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11장-거래
내가 언젠가 성녀님 세계에 끌려가야 할 처지라 이 사람들이랑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져 있는 사이 뒤통수에서 익숙하고 포근한 감각이 느껴졌다.
-꼬옥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내가 그렇게 힘들어 보였나.
딱히 힘든 티를 대놓고 내진 않았던 거 같은데.
"아, 아니에요. 그냥 대화만 잘해도 해결할 수 있는 거고.. 그냥 걱정을 좀 했던 거지 고생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에요."
"내가 너를 모를 것 같으냐."
"..."
아닌 척은 해봤지만 역시 스승님을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뭐
나도 스승님이 힘들 때 아닌 척을 해도 알아챌 자신이 있는데 스승님이 나를 모를까.
여소천이 매번 나는 표정만으로도 생각이 다 읽힌다고 말하는 걸 생각하면 내가 본심을 감추는데 그리 능숙한 것 같지도 않고.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 나도 도와줄 테니 그 강시 비슷한걸 만든다는 놈들부터 처리하러 가자꾸나."
"...스승님 그렇게 강했어요?"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인간보다 약해서 자존심이 살겠느냐. 적어도 네 눈앞에 있는 두명 정도의 수준은 되느니라. 익힌 게 무공이 아니라 정확한 비교는 할 수 없겠지만."
"오.."
아직 흡혈귀던 시절의 검후님의 제자를 손쉽게 제압했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느끼긴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전력이 갑자기 1.5배정도 늘어난 셈.
"훗. 조금 더 감탄해도 되느니라."
"그러면 천마도 이길 수 있어요?"
"...그 여자는 조금 힘들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괜히 멋진 척하는 스승님을 골려줄 생각에 반쯤 농담 삼아 괜한 질문을 던졌다.
당장 어제 천마를 앞에 두고 떨던 스승님을 봤는데 모를 리가 있나.
아무리 스승님이라고 해도 대놓고 인간을 넘어선 규격 외의 강자라고 계속 강조되는 천마에 맞서기엔 무리가..
"제자가 원한다면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
"내가 이길 확률은 극히 미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여자가 네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으니 그 스승인 나를 죽이진 않을 거라고 믿고 덤벼봐야겠지. 1만번 싸우면 한번 정도는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오히려 역으로 이쪽이 반격을 당했다.
"노, 농담이니까 그러지 마세요?! 진짜 그렇게 생각 안 했으니까!"
"뭐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큰일 날 뻔했네.'
하마터면 스승님을 황천길로 보낼 뻔했다.
천마의 성격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스승님이 내 스승님이어도 망설임 없이 죽여버릴 수도 있다.
혈교를 박살내버렸던 걸 생각하면 자기를 귀찮게 하는 적한테는 가차 없는 성격인 것 같은 데다 오히려 천기에서 그녀가 날 다뤘던 방법을 생각하면 스승님에게 자비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애초에 내가 왜 거기 계속 갇혀있겠는가.
누구든 구하러 오는 사람이 있긴 있었을텐데.
'...천마가 내 주변 사람을 모르니까 천기에 반영되지 않은 걸 수도 있지만..'
안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달라지진 않았을 것 같다.
검후님과 여소천, 그리고 스승님이 한번에 싸우더라도 천마를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는 상당히 회의적이었으니까.
"으음.. 그러면 천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미리 생각을 해둬야겠네요. 당장은 혈교가 가장 급한 문제긴 하지만.. 당신이 그 여자한테 끌려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서, 설득을 해보는 건 어떨가요? 이미 애인이 많다고.."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걸 신경 쓰는 여자가 아니더라고요. 당장 어제 봤잖아요. 그냥 집에 쳐들어와서 자기 할일 만 하고 가버린 거."
"으음.."
내가 스승님이랑 대화 중인 사이 다른 여자들도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저, 저기 스승님.. 혹시 지금 심각한 일인가요..? 지금 마교랑 천마라고.."
"그, 그게 말이다.."
검후님..은 제자에게 상황을 설명하느라 바쁘실 것 같았고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으니 조금 천천히 생각해보는걸로 하죠. 당장 혈교를 못 막으면 천마를 생각할 것도 없이 다 끝장이니까."
"아. 혈교를 상대할 때 천마를 끌어들이는 건 어때요? 어떻게 상황을 잘 설명해서 둘이 충돌하게 만들면.."
"아뇨. 위험도가 너무 높아요. 저 남자도 제안했던 건데 그 여자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런 위험한 적을 같이 상대하다가 그녀가 적에게 회유라도 당하게 되면 중원은 그날로 멸망이니까요."
"그렇긴 하네요.."
"시도해볼 가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정말 그녀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까지 상황이 말리지 않는 이상 시도하고 싶진 않네요.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죠. 그리고 혈교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결국 천마를 막는 일은 우선순위가 조금 뒤쪽이었기에 다시 현실로 돌아와 혈교를 막을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당신. 그 하얀 여자를 불러보세요."
"...에?"
갑자기 나한테 바톤이 날아왔다.
아니 잠깐만. 이걸 대놓고 말한다고?
