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11장-거짓말
천마의 말을 듣고 몸에 소름이 돋은 나는 빠르게 부인들에게 별일 아니라고. 친구가 맞다고 둘러댄 뒤 천마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데리고 자리에 앉는 순간에도 내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서방님이라고 불러주길 원하냐고 했었지 분명?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내가 거짓말을 한 게 들킨 건가?
아니야. 어쩌면 그냥 해본 말일 수도 있어. 원래 성격도 이상하고 나한테 이성적인 관심도 있던 것 같으니까 그게 합쳐저서 좀 짓궂은 장난을 쳤닫고 생각하면..
-쿵쿵쿵쿵
그러는 와중에도 내 몸은 어떻게든 천마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있었지만 심장이 당장 터지기라도 할 듯이 뛰며 정신은 하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입 밖으로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천마가 지금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들리지 않았다.
-탁!
-깜짝!
점점 가라앉아가던 의식을 간신히 각성 시킨 것은 천마가 탁자에 술을 내려놓으면서 발생한 둔탁한 소음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그런 건가?"
"아, 아닙니다! 그냥 요즘 건강이 조금 안 좋아서.."
"그러면 안되지. 사람은 모름지기 건강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나."
사실 천마가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그런 게 맞긴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렇다고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자, 보통 술이랑 다르게 몸에 좋은 것들로 만든 것이니 마시는 편이 오히려 건강에 좋을거야."
천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어느새 따른 술잔을 건넸고 나는 잔을 멍하니 바라보다 우선 받아 들었다.
뭔가 이 상황에서도 술을 권한다는 게 갑작스럽긴 했지만 이 여자의 성격을 생각하면 정말 술만 마시러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나도 술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근데 지금 상태로 술을 넣어봤자 들어가긴 하려나..'
아직도 머리가 뒤죽박죽인 상황에서 얼떨결에 받아든 잔을 움직여 입으로 움직였고
-꿀꺽
'...!'
한모금 마시는 순간 잔에 남아있던 나머지 액체까지 전부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엄청 시원한데요?"
"시원하고 맛도 좋지. 내가 괜히 좋은 술을 찾았다면서 그대를 찾아왔겠나."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좋은 술이었다.
그날 천마와 마교에서 만났을 때 마신 술들에 비견되는 수준인데 마교에서 가지고 온 술인가?
말하는 걸 보면 그땐 없었다가 새로 찾은 술인 것 같은데.
'밖에 나왔다가 우연히 발견한 술인..'
-또록
술의 출처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잔에 담겨있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투명하고 차가운 고체.
'...'
얼음이었다.
냉장고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오싹
얼음이 담겨있는 술.
심지어 아직까지 녹지도 않았다는 건 얼음 자체가 평범한 얼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방금 전 혼란 속에서 잠시 잊혀졌던 빙궁에 대한 일이 다시 머리 속을 스쳐갔고
-꿀꺽
"...신교의 하늘이시여. 감히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친구 사이에 질문을 해도 되냐고 질문까지 할 필요가 뭐 있겠나. 당연히 해도 좋지."
"...혹시 최근 북해빙궁을 방문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하는 와중에도 몸의 떨림을 쉽게 감출 수 없었다.
당장 방금 전에야 별로 실감이 안 나서 그렇지 당장 그 가능성이 눈앞에 다가오자 죄책감이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빙궁이 워낙 추운 지역이라 사람 자체가 잘 안 살긴 하더라도 이 세상 자체가 땅도 넓고 사람이 많은 걸 생각하면 그 규모가 아무리 적어도 수백명이다. 어쩌면 수천명일지도 모르고.
그런 사람들이 단번에 몰살당했다.
내가 입을 잘못 놀려서.
'...'
이미 심증으로 천마가 저지른 일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걸 물어보는 이유는 뭘까.
내심 천마가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까.
"음. 며칠 전에 방문했었지. 그대가 내 운명의 상대가 그쪽에 있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덜컹!
현실은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덜덜덜덜
"저, 저는 그저 외모만 묘사했을 뿐 빙궁에 있을 거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외모의 남성들의 9할정도는 빙궁에 있지 않나."
"1할은 빙궁 밖에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리고 그 1할은 중원 곳곳에 흩어져 있겠지. 그걸 언제 일일이 다 찾아보겠나. 일단 제일 많을 것 같은 곳으로 가는 거지."
"...아아."
...근데 나 방금 천마한테 소리 지른 거 아닌가?
"...언성을 높여서 죄송합니다."
"친구끼리 대화하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그렇게 떨지 않아도 되네. 누가 보면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
-흠칫!
-덜덜덜덜
"이거 원 무슨 말을 못하겠군."
"죄, 죄송합니다.."
"술이 좀 들어가면 괜찮아지지 않겠나. 자, 아직 많이 남았으니 더 마시게."
잔에 들어있는 얼음을 보자 생각이 많아졌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천마가 건넨 술을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얌전히 받아서 마셨다.
그리고 아직 정말 중요한 질문이 남았었다.
아니, 사실 이쯤 되면 사실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확인은 해야 하니까.
-후우..
일단 심호흡 한번 하고..
"...빙궁이 멸문당했다던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질끈
내가 질문을 하고도 눈을 감고 속으로 기도했다.
