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11장-경투하사
"다음."
"별로구나."
"다른 이는 없나?"
계속되는 교체 요청.
자신감을 가지고 남자들을 엄선해서 차례차례 대리고 왔던 궁주는 점차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명 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그 천마쯤 되는 여자가 눈이 그렇게 낮을 리도 없을 테니 겨우 몇 명 보여준다고 바로 마음에 들어할 거라곤 원래부터 생각도 안했고.
근데 그것도 점차 횟수가 늘어가자 말이 달라졌다.
뭐 10명 20명도 아니고 이제 거의 100명째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이 여자가 지금 나를 놀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엄선한 것도 10명 정도였는데 그게 다 별로라고 하니 다시 20명 정도를 엄선하고 또 엄선하고..
나중 가면 지쳐서 아예 취향을 물어봤는데도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는 정보가 없어서 말이다. 그냥 저대로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다시 말하지만 천마가 요구한 조건은 빙궁의 남자 아무나 골라잡아도 성립하는 조건이었다.
기껏 어울릴만한 걸 수십 명이나 보여줬는데 전부 퇴짜를 놓는 건..
-빠득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시비를 걸러 왔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제대로 남편감을 구할 생각이 있으면 자기 취향을 제대로 말 해주던가.
아니면 그냥 보여주는 대로 좋다고 하던가.
거의 100명을 보여줬는데 하나같이 원하는 게 이게 아니라고 하면 고생해서 데려온 이쪽은 뭐가 되냔 말이다.
-후우
"...난 그대가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정말 남편감을 찾을 생각이 있긴 한건가?"
"글쎄."
"글쎄..?"
"단서가 저것밖에 없으니 당장 찾아올 곳이 빙궁밖에 없지 않겠나."
"..."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뭔가 말하는 게 이상했다.
자기가 원하는 남편감을 찾아서 온 거라기보단 이쪽에 남편이 있다고 누구한테 듣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런데 정작 봐도 봐도 잿빛 뿐이란 말이지.. 남편감이라면 최소한 그 점쟁이만큼의 색은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점쟁이?"
"그러고 보니 내가 말을 안 했나? 꽤 재밌는 점쟁이가 이쪽에 내 남편감이 있을 것 같다고 해서 말이야. 그래서 와봤네."
...이건 또 뭔 소린가.
다짜고짜 찾아와서 무례하게 구는 것도 모자라서 남편감이랍시고 남자들을 데려와 보라는 요구를 한 이유가 고작 점쟁이 때문이라고?
"겨우 그딴 점쟁이때문에 본 궁을 농락..!"
"그딴?"
-싸아아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평생을 빙공을 연마하고 살아온 그녀조차 살이 절로 떨릴 정도로 차갑게 변한 분위기.
-부들부들
'이, 이게 무슨..'
"다시 한번 말해보지 않겠나. 방금 전까지 입을 쉽게 놀리던데."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의 앞에 있는 천마를 바라봤고 이 분위기가 그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싱긋.
"북해빙궁의 궁주라는 자가 고작 추위를 타진 않을 것 아닌가?"
허접한 도발이었다.
북해빙궁의 빙공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냐는 의미가 담긴 어떻게 보면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는 도발이었지만 그것도 상대가 어느 정도 맞아야 통하는 말이었다.
-덜덜덜덜
'소,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대체 얼마나 무공이 강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자신은 충분히 강한 편이었고 밖에 나서지 않아서 그렇지 천하십대고수의 이름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조차 떨게 만들 정도의 한기를 가만히 앉아서 내뿜을 수 있다는 건
상대가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극음의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는 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설명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이건 무공이 아니야.'
정작 느껴지는 한기에서 극음의 무공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무공을 익히지 않고도 자신을 떨게 만들 정도의 한기를 낼 수 있다는 것.
대체 얼마나 아득한 경지란 말인가.
인간이 도달하는 것 자체가 허락되어 있는 경지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부들부들
-질끈!
"사, 살려주십시오."
결국 그녀의 선택은 자존심을 굽히는 것이었다.
이미 느껴지는 것 만으로도 눈앞에 있는 천마와 그녀 사이엔 아득한 격차가 있었다.
그리고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그런 천마의 심기를 건드려버렸으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살려 달라고 비는 것 뿐.
자존심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본녀가 왜 그대를 죽인단 말인가. 본녀는 겨우 본녀를 모욕한 정도로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독하지 않아."
-뚝..
식은땀이 흐른다.
죽음이 점점 목전까지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순간 상대가 먼저 자신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었다.
"그렇다면 궁주. 하나만 물어보겠네. 하나밖에 없어서 매우 신뢰하던 친우가 그대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을 때. 그대는 어떻게 하겠나?"
-덜덜..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주어진 선택지.