성녀님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여소천 말고는 없는데?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거니 어서 불러보세요. 그 여자가 방벽에 이상한 구멍을 뚫고 당신과 통신중인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어.."
"어차피 지금 이 순간도 보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냥 적당히 나오시죠?"
[...쳇.]
성녀님은 여소천의 재촉에 혀를 차며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 띄워진 푸른색의 네모난 창과 그 안에 보이는 이국적인 외모의 여자.
"...이분은?"
[안녕하세요. 에르델 세인트리스라고 합니다. 편하게 에르델로 불러주세요.]
"에르.. 뭐라고요?"
[...성녀라고 불러주세요. 아마 그쪽이 발음하기 편하겠네요.]
성녀님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의 시선이 순식간에 집중됐다.
나타난 형태도 신기해. 외모도 신기해. 이름도 아무리 봐도 중원식 이름은 아니고 최소한 서역은 가봐야 들어볼 법한 이름이었다.
"호오.. 꽤 신기한 형태구나. 다른 차원과 실시간으로 상호작용을 하다니. 대체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통로가 길게 이어져 있고.. 기회가 된다면 연구하고 싶을 정도야."
[안돼요! 지금 이것도 위험하다고요! 알아채는 사람이 많을수록 방벽의 간섭력이 심해져서 지금도 정말 아슬아슬할텐데 연구까지 하면 분명 눈치챌 거에요! 이거 만드느라 몇십 년이 걸렸다구요!]
"그런가. 아쉽군."
"에륻.. 에르데.. 에르.."
스승님은 그 와중에 호기심에 눈을 빛내고 있었고 당아영은 조용히 혀를 굴리면서 성녀님의 본명을 발음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냥 성녀님이라고 부르면 되는데.
[저, 저기요! 이쪽 세계 성녀님! 불렀으면 빨리 본론으로 들어 가주지 않으실래요? 제가 이런 관심을 받는 건 조금 오랜만이라 부담스럽거든요?]
"어라. 그건 의외네요. 남한테 본인 민폐를 떠넘기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제 용사님을 가로채간 주제에 너무 당당하시네요! 저도 당신은 싫어요! 애초에 용사님이 제대로 이쪽 세계로 오셨었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고!]
"뭐, 싸우려고 부른 건 아니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죠. 자 우선 이 여자에 대해 설명해드릴게요. 다들 잠깐 집중하세요."
여소천은 잠시 성녀님과 으르렁거리다가 일행들에게 성녀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시작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혈교가 다른 세계에서 온 흡혈귀들이라고 했었죠? 그 다른 세계가 지금 이 여자가 있는 세계에요. 뭐.. 일부러 이쪽으로 떠넘긴 건 아니지만.. 한때 그 흡혈귀들과 싸워서 이겼던 세계라서요. 아마 정보를 얻는 데는 이 여자만한데가 없을 거에요."
[어.. 조, 조금 생략하긴 했지만 맞긴 맞아요. 이기긴.. 했죠. 네.]
성녀님이 뭔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사이.
"아아! 맞다! 생각났다!"
당아영이 눈을 크게 뜨면서 손뼉을 한번 치더니 손가락으로 성녀님을 가리켰다.
"그, 그때 저 구해주셨던 분 맞죠! 갑자기 그이 몸에 들어와서 이상한 주술 같은 걸 쓰고 흡혈귀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던!"
[아. 기억하시네요. 그땐 조금 급해서 성격이 지금이랑 달랐는데.]
"당연히 기억해야죠! 그때 덕분에 살았는데!"
그러고 보니 당아영은 성녀님을 전에 만났던 적이 있구나.
성녀님이 내 몸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는 내 의식이 없어져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진 모른다.
그래도 분위기나 그런 게 기억에 있었는지 당아영이 말하지 않아도 먼저 기억하는데 성공한 모양.
"독봉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그거 말고도 뭐.. 그이가 쓰는 신비한 물건들의 출처가 대부분 이 여자가 지원해주는 거라는 거랑.. 이 여자의 목적이.."
[...성녀님?]
"...뭐 이건 개인적인 일이니까 넘어가죠.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방금 뭔가 살벌한 분위기가 지나간 것 같았는데.
"아무튼. 당신을 부른 이유는 흡혈귀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거에요. 당신이라면 그들의 규모나 성격. 이런 걸 잘 알고 있을테니까요."
{너무 믿어주시면 곤란한데요. 그자가 저를 잘 아는 만큼 저도 그자를 잘 알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지는 확신해드릴 수 없어요.]
나름 프로들이라서 그런가
방금 살벌한 분위기가 지나갔었다는 게 착각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정도 정보 대조는 이쪽에서 할게요. 하나부터 열까지 당신한테 맡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렇게 맡기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음.. 좋아요. 그정돈 어렵지 않죠. 저희 세계에서 나온 녀석들이니 이쪽에도 책임이 어느 정도 있긴 하고요.]
"그러면.."
[근데 맨몸으로 정보를 원하시나요?]
-멈칫
여소천은 갑자기 달라진 성녀님의 태도에 당황한 듯했고
[오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성녀님의 분위기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거 장사꾼 맞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