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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223화 (223/250)

[223화] 11장-통보

내가 서신을 읽고 반쯤 멘탈이 나가있는 사이 놀란 건 나 뿐만이 아니었는지 당아영도 벙찐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빙궁이 무너지는 거였어요? 수백 년 동안 무너진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빙정 때문에 보통 건물에 비하면 말도 안되게 튼튼하긴 하지만 절대 못 부수는 건 아니죠. 저나 검후도 힘 좀 쓰면 무너트리는 것 자체는 할 수 있을 거에요. 빙궁의 무인들이 가만히 안 있을 테니 현실적으론 힘들겠지만."

아무리 빙궁이 사파에 중원 세력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세력이라 접할 기회가 적다지만 그들 자체가 약한 문파는 절대 아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보다는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웬만한 중소문파는 쳐다도 보지 못하고 역사도 결코 짧지 않은 곳인데

그런 곳이 고작 사람 한 명한테 당했다는 소리다.

...이게 소설로 읽을 때나 주인공이 혼자서 문파를 괴멸시키고 하는 거지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다굴에는 장사 없다고 경지가 높아도 혼자서 문파 하나를 상대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고 정말 무력 차이가 압도적으로 나는 경우라면 모를까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명성에 눈이 먼 고수들이 변방의 사파 문파들을 토벌하겠다고 나서다가 주검이 돼서 돌아오는 게 심심하면 들려오는 세상인데 변방이 맞긴 하지만 그 북해빙궁을 혼자서...

'...괴물 같은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결과물이 현실에 나타나니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존심 강한 여소천이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 중원을 정복할 수 있는 여자라고까지 했으니 그것과 비교하면 빙궁은 '따위'가 되겠지만 할 수 있는 거랑 실제로 하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그리고 사실 그냥 천마가 빙궁을 괴멸시켰다는 이야기라면 나랑은 별로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겠지만 하필 내가 마교에서 했던 짓이 마음에 걸렸다.

'...이런 미친.'

내가 살기 위해 천마의 운명의 상대로 나랑 완전 반대되는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던 것.

설마 백발에 키 크고 잘생겼다고 했다고 빙궁에 찾아가서 난리를 칠 거라고 어떻게 생각한단 말인가.

마이페이스에도 정도가 있지.

-삐질삐질

나 때문에 빙궁이 그런 꼴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빙궁이 나한테 뭔가 잘못이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니 근데 이건 진짜 나도 억울한 면이 있는 게 백발에 키 좀 크고 잘생긴 남자가 빙궁에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빙궁 남자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특징이라곤 하지만 그 단서 만으로 마교에서 빙궁까지 가서 이러는 게..

'...그냥 제가 진짜 죄송합니다.'

차라리 진짜 세상에 없을법한 특징을 댔어야 했는데 괜히 빙궁에 불똥이 튀었다.

진짜 이게 무슨 하루아침에 날벼락인지.

나중에 조의금이라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이게 나 때문에 사람이 죽고 다쳤다고 하면 원래 죄책감이 들어야 정상인데 그 수가 한두명도 아니고 문파 단위니까 현실성 자체가 느껴지질 않아서 생각보다 정신적인 타격은 덜했다.

그리고 빙궁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빙궁이 망했다는 게 아니었다.

'...천마가 마교 밖으로 나왔다.'

마교에 박혀있어야 할 그녀가 제 발로 밖으로 나왔다는 것.

빙궁의 위치 상 그녀가 중원에 발을 들인 것은 아니지만 우선 마교 밖으로 나왔다는 게 중요했다.

언제든 그 발걸음을 중원으로 옮길지도 모른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빙궁이 망한 것보다 그녀의 행보가 중원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하려고 한다면 구파일방이든 오대세가든 뭐든 다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폭탄 같은 존재가 중원으로 풀려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 그래서요? 천마는 어디로 갔대요?"

"그건.. 안 적혀있어요.."

혹시나 싶어 꼼꼼히 다시 읽어봤는데 천마의 흔적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아니 사실 서신 자체도 반신반의하면서 쓴 느낌이었다.

일단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 상 천마가 빙궁에 찾아와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건 맞는 거 같은데 그 규모가 워낙 압도적이라 이게 정말 사람 혼자서 저지를 수 있는 짓이 맞나 혼란스러운 느낌이었으니까.

나야 여소천이 말해준 덕분에 그 여자한테 상식을 따지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게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사실 천마의 외형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빙궁에 찾아왔다는 자가 정말 천마가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누군가가 본인을 천마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게 서신의 판단이지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게 그 여자 밖에 더 있을까..'

빙궁에서 사고를 친 게 천마가 아니면 오히려 더 문제였다.

그녀 말고도 엄청난 수준의 변수가 이 세계에 또 존재한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니 사실상 범인은 천마가 맞을 거다.

아니면 뭐.. 그때 가서 생각하고.

"그런데 천마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

"아니.. 그.. 원래 마교가 중원을 침공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상하잖아요. 빙궁은 애초에 중원 바깥에 있고.. 수십 년 동안 마교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가 갑자기 나와서 빙궁을 멸문시켰다는 게.."

