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12장-잠입
여소천 일행이 집에서 나와 혈교의 본거지가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들르기 시작한지 이틀째.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네요.'
'음. 확실히 엄청나게 많은 것 같군.'
그들은 혈교의 본거지로 보이는 곳을 찾는데 성공했다.
입구가 대놓고 있진 않고 이상한 문양을 이용해 안쪽으로 순간이동하는것처럼 보이는 입구였다.
다른 무림인들이라면 그 용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실된 고대의 진법이라고 착각할듯한 형태였지만 그들에겐 무림 출신이 아닌 조력자가 있었다.
[텔레포트 마법진이네요. 이런 게 이 세계에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사용된 마력각인 또한 뱀파이어의 것이에요. 다른 누군가의 기지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네요.]
'그렇다는구나.'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아세요?'
[알긴 알지만 추천하진 않아요. 아무리 당신들이 경지가 높다지만 처음 사용할 때는 멀미가 꽤 심할 거고 이방인이 사용한 걸 저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도 없거든요. 들어가자마자 단체로 기습 당할 위험이 높아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입구는 텔레포트 마법진 하나 뿐이었고 이걸 그들이 이용하기엔 위험성이 너무 높은 상황.
'그냥 크게 번개 한방 쳐서 싸그리 부숴버릴까요?'
'일격에 전멸시키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안쪽의 모든 이목이 이쪽으로 끌리겠지. 아무리 우리 셋이라지만 그 로드라는 자와 모든 흡혈귀들을 한번에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 그때 만났던 녹림채주같은 이들이 몇 명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몰래 잠입한 뒤 속전속결로 대장의 목만 따고 나오는 게 제일 좋은 방법같다만'
'근데 어떻게 잠입하죠?'
'음...'
.
.
.
-저벅저벅
'...옷이 굉장히 불편하군. 대체 무슨 재질로 만든 건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미호의 능력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능력이라고 한다면 바로 둔갑술이었다.
사람을 홀리는 요괴 답게 그 모습을 수시로 바꿔가며 악행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있듯이 여우 요괴라면 거의 필수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흡혈귀 하나를 붙잡고 기절 시킨 뒤 옷을 뺏어입고 원래 그 흡혈귀의 모습으로 둔갑까지 하면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분장이 완성됐지만
'불평하지 마요. 잠깐 입고 버릴거잖아요.'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도 못하나?'
무림의 천과는 완전히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 뱀파이어들의 옷은 그녀에게 있어서 굉장히 답답한 종류였다.
특정 부위의 차이 때문에 옷이 낀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천 년 묵은 여유의 둔갑술은 체형과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따라할 수 있었으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굴만 따라할 수 있는 거였다면 이런 작전은 애초에 실행조차 못했을 테니.
그리하여 세운 계획이
그녀가 뱀파이어로 둔갑하고 다른 두 명은 주술로 적당히 분장시킨 뒤 포로인척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다른 두 명도 그녀와 비슷한 수준으로 둔갑 시킬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적용 범위가 그 정도로 넓지는 않은 탓에 그건 불가능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마침 그들이 잡았던 뱀파이어도 포로? 부하?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을 2명정도 데리고 다녔었으니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것 같다는 판단 하에 내린 계획이었다.
[권속이라고 하죠. 조금 더 깊은 의미의 부하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에요.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하고 주인이 죽게 되면 같이 죽는.]
'들었나. 절대복종해야한다고 하는군.'
'어디 한번 명령 해보던가요. 목소리만 따라할 줄 알지 언어는 못 따라해서 저 안에선 말도 못하잖아요.'
'...'
그리고 이 계획의 가장 큰 결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목소리까지 따라할 순 있지만 정작 그들이 쓰는 언어는 모른다.
뱀파이어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세계 출신이고
필요에 의해 중원의 언어를 익히긴 했지만 그들의 기지에선 편하게 원래의 언어를 쓰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에 연결된 성녀로부터 언어를 해석 받는 건 가능하지만 성녀가 읊어주는 대로 말하려고 한다고 해도 발음이 부자연스러울 게 뻔했기에 결국 최대한 말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다른 뱀파이어들과 부딪히는 일을 최대한 피해야 했는데..
{아. 로엘. 돌아왔나? 두고 온 게 있다고 급하게 나가더니 꽤 빨리 돌아왔군}
-흠칫!
아무리 다른 뱀파이어들을 피해 다닌다고 해도 그들만 있는 기지 안에서 아예 부딪히지 않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성녀 덕분에 실시간으로 머릿속으로 통역이 들어오고 있지만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크게 의심 받을 수 있는 상황.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고 발음해야 하는지 빨리 물어봐봐요. 그리고 최대한 따라해보시고요.'
'지방 사투리도 아니고 아예 다른 차원의 언어를 발음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나?'
'싸, 싸우지 말게. 혹시 들켰다고 판단되면 바로 공격할 테니 모두 준비를..'
3명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음으로 주고받으며 난리가 나는 사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들고 있는 인물이 입을 열었다.
[무표정으로 응시하면서 저자를 향해 말없이 중지를 들어보세요.]
