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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238화 (238/250)

[238화] 12장-원인

의원이 책을 뒤지러 창고에 들어간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차, 찾았어요!"

의원이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창고에서 뛰쳐나왔다.

손에는 두꺼운 책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아마 그 안에 방법이 있던 모양이었다.

"...고작 책에 그런 게 있었다고요?"

"고작 책이라뇨! 저희 스승님의 스승님의 스승님부터 대를 이어서 겪으신 수많은 병에 대해 집필하신 책이거든요!"

'...그래도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 혈교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들 때문에 생긴 증상인데 책에 적혀있다니.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우선 오긴 했지만 정말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기에 여소천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흥! 자 보세요. 혈교의 잔당과 싸우다가 이상한 기운을 뒤집어 썼다고 그러셨죠? 딱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상태는 원래 가지고 있던 기운이 그 외부의 기운에 오염된 상황이에요. 자력으로 불순물을 몰아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외부에서 도움을 줘야 하는데 지금 외부에서 침입한 기운을 분석해보면.."

그러나 그런 예상과 별개로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 의원이었는지 쓰러져 있는 그녀의 상태를 꽤 빠르게 분석했고

".....하면 돼요. 어때요. 이론 상으론 완벽하죠?"

금방 그 해결책도 입 밖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들은 검후와 여소천은 한참 동안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지 못했다.

* * *

"..."

-짹짹

오늘도 어김없이 창문 사이로 들어와 눈을 찌르는 햇빛과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에 둘만 있는 게 아니라서 당아영과는 각자의 방에서 따로 자고 있는 탓에 침대에서 일어난 건 나 혼자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엔 혼자 자는 날이 누구랑 같이 자는 날보다 더 적었던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별로 중요한 생각은 아니기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 나오자 보이는 건 바닥에 깔아둔 모포 위에서 묶인 상태로 침까지 흘리면서 자고 있는 검후님의 제자와 먼저 일어난 듯 식탁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당아영이었다.

"일어나셨어요?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일찍 일어났네요.."

"또 악몽이라도 꿨어요?"

"...비슷해요."

"...진짜요?"

악몽이라고 해야 하나.

무서운 꿈은 아닌데 좀 불쾌한 꿈이었다.

"스승님이 커다란 여우로 변해서 사라지는 꿈을 꿨어요."

"음.."

원래 꿈이라는 게 늘 그렇듯 깨고 나면 내용이 순식간에 희미해져서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건 핵심적인 내용이라 기억이 났다.

스승님이 꼬리가 9개 달린 커다란 여우로 변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꿈.

"뭐.. 구미호시니까.. 가끔 그런 꿈을 꿀 수도 있죠."

"...그냥 단순한 악몽이겠죠?"

"그렇겠죠. 그분이 왜 이제 와서 당신 곁을 떠나겠어요. 전에 보니까 저희한테 절대 안 넘겨주겠다는 듯이 아주 꽁꽁 껴안아서 제대로 떨어트려 놓을 수도 없겠더만."

"...언제 그랬어요?"

"며칠 전에 당신이 쓰러지듯 잠들었을 때요."

아. 천마가 찾아왔던 그때 말인가.

나는 그냥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었고 스승님이 금세 따라왔던 것 까진 기억 나는데 그거까진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제 입장에선 기분이 여러모로 복잡하거든요? 당연히 경쟁자라고는 생각도 안하고 있던 사실상 장모님 같은 분이 최대의 난적으로 나타날 줄이야."

"...저도 모르긴 했어요."

"뭘 몰라요. 전에 보니까 당신도 눈에 애정이 흘러 넘치더만. 제가 가족애랑 이성적인 감정도 구분 못하는 여자처럼 보여요?"

-쭈욱

"으에에엑."

당아영은 그렇게 말하며 내 볼을 양쪽으로 잡고 늘렸다.

"솔직히 말해봐요.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진짜 몰랐어요. 아무리 잘 때 무감각해도 그렇지 그 긴 세월 동안 한번도 몰랐다는 게 말이 돼요?"

"지짜 모아어요."

"전에 제가 자는 사이에 덮쳤을 땐 멀쩡히 깼잖아요?"

"애오에 그때 몰래 더칠 마음도 업섯잔아요"

"...그렇긴 하지만."

-탁.

잘때 덮친 것 치고는 피스톤질을 천천히 한 것도 아니고 내 골반에 충격이 전해질 정도로 내려쳐 놓고 왜 깼냐고 물어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스승님은 몰래 덮쳤나 보지.

아니면 주술로 나를 재워 놓고 덮친 걸 수도 있고.

"...근데 제 스승님이면 소저한텐 장모님이 아니라 시어머니 아니에요?"

"아."

"어째 자꾸 저를 여자 취급하는 거 같은데."

"기, 기분 탓이에요. 실수할 수도 있죠."

분명 바깥 세상을 보면 딱히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바뀐 세계는 아닌 것 같은데 유독 내 주변만 다르게 느껴진단 말이지.

나는 너무 약하고 주변 여자들은 너무 강해서 생기는 문제라곤 하지만 그게 계속 이어지니까 슬슬 상식이 무너지려고 하고 있다.

살짝 얼얼한 볼을 문지르면서 탁자에 앉아 당아영이 차와 함께 먹던 과자를 깨작였다.

"그나저나 3명은 언제 오려나요. 소식 정도는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이제 5일 지났잖아요? 한참 먼 위치던데 전서구도 그 거리를 하루아침에 오진 못해요. 뭐라도 소식을 들어보려면 내일 정도는 돼야.."

-콰앙!

"거, 거의 다 왔네! 조금만 더 버티게!"