차라리 그날 천마는 얌전히 떠났는데 그 뒤 이상한 재난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길 바랬지만
"본녀가 일으킨 일이다만?"
"..."
현실이 언제는 친절했던가.
나는 잠시 탁자에 얼굴을 쑤셔 박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냐고 진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내던진 말 때문에 사람 수백 수천명이 죽었다는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데.
그냥 아예 현실에 없을법한 외모로 댔어야했을까?
붉은 머리, 초록 머리 뭐 이런 머리색이라도 대서 현실에 그런 사람이 아예 없게 만들어야 했나?
그랬다가 그거 찾겠다고 중원을 뒤집어 놓으면 또 어떻게 하라고?
그러면 아예 대놓고 널리고 널린 외모로 댈까? 흑발에 건강한 청년?
이제 중원 전체가 난리가 나는 수가 있다.
'...아으아아..'
어차피 지나간 일이라 되돌릴 수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이 여자의 정체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연재해같은 여자였다.
그것도 자기 의사를 가지고 돌아다닐 수 있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얌전히 방 하나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중원 전체를 헤집고 다닐 수도 있는 그런 여자.
이런 여자를 계속 밖에 돌아다니게 두는 게 맞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얌전히 마교에 틀어박혀 있게 둬야 하는 거 아닐까?
무슨 수..를..
'...'
...아직은 안된다.
아직 해야 할 게 많다.
스승님이랑도 겨우 만났고. 그 뱀파이어들도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세상이 멀쩡해진다.
이 여자 옆에 있으면 나는 괜찮을 것 같지만.. 그 죽음의 초월자라는 게 어떤 방식으로 남자를 멸종시켰는지도 모르지 않나.
아무리 천마라도 한 세계를 멸망시킬 정도의 권능 앞에선 나를 못 지켜줄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아직은 안돼.'
나중에.
정말 나중에 이 여자를 어떻게든 바깥 세상에 관심을 끄게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이 든 다음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아니다.
그런 심각한 고민이 담긴 내 표정을 어떤 의미로 해석한 걸까.
"왜 그렇게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인가? 내가 저지른 일에 딱히 그대의 책임은 없을 텐데."
"...제가 신교의 하늘께 점을 봐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왜 그대의 탓이냐는 거지. 그대는 그저 천기를 읽어 내 남편감의 특징을 알려준 것 뿐이지 않은가."
"천기를 보고 그대로 알려준 것 뿐인데 그대가 잘못한 게 어디 있다고 그러나."
"...!"
"그대가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텁
어느새 천마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팔을 뻗어 내가 앉은 의자를 잡았다.
딱히 몸을 구속 당한 것도 아닌데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의 눈앞까지 천마가 얼굴을 내게 가까이 들이밀었고
"이렇게 보기 좋은 얼굴이 뭐가 흉하단 말인가."
-스륵
다른 한 손으로 내 볼과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집안에 편하게 있느라 모자를 벗은 걸 다시 올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딱히 놀라는 모습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원래부터 내 얼굴이 보였던 모양이었다.
"본녀가 아직 그대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본녀는 거짓말을 싫어한다네."
"..."
"부디 그대가 다시 방문하겠다고 했던 약속은 거짓말이 되지 않길 바라지."
-스륵
천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 볼을 한번 더 쓸더니 몸을 돌려 탁자에서 멀어졌다.
"술은 몇 병 남겨두고 가겠네. 어찌 됐든 맛은 좋으니 애인들과 나눠 마시게나."
"...예."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천마는 방 문 앞에서 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아직도 자식은 없나?"
"......예."
"그렇군. 그러면 본교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평상시 자주 짓는 특유의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문 밖으로 나갔다.
"이, 이제 돌아가시게요?"
"흠.."
"왜, 왜 그러세요? 혹시 제,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뭐, 본교는 넓다는 건 알려주고 가겠네."
"...네?"
"해석은 알아서들 하게나."
다른 여자들은 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오히려 경지가 제일 낮은 당아영만 천마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이상한 풍경이 지나간 뒤 천마는 정말 그대로 집 밖으로 사라졌고
"허억..! 허억..!"
"흐읍.."
"..으음."
여소천과 검후님, 스승님은 천마가 나간 뒤에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왜, 왜들 그러세요?"
"...별거 아니에요."
"위압이 있었네. 그대나 소연이의 경우는 아마 오히려 경지가 낮아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지만..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든 정도였어."
"..."
스승님은 말없이 부채를 꺼내서 얼굴에 부치며 딴청을 피웠다.
...아무튼 당장은 별일 없이 잘 지나간 것 같았다.
앞으로 몇 달 뒤가 심각하게 걱정되긴 하지만.
"그, 그래서. 그 여자랑 무슨 대화를 했어요? 안에서 소리까지 차단해놔서 엿듣지도 못하고.."
"..좀만.."
"네?"
"...좀만 잘게요 그냥.."
나는 힘없이 침대로 다가가 씻거나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안하고 그대로 엎어졌다.
...엄청 피곤하긴 한데 뭔가 이대로는 잠들기가 부족..
-물컹
"음.."
역시 스승님이었다.
말 안 해도 다 아는구나.
익숙한 포근한 감각을 느끼며 이번엔 정말 끝을 모르는 수마가 다가왔고
시야가 검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의식도 깊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