'?'
[아마 될 거에요. 뱀파이어들은 대부분 성격이 지랄 맞고 합이 잘 안 맞는 편이니 이래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죠.]
기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인 상황에 중지를 들라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리가 없는 그녀는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우선 성녀의 말대로 행동했다.
-척
{...쯧. 무슨 말을 못하게 하는군. 됐다. 나도 바쁜 몸이라 너랑 놀아날 시간은 없으니 너도 네 실험실로 꺼지기나 해. 지금 로드님 심기가 안 좋으신 거 같으니 괜히 거슬릴 일은 하지 말고.]
'...이게 되는군.'
졸지에 말 한번 걸었다고 법규를 받은 뱀파이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신기하네요. 대체 무슨 뜻이길래.'
[만수무강 하라는 뜻이랍니다.]
'좋은 뜻인데 왜 기분 나빠하죠?'
[그야 뱀파이어는 이미 죽은 존재니까요.]
'아하.'
왜 뱀파이어가 그렇게 기분 나빠했는지 이해하는데 성공한 셋은 다시 기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냥 무작정 탐색하는 게 아니라 나름 단서는 가지고 있었다.
[이 구조면.. 음.. 아마 여기서 두 칸 더 앞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회전한 다음에 쭉 가면 뭐가 보일 거에요.]
이미 뱀파이어라면 질릴 정도로 상대해본 길잡이가 그들에게 있었으니까.
[어 아무것도 없네요. 그러면 4칸 뒤로 가서 계단을 올라가고..]
...물론 아무리 경험이 있다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건축물의 구조까지 완벽히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효과가 있던 걸까
'...누가 지키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저 안에 뭐가 있긴 있는 것 같군. 안쪽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네.'
'이제 여기서 어떻게 하면 되지?'
[반응 못할 속도로 목을 베어버리는 걸 추천드려요.]
'들었나? 가게.'
'...'
여소천은 어째 부려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인상을 찌푸리며 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파직!
-팍!
일반인은 눈으로 제대로 보지도 못할 속도로 문앞을 지키던 뱀파이어의 목이 잘려나갔다.
아마 그 본인도 본인이 목이 베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혹시 피가 튀어 소음을 일으킬까 검에 두른 번개로 혈관을 지져 놓아 피가 밖으로 튀지도 않았다.
검후도 빠르게 적을 베는 것 정도야 가능하지만 사용하는 무공의 특성상 속도는 여소천이 훨씬 빠르기에 먼저 나섰고
검후 또한 그걸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여소천이 나설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조심해서 열게. 안에 함정이 있거나 매복 중일지도 모르네.'
아무리 그들의 기감으로 안쪽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해도 세상에 완벽이란 건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잘 모르는 이계의 기술을 상대하는 만큼 더더욱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고.
'...열게요.'
-끼익
무슨 일이 일어나도 빠르게 발을 뺼 수 있는 여소천이 대표로 문을 열었고 나머지 둘은 뒤에서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지만
'...'
'...'
'...아무것도 없는 거 같은데요?'
정작 문을 열어도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뒤 그들은 여전히 경계를 잃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고
'...이건..'
그들은 발견할 수 있었다.
거대한 핏빛 구체와 그 주변을 둘러싼 불길한 기운.
선명하게 실체화된 죽음의 기운을.
'...으음...'
그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말문을 잃은 사이 성녀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미 의식은 시작된 뒤였네요. 다행히 아직 늦지는 않았어요. 간단한 의식도 아니고 앞으로도 몇 달은 더 지나야 끝날 의식이에요. 그 전에 바르슈타인을 죽일 수만 있다면 이 의식도 자연스럽게..]
"으음.. 피곤해서 잠시 잠들었었군. 너희들이 내가 말한 재료를 들고 온 녀석들이.."
그리고 그 순간 다른 여소천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하는 지조차 모르겠는 다른 뱀파이어들과 달리 유창한 발음의 중원어.
"...뭐냐 너희들. 왜 심장 뛰는 소리가.."
피곤한 목소리와 함께 방 구석에 있는 문에서 나온 걸 보아 방금 자다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뱀파이어 로드답게 그들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고
-파직!
"...! 이런 젠자ㅇ.."
여소천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푸른 번개를 휘감고 검을 내지르자 그 또한 반응하며 순식간에 검은 날개를 펼쳤다.
-콰드드득!!
"끄으윽!!"
"이번엔 안 놓쳐!!!!!!!"
"이런 망할 계집이..!!"
시작과 동시에 기습으로 뱀파이어 로드의 날개에 큰 상처를 새긴 상황.
여소천은 처음부터 목을 노렸지만 그 순간 반응하고 몸을 비튼 탓에 날개 한쪽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조심하세요. 경보가 울렸으니 곧 기지 안에 있는 모든 뱀파이어들이 이쪽으로 몰려올 테니까.]
그와 동시에 그의 상처에 반응한 건지 기지 전체에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고
"그동안 잘도 남의 세계에서 민폐를 끼쳤네요. 이제 정말 끝낼 차례에요."
"..."
-까득
중원의 운명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