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225화 (225/250)

[225화] 11장-꽃

[아까부터 쫑알쫑알 말도 많구나. 그렇게 내 제자에게 관심 있는 거라면 그 망할 태도부터 고치거라. 내 제자는 그런 성격은 질색하는 편이니.]

[...뭐?]

[뭐가 '뭐'냐.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도 막 죽이려드는 년을 좋아할 남성은 굳이 내 제자가 아니더라도 없을 거다. 물론 네가 성격을 고쳐온다고 해도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지만.]

자신을 유성이의 스승이라고 주장한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을 막아섰다.

조금만 더하면 유성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죽기 전에도. 죽었다 인간이 아닌 몸으로 살아난 이후에도 유성이를 손에 넣으려는 순간 방해가 들어왔다.

지금은 죽기 전 시절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해진 뒤였는데도.

그러나 진정으로 날 막아섰던 건 유성이의 스승이라는 여자의 무력보단 그 무심한 목소리로 말한 내용이었다.

'유성이가.. 나를 싫어해?'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말이었다.

죽기 전 유성이가 내게 보여줬던 모습은 누가 봐도 내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태도였다.

대놓고 친절하게 대해줬고, 누나라고 부르게 해달라고 하고, 항상 나를 향해 미소만 짓던 유성이가 나를 싫어할 리가 없지 않은가.

설령 유성이가 나를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이상의 애정을 쏟아 부어주면..

-멈칫.

'...그런 게 의미가 있나?'

상대가 나를 싫어하는데 내가 애정을 박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원래 생각하던 사랑의 의미는 분명 이런 게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감정을 교감하는 그런 아름다운 행위이자 감정이 바로 사랑일텐데

내가 하려는 건..

내가 그 짓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유성이의 실망, 슬픔, 분노, 증오 등의 감정과 유성이의 몸 뿐이었다.

설령 누군가가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고 해도.

"..."

-투둑

손에 쥐고 있던 검이 지탱하던 힘이 사라지자 중력에 몸을 맡기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뭘 원했던 거지?

유성이의 사랑?

아니면 유성이의 몸?

'...잘 생각해 한소연.'

후자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

유성이가 내게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평소 남에게 잘 보여주지 않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강간 당하는 장면을 보고 싶은 거라면 일단 다시 후퇴한 뒤 다시 유성이를 찾아서 기회를 잡으면 된다.

하지만 전자라면..

'...'

"소, 소저! 괜찮은 거죠? 어디 큰 상처는 없고요?"

"지금은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한참 늦은지 오래 아닌가.

-스릉

마음을 얻기엔 이미 늦어버렸으니 몸이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검을 들어. 한소연.

유성이를 원하잖아?

눈앞에 있는 마지막 장애물만 치우면 유성이를 손에 넣을 수 있어.

그러니까..

'...'

...머릿속에 퍼지는 목소리와 다르게 정작 현실의 몸은 바닥에 떨어트린 검을 줍지도 않은 그대로였다.

나는 유성이에게....

....뭘 원했던 걸까.

-화르륵!

눈앞으로 다가오는 거센 화염의 구체를 보며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었다.

.

.

.

"..."

당연히 그때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한번 죽은 몸을 다시 죽인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강시라고 죽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유성이의 애인도 죽이려고 했던 나를 왜 살려둔 걸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그 의문은 금방 해결됐다.

아마 그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뱀파이어들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거겠지.

...유성이는 내가 누군지 기억도 못하는 것 같았으니 괜히 그것 때문에 살려줬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억이 있었다면 오히려 더 죽였겠지.

자길 배신하고 단전까지 부순 것도 모자라 10년도 더 뒤엔 이제 애인까지 죽이겠다고 난리 치는 년이 뭐가 예쁘다고 살려둘까.

머리도 복잡하고 몸도 묶여있는 상태라 뭘 하지도 못한 채로 그 상태로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유성이와 그 애인으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유성이의 스승님이라고 했던 여자가 지내는 모습을 봤는데

...더 머리가 복잡해지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유성이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게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하겠지.

뱀파이어들에 대한 것도. 과거에 있던 일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많을 거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다.

전부 유성이가 물어보는 대로 대답해줬다.

그러나 전부 대답해주는 와중에도 한 가지 질문 만큼은 듣는 순간 입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저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죠?]

"......"

질문을 듣자마자 머리가 반쯤 멈춰버렸다.

사실대로 전부 말해야 할지. 왜곡해서 말해야 할지.

유성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게 얼마나 잃었는지 모르지만 나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상당한 양의 기억을 잃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도 유성이는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스승님이 나에 대해 이야기해준 것 같지도 않고

스승님도 그날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날 그 자리에 정확히 있었던 건 나와 유성이 뿐이었고 스승님은 일이 다 끝난 이후에 찾아와서 소식을 전해들은 거니까.