그녀는 머리를 최대한 굴리며 천마가 만족할만한 대답을 준비했다.
"어, 엄벌에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우정을. 신뢰를 배신하다뇨."
"그런가?"
"ㄴ, 네. 누군지 몰라도 감히 천마님의 신뢰를 배반한 대가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 죄는 반드시 목숨으로 갚아야.."
-툭!
-데구르..
"거짓말 한번 했다고 목숨을 앗아가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하나밖에 없는 친우인데 그 정도는 용서해 주어야지."
"..."
"뭐, 술은 잘 마셨네. 챙겨가도 좋다고 했으니 내가 알아서 챙겨가도록 하지."
천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반쯤 누워있던 자세를 일으켰고 그 말에 대한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챙겨준 보따리를 챙기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끼익..
"궁주님. 손님이 있으신 와중에 실ㄹ.. 궁주님?!"
"흠."
"구, 궁주님이 살해당하셨다!!!"
하필 궁주를 찾으러 온 이에게 발각되며 내공 섞인 외침과 함께 빙궁 전체로 궁주의 소식이 알려졌다.
당연히 이대로면 귀찮아질게 뻔한 상황.
탈출하는 게 문제는 아니었지만 탈출한다고 하더라도 괜히 이들이 본교까지 찾아온다면 더 귀찮아질 테니..
"몸을 쓴다면 한번에 쓰는 게 덜 귀찮겠지."
한 명의 인간이 그렇게 마음을 먹은 뒤
수백 년 동안 아무리 추운 눈보라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궁전이 무너지는 데에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
.
.
-터벅터벅
-꿀꺽
"마실수록 맛이 좋단 말이지. 돌아가면 군사에게 말해둬야겠어."
여인은 발자국이 생기자마자 흔적을 덮어버리는 혹독한 눈보라에도 개의치 않으며 보따리 하나를 질질 끌고 걸어가고 있었다.
처음 빙궁에 도착한 순간부터 기감으로 색이 보이는 이는 한 명도 없는 걸 확인 했는데도 굳이 심술을 부렸던 건 잠깐의 여흥이었다.
혹시 모르지 않나. 보다보면 색이 보이는 자가 한 명 정도는 나타날지.
그러나 봐도 봐도 결국 세상은 잿빛일 뿐
-꿀꺽
몇 달 전 봤던 한 점쟁이처럼 다채로운 색을 가진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1할이라도 따라가는 이가 있었다면 남자든 여자든 흥미를 좀 가졌을 텐데 기대했던 궁주라는 여자마저 딱히 재밌을 것 없는 여자였으니..
"쯧."
술을 목 너머로 흘려보낼수록 그날 봤던 광채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군사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이끌림이 생겨 직접 만나보게 됐는데 직접 나타난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사람에게 색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이라는 걸 그를 통해서 처음 깨달았다.
잿빛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느껴지는 화사함.
그런 이가 봐주는 점이라길래 더 믿었던 것도 있었다.
백발에 장발에 키도 훤칠하고 몸도 튼튼한 청년이라.
-피식
누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특징 아닌가.
그래서 직접 빙궁까지 와봤지만 소득은 별로 없었다.
굳이 있다면 얼음을 띄운 술이 맛이 꽤 색달라서 좋다는 것 정도.
빙궁의 잔해에서 빙정처럼 보이는 것도 챙겨왔으니 신교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만들 수 있겠지.
'뭐, 세상에 저런 남자가 빙궁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딱히 상관 없었다.
정말 그가 본 내 남편감이 그가 말한 대로의 특징을 가진 사람이라면 뭐 어떤가.
그도 그날 말하지 않았던가. 천기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직접 손에 넣어봐야겠지.'
그가 진실을 말했든 거짓을 말했든 상관없다.
본녀가 그 색을 손에 넣기로 마음 먹었다면 그게 본녀의 미래이니.
-물끄럼
굳이 저 하늘에 보이는 푸른 기록들을 뜯어볼 필요는 없겠지.
만일 정말 거짓말을 했다면 그 값은 조금 받아내야겠지만.
* * *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빙궁이 천마한테 당했다고요? 병력이라도 이끌고 갔대요?"
"호, 혼자였다는데.. 잠시만요.."
나는 온몸이 덜덜 떨리는 걸 느끼면서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다시 서신의 내용을 읽어봤고 내용을 요약할 수 있었다.
며칠 전 북해빙궁에 본인을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나타나 이상한 요구를 했고 그에 분노한 빙궁의 궁주가 그녀를 공격했지만 패배하며 살해 당했고 그에 분노한 빙궁의 무인들이 단체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덜덜덜덜
"빙궁이.. 멸문당했네요.."
궁전은 무너지고 살아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한다.
나는 내가 일으킨 대참사에 절로 눈앞이 새하얘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