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11장-도움
[좋아요. 그러면 이 여자도 돌아왔으니 설명해드릴게요. 중간에 궁금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보세요. 그 편이 이해하기 쉬울테니까.]
다행히 여소천은 금방 정신을 차리는데 성공했고 평소의 표정을 유지한 채로 자리에 무덤덤하게 앉아있었다.
아까 일은 건들지 말라는 티를 대놓고 내고 있었기에 나도 조용히 앉아서 반성하는 듯한 태도로 성녀님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아마 내가 아는 여소천이라면 겉은 저렇게 덤덤해 보여도 아직 안에선 난리가 나있을 것 같지만.
[우선 당신들이 혈교라고 부르고 있는 뱀파이어라는 종족에 대해서 설명해야겠네요. 그들은 죽음의 초월자. 살아 움직이는 죽음이라는 개념. 죽지 않은 자들의 왕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종족이에요. 그래도 그전부터 사령술사들에 의해 개념 자체는 세상에 기록된지 오래인 좀비, 스켈레톤 등의 언데드들과 다르게 아예 그에 의해서 창조되고 세상에 나타난 종족이니까요. 덕분에 그런 뱀파이어의 시조이자 모든 뱀파이어들의 주인인 바르슈타인은 다른 권속들보다도 훨씬 더 그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요.]
"어.. 질문이 있어요."
[네. 뭐죠?]
"사령술사.. 좀비.. 스켈레톤.. 언데드..가 뭐죠? 뱀파이어라는 게 저희가 지금 부르고 있는 혈교인건 알겠는데."
[...]
성녀님은 기록지까지 들고 적극적인 태도로 성녀님의 말을 경청하던 당아영의 질문을 듣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나랑 대화할 때는 그냥 저렇게 얘기해도 됐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중원 출신이었기에 저렇게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가 계속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령술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도 되실거고요. 언데드는 생명으로서 이미 죽었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다시 살아나서 움직이는 개체들을 의미해요. 좀비와 스켈레톤, 뱀파이어가 그에 해당하고요.]
"아하."
[...앞으로 쓰는 단어는 조금 주의를 해야겠네요. 용사님이 아닌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워낙 오랜만이다 보니..]
'?'
저 말고는 대화를 안하고 지내세요?
[......10년도 더 넘는 시간 동안 24시간 용사님만 감시하고 있다 보니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일이 거의 없죠.]
'아하.'
그래도 좀 친구나 그런 사람들이랑 대화 좀 하고 그러세요. 정신 건강에 안좋을텐데.
[배려해주셔서 감사하네요..]
또다시 잠깐 나와의 개인 통신을 주고받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설명을 이어갔다.
[저희 세계는 그 언데들과 수백 년 동안 전쟁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큰 상처가 남긴 했지만 이기는데 성공했어요.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덕분에 모든 언데드들이 소멸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히 소멸했을 뱀파이어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세계에서 부활해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죠.]
"그들이 건너온 이유는 모르나요?"
[추정되는 건 있지만 복잡해서 설명해드리기 어렵네요. 사실상 모른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다만 이 세계에서 부활한 이후 그들의 행적을 보면 그들의 목표 자체는 확실하죠. 그들의 군주의 부활.]
이건 이미 여소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 세계에 그들의 군주를 소환하려고 하고 있고 그걸 위해서 지금 숨어서 개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라고.
[혹시 몰라서 말해주는 거지만 그가 이미 부활한 다음에 막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에요.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형상화된 존재가 세계에 나타난다는 게 그 세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지 않는 편이 이롭거든요.]
-꿀꺽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길래.."
[일단 전세계의 인구 절반이 날아갈 각오 정도는 해야겠죠? 명심하세요. 그를 막는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가 부활하는 순간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하세요. 당신들에게 남은 시간은 결코 많지 않다고.]
성녀님은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이 자리에서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
우선 부활한 순간 아주 긴 시간 동안 전쟁이 시작될 거고
성녀님의 세계에서 인간 측은 분명 그를 이겼었다.
소멸하는 와중의 그가 남긴 저주로 인해 세계가 멸망의 운명에 빠진 거지.
결국 그가 부활에 성공한다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전쟁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인류의 운명은 좋지 못하다는 것.
어떻게든 그의 부활을 막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자, 그러면 중요한 건 그 부활을 어떻게 막냐는 거겠죠. 그건 뭐 간단해요. 부활 의식을 하기 전에 뱀파이어들의 군주를 죽이는 거죠. 모든 뱀파이어의 시조인 그 하나만 죽이더라도 남아있는 모든 뱀파이어 개체는 소멸하거나 그 힘을 잃을 테니까. 근데 뭐. 이건 이미 그쪽의 성녀 분은 알고 있는 이야기겠죠.]
"...방금 그런 쓸모없는 이야기 말고 당신을 부른 이유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뭐, 방금 이야기한 것들은 사실상 다른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정도고. 당신이 궁금한 건 그의 약점. 성격. 그가 있을법한 위치 등 그를 막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정보겠죠. 그런데 뭐.. 그 뱀파이어들의 가장 큰 약점인 햇빛과 신성력이 이 세계에선 통하지 않잖아요? 무력으로 직접 떄려 잡으시는 방법밖에 없어요. 흐르는 물 위를 건너지 못한다. 초대받지 못한자의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같은 약점이 도움이 되진 않을 테니까.]
