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234화 (234/250)

[234화] 12장-피로

여소천과 검후님, 스승님이 떠나셨다.

실체는 없지만 성녀님까지.

당장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북적거리던 집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6명과 1명이 채우던 사운드를 3명이서 채우려면 쉬지 않고 수다만 떨어야 할텐데 딱히 수다 떨 거리도 없었고.

'성녀님. 진짜 없어요?'

[...]

'상점창은 제대로 열리긴 하는데..'

나는 간만에 한가해진 머릿속에 한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좀 귀찮을 정도긴 해도 말을 걸기만 해도 대꾸해주던 존재가 계속 머릿속에 있었는데 그게 사라지니까..

'완전 편한데.'

간만에 해방감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게 말이 좋아서 답장해주는 거지 일거수일투족도 모자라서 생각까지 감시 당하는 건데 그렇게 2년을 살다가 겨우 해방된 상황이다.

채널을 나한테서 완전히 거둬간 게 아니라서 내 얼굴 정도는 보인다고 했는데 그건 다른 말로는 생각은 못 읽는다는 것 아닌가.

심심할때 머릿속으로 trpg를 했던 기억은 꽤 괜찮았지만 아무튼 간만에 상쾌한 기분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성녀님이 없는 지금이 어떻게 해야 이 계약을 파토낼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 아닌가.

우선 이 계약의 구조부터 파헤쳐야..

...

'어떻게?'

생각해보니 내가 뭐 아는 게 없는데 뭘 어떻게 파헤친단 말인가.

드라이버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컴퓨터의 구조를 알아내려고 하는 꼴이었다.

당장 나도 영혼이 계약에 묶여있다는 느낌만 받을 뿐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내가 혼자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니 영혼을 잘 아는 사람한테 물어봐야..

'...누구한테?'

또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이걸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맺은 계약 자체가 무림 것도 아니고 판타지 거라서 아는 사람을 찾기 더 힘들텐데 이 세계에 영혼을 연마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진 않았다.

경지가 굉장히 높은 사람이면 어렴풋이 단서를 줄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지금 그 사람들이 다 나가서 문제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냥 반쯤 포기하고 거실에 있는 의자에 벌렁 드러누웠다.

뭐 발악을 해보려고 해도 쥐구멍 정도는 보여야지 발악을 해보지

최소한 숟가락 정도는 쥐여줘야 그걸로 벽파서 탈옥 시도라도 해보는 거다.

아무것도 없는데 손톱으로 잘도 벽을 파겠다. 그 정도면 그냥 감옥 안에서 늙어 죽고 말지.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사실 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성녀님 세계에 끌려가는 순간 내 인생은 끝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 이 세계에서 있는 인연도 끝이고 다른 세계에서 그냥 사는 것도 아니고 수십, 수백년을 종마로 살아야하는 인생으로 전락한다.

남자가 나밖에 없는데다 심지어 태어나는 애들마저도 남자가 없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놓인 세계라고 하니 얼마나 심각한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내 한 몸 바쳐서 다른 세계가 유지할 수 있게 해줄 만큼 성인군자라면 모를까

1년에 햇빛 구경을 10분 시켜준다는 사람 말을 어떻게 믿을까.

'진짜 어쩌냐..'

성녀님에 관한 건 생각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가 솟는다.

그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시험 기간 때 공부하긴 싫은데 하긴 해야 할 거 같고 그렇다고 하기는 정말 죽도록 싫고 그런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하면서 스트레스가 샘솟는 그런 상황.

지금 내 상황이 그거랑 비슷했다.

미쳤냐고. 그딴 인생으로 살 거냐고 묻는 목소리가 대다수지만 일부분은 그래도 오죽하면 저렇게 까지 할까 하는 동정심도 있었다.

실제로 성녀님한테 도움을 많이 받은 건 사실이고 갚아야 할 은혜도 많이 있으니까.

아무튼..

'...오늘은 그냥 쉴래.'

아직 어제의 피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스승님한테 충격적인 고백을 듣고.. 스승님이랑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몸을 섞고.. 갑자기 천마가 멋대로 찾아와서 빙궁이 무너진 걸 얘기하고 가고..

이게 전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다.

정신적으로 부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한숨 푹 잤다고 해도 아무리 잠이 보약이라지만 그거 가지고 모든 스트레스가 다 풀렸으면 세상에 정신병이 없었을 거다.

그렇다고 지금 자기엔 딱히 피곤하다는 느낌의 피로가 아니라 새로운 걸 하고 싶다는 느낌의 피로라서..

-벌컥!

"소저. 산책이나 나갈래요?"

"갑자기요?"

"제가 바람 좀 쐐야 할 거 같아서요."

자신의 방에서 머리를 빗고 있던 당아영은 피식 웃더니 빗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향했다.

"뭐 저희 서방님이 나가고 싶으시다는데 나가드려야죠. 혼자 보냈다가 시비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아직은 서방님 아니라니까."

"아직 식만 안 올렸지 사실 거의 그쯤.."

"어허."

"...쳇. 은근 쩨쩨하다니까."

