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11장-원정
"그러면 그 채널이라는 게 지금 스승님한테 옮겨진 거죠?"
[네. 조금.. 갑작스럽게 바꾸긴 했지만 옮기긴 제대로 옮겨졌어요. 한번 확인해보실래요? 이제 속으로 말하셔도 제가 못 읽는데.]
"오 그러면 제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맞춰보세요."
성녀님에게 그렇게 말한 뒤 속으로 강아지를 생각했다.
과연 이걸 맞출 수 있을까
['이걸 맞출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네요.]
"아니 잠깐만 그건 반칙이죠."
[세상에 정정당당이란 말 말큼 비겁한 말은 없답니다. 애초에 그런 약속이나 룰을 정했다면 모를까, 쓰지 않기로 제한되지도 않은 수를 쓰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음.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군. 반박할 수가 없다.
아무튼 이걸로 성녀님이 더 이상 내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건 확인했다.
평소의 성녀님이었으면 그냥 바로 강아지라는 대답이 나왔을 테니까.
아무래도 채널이라는 게 스승님한테 건너가면서 그렇게 된 거 같은데..
'...지금 대답하면 소원하나 들어줄게요.'
-움찔!
'...방금 몸 살짝 떤 거 봤어요.'
[그.. 으.. 그래도 전부 옮기면 제가 용사님 성분이 부족해서 말라 비틀어버릴지도 모르니까.. 5%정도는 남겨뒀는데..]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다.
무슨 식물도 아니고 말라 비틀어지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수십 년 동안 24시간 감시해 놓고 고작 며칠 못 보는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용사님까지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저한테 용사님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이런 삶에서 용사님까지 없으면 저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알았으니까 스승님한테 가요.'
[으아아앙!!]
성녀님은 내 모진 태도에 상처 받았는지 울면서 내 머릿속에서 나가셨다.
성녀님의 보기 드문 우는 모습이었지만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저 사람한테 속는 게 어디 하루이틀이어야지.
순진한 줄 알았더니 그런 거부할 수 없는 순간에 계약서를 강요한다는 뒤통수까지 세게 맞지 않았던가.
성녀님 쪽의 사정도 이해는 가지만 나는 나대로 내 인생이 걸린 일이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을 어떻게 해결하지 못하면 언젠간 저 성녀님 손아귀로 떨어지는 게 확정된 상황이었으니까.
"오오.. 이건 꽤 신기하구나. 전음이랑은 뭔가 다른데 한번 연구해봐야.. 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 사이 스승님은 머릿속에 들어온 성녀님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신 것 같았다.
...근데 그러면 성녀님이 지금 스승님 생각을 읽고 있는 건가?
'뭔가 궁금하네.'
아무리 나라도 스승님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어서 성녀님이 생각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자 호기심이 생겨났다.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무표정을 유지하는 사람이라 예전엔 내가 뭐 잘못해서 이러나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근데 그렇다고 성녀님한테 스승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하는 것도 스승님한테 뭔가 미안하니까..
'...에이 뭐 그냥 안하고 말지.'
멋대로 남의 생각을 읽는 것도 무례한 일이다.
내가 스승님 생각을 모른다고 뭐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딱히 상관없다.
[아. 이분 생각은 못 읽어요. 속으로 제게 말을 건네는 것 정도는 읽을 수 있는데 무의식이라거나 심층의식이라거나 그쪽은 이미 나름대로 방어를 갖추고 계시네요.]
'...그런 걸 만들 수가 있어요?'
[당연히 용사님은 못 만들죠. 무공이나 마법이라도 익히셨다면 모를까 일반인이신데.]
'야이.'
[흥. 먼저 심술부리신 건 용사님이에요. 지금이야 아직 가까이 있으니까 대화가 되는 거지 떨어지면 고작 5%짜리 채널로는 용사님 얼굴도 겨우 보이는 수준이라구요. 그동안 부디 저의 소중함을 느껴보시길.]
...아무래도 정말 삐진 모양이었다.
딱히 성녀님이 없다고 소중함을 느끼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일단은 대충 대꾸해주자.
'확실히 아쉬울 것 같네요.'
[그, 그런 의미로 오늘은 밤새 수다라도..]
'제가 요즘 잠이 부족해서.'
[으아아앙!!]
그렇게 또 성녀님을 쫓아낸 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이쪽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하고 있는 다른 여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옮기는 건 끝난 것 같아요. 아마 바로 가도 될 것 같은데. 자세한 건 스승님한테 물어보세요."
"이 여자는 언제든 준비 되어 있다고 하는구나. 뭣하면 지금 당장 출발해도 상관 없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어떻지?"
"저는 상관없어요."
"나, 나도 상관 없..습니다?"
...아직 검후님은 스승님한테 반말을 해야 하나 존댓말을 해야 하나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거의 존댓말을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그러면 바로 출발할까요. 녀석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지도 모르고 시간을 더 끌어서 이쪽에서 좋을 것도 없으니까요. 섬서에서 기껏 힘을 쏟아부은 모양인데 그것도 저 하얀 마녀 덕분에 무산된 것 같으니 충격이 남아있을 때 기습해야 더 효과적이겠죠."
"특별히 상처입은 곳도 없고 피로도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싸우는데 무리가 있는 수준은 아니네."
"직접 싸우는 건 오랜만이지만.. 뭐 짐이 되지 않을 자신 정도는 있다. 강시들은 불에 잘 타기도 하고."
"그러니까 강시랑은 조금 다르.. 에휴 됐어요. 그러면 바로 출발하죠."
여소천은 그렇게 말하면서 성녀님이 위치를 표시해준 지도를 돌돌말아 챙겼다.