"..."
[아, 알았어요. 지도라도 가져와 보세요. 그 자들이 숨어 있을만한 장소를 집어줄 테니까.]
기껏 수모까지 당하고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여소천이 성녀님을 살벌한 눈으로 바라보자 성녀님이 두 손을 들면서 지도를 요구했다.
"..지도만 있다고 알 수 있어요?"
[제가 그 자들이랑 얼마나 오랫동안 싸웠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주변의 지형과 특징이 제대로 설명된 지도만 있으면 그들이 어디 숨어있을지 정도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어요. 그 자들이 저를 의식하고 숨었다면 모를까 다른 세계까지 와서 저를 의식하지도 않았으니 그들의 습성을 통해 판단하면 범위 정도는 확 좁힐 수 있죠.]
"...기다려보세요. 구해와 볼 테니까."
여소천은 그렇게 말하며 집 밖으로 나섰다.
아마 정말로 지도를 구해오려는 모양이었다.
-쿵!
"..."
[...]
여소천이 나간 뒤 딱히 할 말이 없어진 우리는 다시 정적을 유지하다가 당아영이 입을 열면서 다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그런데 성녀..님은 평소엔 어디에 계세요? 지금은 허공에 둥둥 떠계신데.."
[음.. 제가 지금 허공에 보이는 이유가 제가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 이 네모난 상자 안에 다른 곳에 있는 제 모습이 보이는 거에요. 저는 지금 아예 그 차원에 있지도 않아요.]
"그, 그건 대충 그럴 거 같았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팟! 하고 나타나셨잖아요. 말하시는 걸 보면 청뢰검님이나 그이랑 아는 사이 같으신데.. 평소엔 어디 계시나 해서.."
[아.. 그게 질문이었군요. 음.. 평소엔 용사님 옆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어요.]
"아.. 그이 옆에서 모습을 감추.."
-멈칫
당아영은 말을 잇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말을 멈췄고
"계, 계속 있는 건 아니죠..? 잘떄라거나.. 화장실에 간다거나.. 남들이 보면 좀 그런..일을 할 때는 없는 거겠죠?"
순식간에 성녀님의 진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아마 성녀님이 계속 내 곁에 있다고 했으니 나와 당아영이 몸을 섞는 모습도 봤을걸 걱정한 것 같은데..
[에이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평소엔 용사님 곁에 있을 뿐이지 떨어져 있어야 할 때는 제대로 떨어져 있는다구요.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저는 필요해서 용사님 곁에서 지낼 뿐이지 관음 취미가 있는 게 아니에요.]
"다, 다행이네요.."
'?'
성녀님의 말에 안심하는 당아영을 보며 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이게 뭔소리래.
24시간 365일 프라이버시 하나 안 봐주고 감시하는 사람이.
'...성녀님?'
내가 그런 감정을 담아 성녀님을 부르자 성녀님이 눈치를 보는 목소리로 변명을 시작했다.
[그..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감시하고 있다고 하면 저분 입장에선 불편할 수 있잖아요. 옛날에 하루가 멀다하고 용사님이랑 몸을 섞던 것까지 다 보긴 했지만 여성분 입장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런 걸 지켜봤다고 하면 정신적으로 충격을 입을 수도 있으니..]
'나는?!'
여자만 충격 받는 거 아니거든요?!
남자도 받거든요?!
[용사님은 공공재라 괜찮아요.]
'...개너무하네 진짜.'
안 그래도 남자답게 행동도 못하고 침대에서 깔려 사는 것도 서러운데 공공재라고 하질 않나.
그래도 성녀라는 사람이 저래도 괜찮나..
원래 성녀는 몸도 마음도 순결을 유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여신님이 저런 글러먹은 성녀는 파면 좀 시켜야 하는 게..
[그런 게는 엘프들의 식탁 위에 올라갔답니다.]
...엘프가 해산물을 먹어요?
[엘프는 숲의 친구잖아요. 친구들을 먹을 수 없으니까 관련 없는 해산물은 먹어도 되죠.]
이건 또 신기한 발상일세.
저쪽 세계도 엘프가 멀쩡하진 않구나.
-벌컥!
"구해왔으니까 한번 봐보세요."
그렇게 내가 잠시 성녀님과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지도를 사온 여소천이 주변에 종이들을 펼쳤다.
여소천이 나간지 5분정도밖에 안된 것 같은데 정말 급하게 다녀온 모양이었다.
뭐 섬서에서 중원까지 하루도 안돼서 갔다 오는 속도를 생각하면 이 정돈 가뿐할지도.
[음.. 한번 봐보죠. 저는 물리력을 못쓰니까 제가 움직여 달라고 하는 부분들은 움직여주세요.]
그 뒤로 여소천은 바닥에 지도를 펼쳐 놓고 성녀님의 말대로 이곳저곳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정말
길고 길었던 싸움의 끝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