"...그건 나도 의문이군. 나오려면 진작에 나와서 중원을 침공했을텐데.. 최근에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게 아니라면야.."

"최근.."

검후님과 당아영의 말이 끝나자 주변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침 최근에 내가 마교에 갔다 온 상황이고 천마에게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면 그 원인은 높은 확률로 나와 연관이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그 와중에 스승님은 내가 마교에 갔다 온 걸 모르시는 상황이었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나머지 3명은 반쯤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내가 뭔갈 했다고.

-삐질삐질

"아니.. 그.."

틀린 건.. 아니긴 한데..

아니 근데 그때 살아 나오려면 그렇게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거기서 아무 말도 못하거나 솔직하게 내가 운명의 상대로 나왔다고 말하면 지금쯤 지하실에서 천마랑 뒹굴고있었을텐데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겠냐고.

아무리 천마가 예쁘고 가슴도 크고 따지고 보면 이상형에 가까운 외모라곤 하지만 그 특유의 성격은 계속 알 수 없는 불길함마저 주는 데다

심지어 그땐 당장 몇 분 전에 미래의 천마한테 강간까지 당한 상황이라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게 기적인 정신상태였단 말이다.

그런데 이걸 여기서 말해도 되나?

천마의 점을 봐줬는데 미래의 운명의 상대로 내가 나왔고 심지어 미래에서 강간까지 당한 데다 정황을 보면 현실의 천마도 나한테 첫눈에 반한 것 같다고?

...말을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다.

'...진짜 어떻게 하지.'

-똑똑

그렇게 내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리며 고민하고 있는 사이 또다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오 이번엔 또 누구에요!"

여소천은 당연히 자신을 찾는 사람일 거라 생각하고 화를 내며 문을 벌컥 열었고

-벌컥!

"이번엔 또 무슨 일..!"

"...음. 이쪽으로 기운이 느껴저서 왔는데 혹시 안에 오빠나 남동생이 있나?"

-오싹!

듣는 것 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천마?"

"아. 안 그래도 저 안에 느껴지는군. 잠깐 좀 들어가도 되겠나? 남의 집에 초대도 안 받고 들어가는 건 무례한 짓 같아서 말이야."

"......일단 들어오세요..?"

여소천은 차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허락한 뒤 문에서 비켜섰고

"...신교의 하늘이시여?"

"오랜만에 보는구나. 45일하고도 6시진 2각 만에 듣는 호칭이야."

"...예?"

"그리고 옆에 있는 여자들은.. 형제라기엔 좀 많은 것 같은데 부인인가? 생각한 것보다 좀 많군. 몸에서 여인의 향기가 여럿 난다 싶었더니."

"..."

별다른 제지 없이 집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그녀를 보고 멍한 상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보며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런 천마를 향해 우리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검후님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뵙는 건 처음이군요. 20년 전 전장에선 은혜를 입었습니다."

"20년..? 아. 그 혈교인지 뭔지 하던 녀석들을 말하는 건가."

"...그때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아마 중원의 지금 모습은 많이 달랐을 겁니다. 저 또한 있지 못했을 거고요."

그러고 보니 천마 덕분에 검후님과 여소천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했었지.

갑작스러운 천마의 방문에도 그건 생각나신 모양이었다.

"으음.. 뭔가 얼굴이 익숙한 것 같기도 하구나. 나중에 보면 제법 기대가 될 것 같은 화산의 검객을 본 것 같기도.."

"...과찬입니다."

보통 저런 말은 검후님이 해야 할 말인데 오히려 그런 말을 검후님이 듣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상황이 이해조차 안 가고 있다.

그 와중에 스승님은 어떤 상황일까 살짝 고개를 돌려서 쳐다봤는데

"...흠."

평상시와 비슷한 무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스승님과 10년을 넘게 살아온 입장에선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스승님이 떨고 있다는 걸.

'...스승님보다 강하구나.'

하늘 같던 스승님도 천마에게 떠는 모습을 보이자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는데 그 순간 천마가 내게 다가오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면금귀와는 그때 꽤 좋은 시간을 보내서 친구가 되기로 했네. 그가 다시 찾아오기로 약속까지 했었고."

"..네?"

"뭐, 그렇게 불안한 표정 짓지 않아도 되네. 좋은 술을 찾아서 친구와 몇 잔 나누고 싶어 찾아왔을 뿐 그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여기서 괜히 이상한 짓이라도 했다간 그대가 곤란할테지. 이렇게 많은 부인을 앞에 두고 말이야.]

귀와 고막이 아니라 뇌에 곧바로 찍히는 천마의 전음.

"반 시진 정도면 될텐데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가져도 되겠나?"

천마는 사실상 통보에 가까운 허락을 부인들에게 요청했고 사실상 그녀의 말을 선택할지 말지는 나에게 달린 상황이었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아니면.. 내가 서방님이라고 불러주길 원하나?]

-덜컹!

뇌에 곧바로 전달된 목소리와 함께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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