이건 다른 도가게열 무공과는 성격이 조금 달라서.. 어쩌면 기대해볼 수도 있을 거에요."
"저... 공동파라면 저번 혈교와의 전쟁 이후 아직도 봉문을 유지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소문에 따르면 말이 봉문이지 피해가 워낙 커서 사실상 멸문이라고 봐야 한다는 말도 있고.."
"..."
-삐질삐질
당아영의 지적에 여소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ㅁ, 뭐 중원을 넓으니까요! 찾아보면 한 명 쯤은 찾을 수 있겠죠! 정 안되면 중원을 전부 뒤져서 신의라도 찾아올 테니까 지금은 조금 쉬고 있으세요! 당신 지금 상태 안 좋아 보이니까."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여소천이 나를 밀면서 침대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내 상태가 안 좋아 보이나.
'...좋을 수가 없긴 하지만.'
다 끝날 줄 알고 있었더니 뱀파이어 로드는 놓쳤고 스승님은 혼수 상태에 저대로 두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만약 이대로 기운이 스승님을 전부 침식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여소천이 말은 안 했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죽거나.. 만약 살아남는다고 해도 내가 전에 알던 스승님의 모습은 아닐 거다.
나에겐 소중한 스승님이지만 일단 구미호고
그런 구미호가 1000년동안 모아온 기운이 마(魔)에 물든다면..
-꾸욱
'...생각하지 말자.'
애써 오늘 꿈에서 봤던 장면은 무시했다.
그냥 개꿈일 거다.
천마한테 시달린 다음에 천마와 낳은 딸한테 겁탈 당한다는 끔찍한 내용의 꿈도 여러 번 꾸지 않았던가.
딱히 나한테 예지몽 능력이 있지는..
........않겠지.
'...일단 한숨 잘까.'
일어난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고 아직 점심때긴 하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갑자기 확 몰려와서 한숨 자고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대로 깨어있어 봤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고.
"...자고 싶은데 좀 기절 시켜주실래요."
"...네?"
"저번에 곤륜까지 데려갈 때 해줬던 그거 있잖아요. 그렇게 싹 날리는 거 말고 그냥 잠드는 정도로 조절 가능해요? 이대론 잠들기가 힘들 거 같아서."
"어.. 네. 가능하죠. 잠시만요.."
여소천은 저번에 했던 것처럼 내게 다가와서 머리 양쪽에 손을 갖다댔고
-파직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 * *
언젠가 한번 스승님의 이름을 여쭤봤던 적이 있었다.
"근데 스승님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름 말이냐?"
"스승님이랑 지낸지도 꽤 됐는데 어째 이름을 못 들어봤습니다."
평소에 어차피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탓에 이름을 몰라도 별로 불편한 게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궁금했다.
스승님이랑 지낸 지가 벌써 몇 년짼데 이름도 모른단 말인가.
어차피 스승님도 나를 대부분 '제자야' 라고 부르지 '유성아'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엔 차이가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런 게 궁금하단 말이냐. 이제 와서 스승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라도 생긴 것이냐."
"...혹시 돌아가시면 무덤에 쓸 이름은 알아두셔야 할 것 아닙니까."
"고얀놈. 언제 이 스승을 죽이고 유산을 탐할 계획을 세웠더냐."
"그러는 스승님이야 말로 언제쯤 제자를 희롱하는 걸 그만두실 겁니까. 엄연한 범죄입니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유치한 말싸움.
이 의미 없는 말싸움은 한참 동안 이어졌고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스승님이었다.
"그래. 이 스승의 이름이 그렇게 궁금하더냐. 그러면 알려주도록 하마."
'오.'
결국 이름을 알려주기로 한 스승님.
나는 이후 스승님의 입이 열리기를 한참 동안 기다렸고
"......"
"...스승님?"
기다린지 거의 5분이 지났음에도 스승님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예?"
"아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기 보다는 특별히 이름이라고 칭할만한 게 없다는 게 정확하겠어."
"...이름이 없으시단 말입니까?"
"이름이란 불러줄 다른 사람이 있어야 제 기능을 하는 것이니.. 특별히 따로 이름을 정해둘 필요가 없더구나. 어차피 산속에서 홀로 살았었고 이름이 필요할 정도로 남과 인연을 만든 적도 손에 꼽았으니.. 아마 그때마다 다른 가명을 댔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 그 가명이라도 말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한번 쓰고 버린 가명만 대여섯개는 되는데 이걸 이름이라고 하긴 그렇지 않느냐."
"..."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이유였다.
사람이 이름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고
산속에서 혼자 지내기만 했다고 이름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니.
'남이 불러주질 않는다면 이름이 의미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름의 존재 가치가 남에게 불릴 때 쓰이는 것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자기 자신을 칭할 수 있는 정체성으로서의 역할도 있는데.
내가 그렇게 스승님의 이름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사이 스승님이 다시 입을 여셨다.