편의상 당아영, 여소천, 검후님을 부인들이라고 속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지 엄밀히 따지면 아직도 식은 제대로 올린 적이 없다.

동거 중이고 몸도 섞는다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혼인관계로 쳐도 되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한 건 아직 없지 않은가.

프로포즈도 아직 못 받았고.

'아니 얘 또 뭐래.'

내가 해야지 왜 받을 생각을.

아니 근데 이제 스승님까지 하면 4명인데 프로포즈를 어떻게 하지?

4명한테 동시에 해야 하나?

"어쨌든 뭐가 다 끝나고 생활이 평온해지기 전까지 혼인은 생각 없어요. 혈교도 잡고 천마 문제도 해결해야죠."

"전에는 스승님한테 허락만 받으면 바로 해준다면서요."

"원래 사람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에요. 계획은 닥친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수정할 필요가 있.."

"네~ 네~. 알았으니까 나가주세요. 저 외출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니까."

당아영의 말을 듣고 하던 말을 멈추고 바로 등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원래 여기서는 좀 도와준다던가! 부끄러워하면서 지켜본다던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매정하게 진짜 나가는 게 어딨어요?!"

"소저가 나가달라면서요."

"흥! 됐어요. 진짜 삐졌으니까. 빨리 나가기나 하세요."

...나름 같이 지낸지 3년째인데 아직도 여자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옷 갈아입는 걸 본다고 뭐 감흥이 생길까.

내가 침대 위에서 밤새 뒹굴다가 아침 된 다음에 밥 차려 주겠다고 방금 전까지 뒹굴던 그 상태로 몸 위에 옷을 걸치던 모습을 몇 번을 봤는데.

"아.. 근데 오늘 밤은.. 어디서.. 주무실..건지.."

"...?"

"모, 모처럼 다른 분들도 가셨는데.."

"...아직 밖에 한 명 있어요."

"아하하 제가 그걸 까먹고 있었네요. 역시 사람은 자기 방에서 자야죠."

그 와중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한번 해보려던 당아영이 거실에 자발적으로 묶여있는 검후님의 제자의 존재를 깨닫고 한발 물러섰다.

...죽었다 살아나서 성욕이 쌓였나?

원래 사람은 죽기 직전에 본능적으로 자식 번식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던데 이게 그런 상황에서도 적용이 되려나 궁금했다.

생긴건 청순계 히로인인 여자가 은근 성욕이 넘친단 말이지.

진짜 나라서 버틴 거지 내 정력이 평범한 편이었으면 진작에 복상사했을거다.

혹시 모른다. 정력이 시원찮으면 억지로 약이라도 먹일지.

실제로 예전에 가끔은 독특한 플레이를 해보자며 약 먹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어우..'

아직도 그떄를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릴 정도로 위험한 순간들이었다.

아무튼 당아영의 방에서 나온 뒤 당아영을 기다리며 거실에 묶여있는 검후님의 제자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밖에 나갔다 오시게요?"

"네. 할게 좀 있어서."

"그러면 집은 제가 지키고 있으면 되겠네요. 잘 다녀오세요. 아, 제, 제 집이라는 게 아니라 혹시 도둑 같은 게 들어오면 제가 물리치겠다는 말이었어요."

"...그 상태로요?"

앞서 말했듯 검후님의 제자는 지금 묶여있는 상태였다.

팔을 뒤로 모은 다음에 손목이 묶여있는 상태라 서있는 것도 제대로 못할 텐데 저런 몸으로 도둑을 잡겠다니.

"잡을 수 있어요! 원래 무인이란 신체가 제한된 상태에서도 최소한의 전투력을 유지하는 연습도 해 놔야 하는 법이거든요! 전력을 내는 건 당연히 무리지만 이대로도 도둑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다구요!"

"...못 믿겠는데."

"으읏.. 그러면 직접 보여드릴 테니까 한번 봐보세요!"

-벌떡!

"?"

묶여있는 상태로 누워있던 그녀가 갑자기 가볍게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몰라서 무슨 대처를 할지도 생각 못하고 있었고

-휘릭

-쿵!

"억!"

"자. 보세요! 다리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라도 이 정도 제압쯤은 할 수 있다구요?"

눈 깜짝 할 사이에 무슨 레슬링 기술 당하듯이 쓰러졌다.

덕분에 시야에 보이는 건 천장..이랑..

"..."

-물컹

음..

정신차리자 단유성.

몸만 성인이지 안쪽은 아직 애다.

"...일단 알았으니까 좀 비켜보세요."

"아, 앗! 죄, 죄송합니다! 직접 보여드린다는 게 이런.."

"..."

얘는 방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는 있는 걸까.

보니까 성적인 자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았는데.

'하아..'

분명 여기서 숫자를 더 늘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어째 주변에 여자가 계속해서 꼬이는 느낌이었다.

나한테 여자를 끌어당기는 자석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는 준비 끝났어요. 당신이 괜찮으면 바로 출발.."

그리고 하필 그 타이밍에 당아영이 방에서 나와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못한 우리를 발견했고

"......"

"오해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표정이 이상하게 물들어가던 당아영을 납득 시키는 데는 5분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