그러니까 스승님이 없는 지금. 내가 사실을 왜곡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었다.

사실 그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숨겨진 사정이 있었고 내가 단전을 부순 건 맞지만 그에 대해 오해가 있다..는 식으로.

...하.

'진짜 추하네.'

당장 며칠 전까지 눈이 돌아가서 유성이가 상처를 입든 말든 억지로 손에 넣으려고 하던 년이 이제 와서 유성이한테 미움 받는 게 두려워서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다니.

그런 식으로라도 유성이의 옆에 있고 싶은 걸까.

...유성이의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은 사실이지만 저런 거짓말을 하면서 까지 있고 싶진 않았다.

이미 그동안 충분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으면

이제 민폐 끼친 만큼 책임을 져야겠지.

어렸을 때부터 스승님께 질리도록 배운 대로.

-피식

'어렸을 때가 더 철이 들어있었을지도.'

오히려 속세와 다른 사람에 대해 모르고 스승님이 보여주고 가르쳐주시는 것만 알던 그 시절이 철은 더 바짝 들어있던 것 같다.

그땐 남들이랑 나누는 거에 대해서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유성이를 다른 여자에게 내어줄 수 없다는 뒤틀린 욕망의 폭주였으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진 덕분에 마음의 정리는 끝났다.

그냥 전부 사실대로 말할 거다.

유성이가 화산의 속가제자이던 시절 내가 유성이에게 첫눈에 반해 가깝게 지내다가 내가 잘못된 선택을 저질렀다고.

지금의 유성이가 내 말을 듣고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모르겠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당장이라도 이 망할 배신자의 목을 벨 것 같은데 유성이가 워낙 순하고 어려야지.

이제 유성이도 나름 성인이고 세상의 풍파를 맛봤을 테니 그때만큼 순하진 않을 거다.

외형은 정말 10년도 더 지난 게 맞나 싶을 정도 만큼만 자라긴 했지만.

'...스승님한테도 사과는 해야겠지.'

조금 엄하시긴 해도 좋은 스승님이셨는데 못난 제자를 둔 바람에 상처를 많이 받으셨을 거다.

지금 어딨는지를 모르니 나중에 물어보거나 사과라도 전해 달라고 해야..

-왈칵

"어?"

그 순간 식도에서 뭔가 역류하는 감각과 함께 입 밖으로 피가 튀어나왔다.

'내상?'

갑자기 몸 안쪽에서 피가 역류한다는 건 내상을 크게 입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조금 나오는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 꿀럭꿀럭 나오고 입도 모자라 코, 눈, 귀 등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피가 흘러나오는 칠공분혈상태.

어떻게든 피의 역류를 막기 위해 속을 살펴보자 지금 상황의 원인을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었다.

'...바르슈타인..'

죽었다 살아난 이 몸을 지탱하고 있던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기운이 어느새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안에 있을 때까진 멀쩡하고 제압 당한 이후에도 아무 변화 없이 가만히 있던 기운이 갑자기 이런 난리를 친다는 건 그와 연관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포로로 잡힐 바에 그냥 죽이겠다 이건가?

-주르르륵

"쿨럭."

대량의 피가 한번에 빠져나가면서 몸의 체온이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예전엔 스승님이 단칼에 보내주셔서 죽음이라는 감각을 잘 몰랐는데 이렇게 천천히 다가오자 상당히 무서웠다.

두번째 인데도 도저히 적응이 안될 정도.

'아, 아무 말도 못했는데..'

어느새 몸은 허리를 세울 힘도 잃은 상태로 피가 가득한 바닥에 쓰러졌다.

팔이나 손에 힘마저 들어가지 않아 피로 글씨를 남겨두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러면.. 유성이한테 아무것도 못 알려주는데'

...어쩌면 이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정보를 내주기 싫어서 자살한 포로처럼 보일 테니까.

그냥 비겁한 여자로 기억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움찔..

'...만약에 죽는다면 유성이 손에 죽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마지막까지 유성이를향한 뒤틀린 욕망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런데 유성이 너 다른 친구는 없는 거야?]

[남자애들은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여자애들은 친한 애들이 몇 명 있긴 한데 특별한 훈련이 아니면 만날 일이 없고 같은 성별끼리만 붙여 놓다 보니..]

[...그래서 맨날 나만 기다리는 거야?]

[...자주 와주세요.]

...이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난 것 같으니까

추한 과거의 망령은 이대로 사라지는 편이 유성이에게 좋을 거다.

-왈칵!

'아..'

이미 한번 느껴봤던 차가운 죽음의 향기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래도.. 비록 몹쓸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 방향이 많이 비틀리긴 했지만

유성이를 향한 애정 만큼은 정말 진심이었다는것만..

'...알면 안되지.'

정말 누구한테 말하는 건지.

죽기 전까지도 참 미친년 같은 생각 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