"생각해보니 이제 와서 이름을 굳이 만들 필요도 없겠구나."
"...예?"
"내 이름이 무엇이던 간에 너는 나를 스승님이라고 부를 것 아니냐. 그러면 굳이 이제 와서 이름을 만들 필요도 없겠지."
...이게 무슨 말이래.
어차피 나는 스승님을 스승님이라고만 부를 테니까 이름이 필요 없을 거 같다고?
"제가 스승님을 그렇게 부르긴 하겠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댈 이름 정도는.."
"없어도 된다."
"예?"
"지금의 내 인간관계는 너의 스승이라는 것 뿐이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이것 외에 더 늘어날 것 같지도 않구나."
"..."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불릴 호칭으론 '스승님'으로 충분하다는 말이다."
-움찔
'이, 이, 이, 이, 이 여자가 지금 뭔 소리래.'
무슨 말을 프로포즈처럼 하고 앉아있다.
누가 보면 평생 나하고만 살겠다는 뜻처럼 들리지 않는가.
스승이 제자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다.
제자가 적당히 배울 거 다 배우고 나이도 차면 하산해서 독립 시켜야지 무슨 평생 같이 살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하마터면 착각할 뻔 했다.
그동안 이 여자의 장난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여기서 또 꼴사납게 얼굴을 붉히..
"또 얼굴이 붉어졌구나. 덥기라도 한 것이냐."
"?!"
스승님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얼굴에 손을 갖다 대자 손으로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달궈진 상태였다.
"여, 여름이라 더워서 그렇습니다! 저는 이만 자러 갈 테니.."
-홱
"우왁?!"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고 침상으로 향하던 나를 그대로 잡더니 본인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셨다.
내 등이 스승님의 가슴과 맞닿으며 얼굴은 서로 같은 방향을 보는 형태.
"반딧불이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기껏 산을 뒤져다가 잡아서 풀어놓은 놈들이니 제대로 보고 가거라. 내일이면 늙어 죽어서 보지도 못한다."
"...예?"
어제 '올해는 여름인데 반딧불이도 안보이고 순 벌레들 뿐이네요. 이대로면 올해는 구경도 못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 같긴 한데 지금 뭐라고..
"자. 보거라. 이제 날아다니는구나."
"...와."
스승님의 말을 듣고 정말 앞을 바라보자 앞쪽의 풀밭에 주위로 수십 개의 작은 불빛들이 점멸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산에서 산지도 꽤 됐는데 이 정도 숫자를 한번에 보는 건 처음이었다.
기껏해야 한번에 5~6마리 정도였는데
"예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텁
"...이건 불편한데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자연스럽게 내 머리 위로 턱을 올린 탓에 머리 위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제 등이 아니라 어깨 부근에서 느껴지는 압박감도 상당한 불편함을 주고 있긴 하지만 뭐
'기껏 이런 구경 시켜주시는데 좀 참지 뭐..'
2~30분 정도면 끝날텐데 몸부림치면서 까지 벗어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스승님은 저것들이 왜 빛나는지 아십니까."
"별걸 다 묻는구나. 그거야 간단한 거 아니냐."
"오."
의외로 이걸 아시는구나.
나도 명칭까진 기억 안 나는데 대충 반딧불이의 꼬리에 있는 화학물질이 공기랑 반응해서 빛을 내는 걸로 기억..
"짝짓기를 하려고 저러는 것 아니더냐."
"푸흡?!"
"한쪽이 불빛을 내면서 짝짓기의 의사를 밝히면 그걸 본 다른 쪽도 따라서 반응하며 빛을 내는 거다. 굳이 반딧불이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숲 속 벌레들은 그런 식으로 짝짓기를 하지. 하루 종일 맴맴 거리는 매미들도 사실 자기랑 번식행위를 해줄 짝을 찾는.."
"아, 알았으니까 그만하십시오!"
아니 진짜 여자가 못하는 소리가 없다니까?!
아니 그 물론 벌레들 이야기긴 한데
인간이랑은 상관 없는 이야기긴 한데 이게 참 아무리 그래도..
"먼저 물어봐 놓고 왜 성질을 부리느냐. 이상한 녀석 같으니."
"저는 빛을 내는 이유를 물어본 게 아니라 원리를 말한 거였단 말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질문했어야지. 먼저 헷갈리게 질문해 놓고."
"...그래서 아십니까?"
"모른다."
"..."
물어본 내가 입이 다물어질 정도의 명쾌한 대답.
"하아.. 됐습니다."
"보통 그런 건 네가 알아서 설명해주려고 하는 말 아니더냐."
"저도 몰라서 물어본 겁니다!"
"싱거운 녀석 같으니."
그 뒤로도 우리는 한참 동안 이상한 주제로 투닥거리면서 반딧불이를 구경하다가 달빛이 구름 사이로 숨을때쯤 침상에 누웠다.
그냥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스승님과의 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