"그냥 당신이 대신 들어주면 되잖아요..!"

"아."

"아무리 내가 당신보다 경공은 빠르다지만 거기부터 여기까지 쉬지도 않고 사람 하나 업고 오는 게 얼마나..!"

"미, 미안하네. 이리 주게."

"...왔나 보네요."

"...그러게요."

벌써부터 현관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3명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스, 슷승님?"

-츄읍

그 와중에 바닥에 엎어져있던 검후님의 제자는 검후님의 목소리를 듣고 급하게 일어나면서 침을 삼키고 있었고.

누워서 인사하긴 그러니 검후님의 제자를 일으키며 돌아온 3명을 반길 준비를 했다.

'뭐, 아무튼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걸 보면 전부 무사히 끝난..'

스승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원래 말을 많이 하는 인간이 아니니까 그냥 말없이 오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3명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승님?"

"아. 그, 그게 말일세.."

평상시와는 다른 머리카락 색.

그냥 잠든 것도 아니고 힘없이 검후님에게 업혀있는 모습.

"스승님?!"

스승님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깨닫자마자 바로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스승님?!"

"..."

"이, 일단 진정하세요. 이불에 내려놓고.."

그 뒤로 반쯤도 아니고 한 80%정도 멘붕한 나를 당아영이 간신히 뒤에서 잡고 있는 사이 검후님은 스승님을 이불에 내려놨고

그제서야 겨우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진정이 된 나는 두 명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설명해주세요."

"..."

"..."

"어떤 일이 있었길래 스승님이 저렇게 된 건지."

"그게.."

"...제가 설명할게요."

검후님과 여소천은 미안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사히 잠입하는데 성공한 뒤 기습으로 뱀파이어 로드를 죽이기 직전까지 몰아넣는데 성공했고

이제 성녀님이 계획대로 뱀파이어 로드를 소멸시키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돌발행동을 했다고.

"...아마 옛날에 그 여자와 흡혈귀놈 사이에 있었던 일인 것 같아요. 그녀가 당신 스승님의 몸을 빌려서 그의 영혼을 소멸 시키고 있는 와중에 흡혈귀가 그녀를 도발했고.. 그 여자는 도발에 넘어가서.."

"...그래서 스승님이 저렇게 됐다고요?"

"...네."

"..."

나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감정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쓰러져있는 스승님에게 다가갔다.

-스륵

'...스승님.'

영문도 모르고 이 세계에 떨어진 뒤 만난 은인이자 유일한 가족.

맨날 티격태격 싸우긴 했지만 진심으로 싫어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여러 번 말했듯이 사실상 첫사랑이고 스승님이 자는 나로 이상한 짓을 했다고 했을 때도 당황하는 마음만 있었지 싫거나 미워했던 마음은 없었다.

'...바보 같은 여자가.'

그냥 깨어있을 때 했었어도 그깟 몸 따위 순순히 내줬을텐데.

어차피 스승님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어디 땅바닥에서 구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몸. 몰래 탐하지 않았어도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는데

뭐가 두렵다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말도 안 했단 말인가.

-까득

이대로 가게 두진 않는다.

전에 말했었지. 내가 억울해서라도 받을 건 받아야겠다고.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다.

자기만 내 몸으로 즐길 대로 즐겨 놓고 이제야 당당해졌는데 이대로 간다고?

그렇게 둘까 보냐.

적어도 앞으로 10년. 아니 100년은 더 같이 있어줘야 직성이 풀리겠다.

인간인 내가 그렇게 오래 못산다는 건 알빠인가.

이대로 가버리면 나도 이 여자를 남은 시간 동안 기억할 건데 이 여자도 그 정도는 기억해줘야지 공평하지 않겠는가.

-츄읍

쓰러져있는 스승님의 턱을 받치고 입을 맞췄다.

당연하지만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 동화속처럼 공주님이 왕자님의 키스를 받고 깨어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나와봐 이 썅년아.'

[...]

하지만 다른 건 깨울 수 있지.

[그..]

'사과나 변명은 필요 없고 본론만 말해요. 스승님을 깨우는데 필요한 게 뭔지. 모른다고 말할 거면 그대로 입 닥치시고요.'

[...]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주는 여자와 그래도 필요할 때 도움이 되는 여자 사이에서 줄타기 중이던 에르델이었지만 이번 일로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미 그쪽 세계의 성녀님이랑 검후님께서 찾아오셨..]

'그래요. 그러면 잘 가요.'

[...용ㅅ..]

'아.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 건데.'

다시 저울을 맞출 기회를 줄 생각도 없고.

'이제 먼저 제 머릿속으로 말 걸지 마세요. 마음 같아선 지켜보지도 말라고 하고 싶지만 말한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아..]

'궁금하면 한번 걸어보세요. 제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민폐가 뭔지 보여줄 테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성녀님의 특성 상 내가 뭘 말하는지 알고 있을 거다.

곧바로 하얗게 질려버린 성녀님의 표정을 봐도 딱히 너무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이렇게 만든 건 저 여자였으니까.

'이해 했어요 못했어요. 대답.'

[아, 알았어요. 먼저 말 안 걸 테니까 제발 그것만은..]

'사족이 길어.'

[...알겠습니다.]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갔던 에르델을 머릿속에서 내쫓은 뒤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다른 여자들은 살벌한 내 분위기를 보고 뭘 했는지 대충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

내가 이 정도까지 감정이 격해진 모습은 다들 처음 봐서 그런지 다들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데다 그 여소천마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었으니

-피식

"왜들 그렇게 눈치를 봐요.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내가 먼저 웃으면서 얼어붙은 분위기를 해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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