"3곳이니까 하루에 하나씩 들르는 걸 목표로 해보죠. 진짜 본거지를 발견하면 상황을 보고 바로 기습하거나 조금 준비를 갖추고 돌격하는 식으로. 운 좋으면 한번에 찾는 거고 아니면 3번째에 찾겠네요."
"마차는 없나?"
"마차는 무슨 마차에요. 경공으로 뛰어가야지."
"...그거 꽤 귀찮겠구나. 혹시 업어줄 생각은 없느냐."
"요괴한테 제 등을 허락하라고요?"
"제자녀석이 사고만 치지 않았더라도 진작에 요괴생활은 끝났을 거다."
"결국 아직은 요괴잖아요."
"쯧."
여소천과 스승님은 정말 바로 나가려는 듯이 채비를 준비하고 있었고
"소연아. 이 스승은 또 일이 생겨서 잠시 다녀올 테니 사고 치지 말고 이분들 옆에 있거라.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네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고."
"네! 당연히 그래야죠!"
"음. 믿고 있으마."
검후님도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당부의 말을 남기고 있었다.
...아니 잠깐 진짜 이대로 출발한다고?
"아니 진짜 지금 가요?!"
"진짜 지금 가세요?!"
그 와중에 나랑 마음이 통한 건지 당아영은 나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나요. 지금이 혈교에게도 여유가 없을 때에요. 정황상 그들의 습격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만약 성공했다고 해도 그 정도라면 타격이 아예 없지는 않겠죠. 특히 그렇게 겁쟁이처럼 꼭꼭 숨어 다니던 녀석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봐야 해요. 어찌 됐든 지금이 습격하기 가장 좋은 기회라는 거죠."
"두, 두분은 안 쉬어도 돼요?"
"안 지쳤다고 하면 거짓말이긴 한데.. 뭐..만전의 상태가 아닐 뿐이지 싸울 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에요. 정말 단서를 잡으면 그 뒤엔 상황을 보고 정비를 하거나 할 거고요."
"어.."
논리적으로 맞는 말들 뿐이었다.
그리고 본인들이 괜찮다는데 제3자가 뭐 어쩌겠는가.
내가 저 둘 몸 상태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이번엔 저희 셋이 갔다 올게요. 독봉 당신을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알고 있죠?"
"어.. 네.. 잘 지키고 있을..게요. 이번엔 꼭.."
"어차피 바로 전에 섬서에 그런 일을 일으켜 놓고 또 오진 않을 거에요. 저래 보여도 무림맹이 이번에 느낀 게 꽤 있거든요. 복구에만 힘쓰는 것 같지만 다시 쳐들어오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니 한번 기대해보세요."
"..."
여소천의 말을 듣고 나와 당아영은 속으로 습격 당시의 일을 생각했다.
사실 원래 계획 대로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무림맹으로 뛰어가서 안전을 확보하는 거였는데 정작 당시엔 그게 잘 안됐다.
이미 마을 전체가 화재에 휩싸이고 흡혈귀가 싹 깔려서 무림맹까지 가는 길을 내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근데 그렇다고 무림맹이 완전히 안전했냐고 하기엔 그쪽도 흡혈귀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서 상태가 좋지만은 않다고 하니..
'참 세상에 안전한 곳 찾기가 뭐 이리 힘드냐.'
원래 무림이 위험한 세상이라곤 하지만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흡혈귀들은 원래 무림에 있어야 할 애들도 아니었고.
"그러면 갔다 올 테니까 다치거나 죽지 말고 무사히 계세요. 지금은 마녀도 이쪽에 붙어있어서 저번처럼 요행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테니까."
"지금 머릿속에서 말 좀 전해 달라고 난리를 이건 어떻게 하지?"
"무시하세요. 그 여자는 당신 제자랑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
"그런가. 요즘 세상엔 참 이상한 사람이 많군. 아무 관계도 아닌 이에게 이 정도로 열렬하게.."
...아무래도 성녀님은 스승님이랑 나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진 것 만으로도 내게 따로 말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잠시 동안이겠지만 소연이를 잘 부탁하네."
"밥 잘 먹이고 잘 씻기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쟤가 어린애인거지 강아지인 건 아닌데요."
"뭐 어때요. 동생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죠."
그렇게 다사다난한 작별인사를 끝낸 뒤 여소천과 검후님, 스승님은 정말 집 밖으로 사라졌다.
집에 남은 건 나와 당아영. 그리고 검후님의 제자까지 3명.
"..."
"..."
"..."
앞에 3명이 사라지자 우리 사이엔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 아. 맞다. 자, 잠시만요. 원래 스승님한테 말했어야 했는데 까먹었었다."
검후님의 제자가 그 침묵을 깨고 입을 열며 나에게 어떤 물건을 건넸는데
그 물건은..
"...밧줄?"
"저, 저 좀 묶어주세요."
"...네?"
"비, 비록 제가 거짓말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저를 완전히 믿진 못하실 거 아니에요? 그, 그리고 혹시 언제 또 제게 남아있는 혈교의 기운이 날뛸지 모르니까.. 그냥 묶어두시는 게 마음에 편하실 것 같아서.."
"..."
...맞는 말 같은데 왜 뭔가 기분이 이상하지?
"그러면 저한테 주세요. 이 사람이 매듭 묶는 법을 몰라서 제가 대신 묶어드릴게요."
"앗.."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검후님의 제자는 당아영에게 떨리는 손으로 밧줄을 건넨 뒤 손을 등 뒤로 모으고 얌전히 당아영의 구속을 받아들였다.
왠지 뭔가 이상한 기분이 한참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