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12장-치료
"으읏..차."
시골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의원.
그곳의 유일한 의원인 여성은 힘겹게 약재가 담긴 상자를 옮긴 뒤 찌뿌둥한 허리를 두드렸다.
스승님에게 이 의원을 물려받고 홀로 운영하기 시작한지 벌써 5년째.
젊은 여인 혼자서 운영하는 의원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지만 실력 면에서 인정받은 덕분에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할 때는 혼자라서 불편한 게 체감이 돼서 종종 찾아온 제자로 받아달라던 사람들이 생각나긴 하지만..
'아직 내가 남을 가르칠 실력은 안되니까.'
아직 자신이 제자를 받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제자를 받으려고 한다면 나중에 스승님을 다시 뵐 명목이 없으니 못해도 10년은 더 지난 뒤에야 한번 생각해 볼만 한 일이었다.
그때쯤이면 슬슬 자신도 몸이 안 좋아질 테니까 혼자서 늙어 죽기 싫으면 도와줄 사람 정도는 구해 놔야겠지.
사실 그것보다 더 간단한 방법은 그냥 적당한 짝을 구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외모도 제법 있는 편이고 능력도 있는 데다 아직 젊으니까 짝을 구하고자 한다면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고 해도 젊은 남자들만 수십 명은 있는 곳이니 적당히 괜찮은 사람 한 명 골라잡으면 외로움도 해소되고 미래 걱정도 덜 해도 될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의원을 운영하면서 그런 작업이 몇 번 있던 것도 사실이고.
지금이야 아직 젊어서 그러는 거지 몇 년 만 더 지나서 혼기에 근접하게 되면 짝을 구하는 난이도가 엄청 올라갈 테니 구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적기인 것도 맞지만..
"...하아."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어서 문제다.
딱히 자신이 독신주의자거나 남성에 대한 눈이 너무 높은 건 아니었다.
옛날에야 수련이 바빠서 외면했을 뿐이지 나중엔 제대로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며 살 마음이 있었는데..
'이게 다 그 손님 때문이야..'
자신이 이렇게 된 건 약 2년전 찾아온 손님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다급하게 피풍의를 입은 사람 한 명을 업고 와서 급하게 진료를 봐 달라고 했던 말투가 인상적이었던 도사분.
그분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도사분이 데리고 왔던 환자분한테 있었다.
이상하게 피풍의 안쪽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신기하게 생각하면서도 이대로면 진료를 볼 수가 없으니 피풍의를 벗겨 달라고 부탁했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분명 남성적인 외모는 아니었다.
남자라고 한다면 남자 같지만 그렇다고 여성이라고 우긴다면 또 그렇게 볼 수도 있는 애매한 외모인데다가 몸에 근육도 안 붙어있고 전체적으로 체구가 작은 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성미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외모였지만..
-꿀꺽
'그때 어떻게해서든 내가 치료했어야 했는데..!'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리에서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았다.
아직도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환자분의 몸에서 나던 이상한 향기가 계속 코끝에 머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 몇 주는 워낙 인상적인 환자분이라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게 몇 달을 가서도 계속 아른거리니 사실 내가 위험한 취향이었나 하고 몰래 숨어서 동네 아이들을 지켜봤던 적도 있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관에 끌려가지 않은 걸 보면 자신에게 그런 취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하아.."
지금 상태를 보면 아무래도 평생 시집가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미 또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해버린 이상 오늘 그냥 자기는 글렀다.
예전처럼 밤을 세진 않겠지만 아마 달이 저물어갈때쯤 간신히 잠들 수 있지 않을..
-쿵쿵!
"이보게! 안에 의원 있는가!"
-깜짝!
그 순간 문밖에서 들려온 환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개인적인 사정이 있더라도 환자가 있는 한 의원이 쉴 수는 없는 법.
"네, 네! 있으니까 들어오셔도 돼요!"
이 야밤에 찾아올 정도라면 상황이 정말 급박할 가능성이 높았다.
서둘러 진료를 볼 수 있도록 도구를 챙기다가 문득 든 생각.
'...근데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한 거 같은데.'
왠지 언젠가 한번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와 말투였다.
.
.
.
"아. 여전히 여기 있었군. 다행이네. 당장 밖에 나와보니 근처에 생각나는 의원이 여기밖에 없어서.."
"어.. 2년전에 오셨던 도사님 맞으신가요?"
"기억하고 있었군. 그대도 환자를 한두명 본 게 아닐텐데."
"아하하.. 의원이 환자를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아는 사이인 건 알겠는데 일단 환자 좀 봐주시겠어요? 어디 눕혀 놓을 데라도 좀 알려주시고요."
2년 전과 비교해 전혀 나이를 먹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도사분과 안부를 묻는 사이 약간 까칠한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린 곳에는 푸른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가 자신보다 체구가 더 큰 여성을 업고 있는 상황이었고
"아. 이, 이쪽에 눕혀 놓으시면 돼요. 흙이나 그런 건 청소하면 되니까 편하게 눕혀 놓으세요."
"읏..차."
딱 봐도 힘들어 보일 것 같아 서둘러 환자를 내려놓을 이불 위를 가리켰다.
보기보다 힘이 센 건지 소녀는 가볍게 자신이 업고 있던 여성을 그 위로 눕혀 놓았고
"..."
-멍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잠시 머리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약간 이상한 색이 섞여있는 금색 머리카락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긴 충분했지만 그보다 더 비현실적인 건 바로 외모였으니
눈을 감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완벽이라는 말도 모자란 이목구비와..
-새액.. 새액..
'와.. 이건..'
순간 옷 안에 뭘 넣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전부 살이었다.
누워서 숨만 쉬고 있는데도 호흡에 맞춰서 위아래로 흔들리고 그 와중에 흘러내리지도 않는 비현실적인 살덩이들은 여성인 자신도 쉽게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였다.
보통 저렇게 크면 중력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흘러내리게 되는 게 일반적인데 대체 관리를 어떻게 했으면 이 정도 크기로도..
"...그.. 진료 안보세요?"
"핫!"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번뇌를 털어내고 진료 도구를 들어 올렸다.
"우선 진료를 보고 있겠지만 원활한 진료를 위해서 질문 몇 가지 드려도 될까요?"
"괜찮네."
"음.. 일단 제일 간단한 질문인데 어쩌다가 쓰러지신 거죠? 무인끼리 싸웠다거나.. 어디서 굴러 떨어졌다거나..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셔야 원인을 파악하기 쉽거든요."
'우선 호흡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고..'
호흡도 제대로 안되고 있는 상황이면 가망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봐야 하는데 다행히 아직은 살릴 수 있는 수준으로 보였다.
그 다음은 심장 박동..
-물컹
"..."
'혹시 깨어나시면 좋아하시는 음식이 뭔지 물어볼까.'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대로 의원으로서의 역할은 하고 있었다.
심장 박동은 음..
'...느린 거 같은데?'
어딘가 이상했다.
일단 건강한 인간 기준의 심박수는 아니었다.
동면기에 들어간 동물이라면 모를까.
"그.. 적과 싸우다가 사고가 조금 있어서.. 이상한 기운을 뒤집어썼네."
"무슨 적이었는데요?"
"으음.. 혈교의 잔당..이라고 표현하지."
"...어우."
무서운 이름이 나왔다.
20년도 더 전에 멸망했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잔당이 남아있다니.
그 정도면 스승님의 기록을 뒤져봐야 한다.
적어도 자신은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종류였으니까.
"잠시만요.. 그러면 저도 스승님의 책을 봐야 할 것 같아서.."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에서 스승님이 남긴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부디 기록이 있길 바랄 수밖에.
* * *
의원이 책을 뒤지러 자리를 비운 사이 여소천과 검후는 무거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의원이 뭘 알긴 할까요? 예전에 그를 치료했던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영역인데."
"믿어볼 수밖에 없지 않겠나. 당장 이 근처에서 찾을 수 있는 의원도 가장 가까운 곳이 이곳이었고."
"젠장.. 그 하얀 마녀는 사고는 사고대로 치고 무슨 말 한마디 없어요. 멋대로 남의 몸을 빌려다가 저런 꼴을 만들어 놨으면 최소한 치료할 방법 정도는 자기쪽에서 제공을 해야지.."
"그 채..널? 이라는 게 우리한테 없으니 연락이 안되는 거겠지. 그녀라고 일부러 그랬겠나."
"그 망할 여자라면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어요. 자기는 손 한번 못 잡는데 이 여자는 10년동안 그런 짓을 해왔으니 질투심에 그랬을 수도 있다구요."
"크흠.."
자신이 뭐라고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있는 검후였지만 그래도 그와 그녀 사이에 있던 일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검후의 성격으로는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대놓고 말이 나오면 얼굴을 붉히면서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지금 이분의 상태가 대충 어떤 건지 알 수는 없나? 그대는 이상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나."
"알 수 있어요. 있는데 지금 상황이 영 좋지 않아서 문제인 거지."
"...그런가?"
"보이세요? 이게 이 여자의 여우구슬이에요."
여소천은 쓰러져있는 그녀로부터 푸른빛의 구슬을 꺼내 검후에게 보여줬다.
"여우요괴는 그 경지가 높을수록 여우구슬과 동화되죠. 이 여자 정도의 상태에선 사실상 이 구슬이 그녀의 분신이라고 봐도 좋아요."
"...색이 탁한 것 같다만."
"네. 원래 대로라면 자연의 정순한 기운만 담았으니 완전한 푸른 빛을 띄고 있어야 하지만.."
정작 구슬 안에 보이는 것은 전체적으로 푸른 빛과 그 안에 있는 손톱만한 검붉은 색의 기운이었다.
마치 물병 안에 물감을 넣은 것처럼 검붉은 색의 기운이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는 모습.
여우구슬의 상태가 곧 본체의 상태라는 걸 생각하면 딱 봐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이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붉은색과 검은색이 차지하는 구역의 비중이 조금 늘어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저 검붉은 기운이 구슬 전체를 장악하면 어떻게 되나?"
"..."
검후는 조심스럽게 만약의 상황에 대해 질문을 했고
"...적어도 원래 우리가 기억하던 모습은 아니겠죠."
여소천은 명확한 대답을 회피하며 의원이 떠난 창고쪽 방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