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11장-북해빙궁
-싸아아아
중원의 북쪽에 위치한 일 년 내내 겨울과도 같은 날씨를 지닌다는 땅에는 아무리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궁전이 있었다.
주변에 수북하게 쌓인 눈과 곳곳에 널려있는 얼음 덕에 과연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절로 들게 만드는 땅이었지만 그런 곳에 적응해서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며 고유의 무공까지 발전시켜 이제 중원에서도 인정받는 거대한 문파로 우뚝 서는데 성공했다.
중원에서 불리는 이름은 북해빙궁으로 음의 기운을 다루는 고수라고 한다면 누구나 빙궁부터 떠올릴 정도로 그쪽 분야에서 만큼은 중원에서도 비견될 자들이 없다는 자부심을 자랑하는 그들이었지만
빙궁의 궁주는 다짜고짜 찾아온 한 여인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후룩
"술 맛이 꽤 괜찮군. 본교에서 마시던 것과는 또 색다른 맛이야."
"...원한다면 돌아갈 때 몇 병 챙겨갈 수 있게 하지."
"그렇게 해준다면 고맙겠군."
-빠직
이 여자는 사양이라는 걸 모르나?
선약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온 것도 무례한 짓인데 기껏 대접한 차도 마다하고 술을 갖다 달라고 하질 않나. 양심이 있으면 사양 한번쯤은 할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없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에게 있어 다른 상대였다면 당장이라도 판을 엎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정도의 태도였지만 상대의 신분이 그녀를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교의 교주.
-스윽
'소문 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추운 북쪽 지역에서만 지낸다고 해도 중원에서 암묵적으로 천하제일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에 대한 소문을 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중원을 그 손아귀에 떨어트리기 직전이었던 혈교를 일각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혼자서 괴멸시켰다고 했던가.
그 자리에 중원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대부분 몰려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묘사 만으론 정말 까마득한 강자이긴 했다.
그런 고수들도 이기지 못했던 혈교의 교주와 그 잡졸들까지 홀로 잡아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러나 빙궁의 무인들은 그녀가 대단한 고수인 점은 알겠지만 정확히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었는데
빙궁은 그 당시 혈교의 공격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혈교를 혼자서 잡았다고 해도 혈교를 제대로 상대해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강한지 알 수가 없는 노릇.
그렇기에 빙궁에서는 그런 천마를 이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십대고수 반열에 들 정도로 강하긴 하지만 혈교를 홀로 괴멸시켰다는 것은 과장이다.' 라고.
상식적으로 혈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전부 모인 곳에서 그들 전부를 여유롭게 제압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고 그런 혈교를 여인 혼자서 괴멸시켰다는 것은 더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혈교가 중원의 고수들과 싸우느라 전력이 많이 악화됐고 그 틈에 천마가 끼어들어 마무리를 했다 정도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
실제로 정파에서 마교에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대외적으론 그렇게 소문을 퍼뜨렸으니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빙궁에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의 눈앞에서 보여주는 천마의 태도 또한 그런 대단한 강자의 것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무인이라면 자고로 경지에 걸맞는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법이거늘.'
최소한의 예의도 없고 차보다 술부터 찾는 주정뱅이에 염치도 없는 인간이라니.
이런 인간이 천하제일인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복장도 보기에 좋지 않았다.
옷이 얇아서 몸의 굴곡이 대부분 드러나고 살갗을 노출하는 면적 또한 많았다.
조신한 여인의 복장으론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실내에서 혼자 편하게 지내기 위한 복장이라면 모를까 한 세력의 우두머리끼리의 대화에 이런 옷을 입고 와도 되나?
사는 지역의 특성 상 두껍고 살을 꽁꽁 싸매는 옷이 눈에 익숙한 그녀에게 천마의 복장은 절로 눈이 찌푸려지는 종류였다.
소문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천마쯤 되는 인간이 한서불침도 이루지 못했을 리는 없을 테니 이 추운 땅에서도 저런 옷을 입고 멀쩡히 돌아다니는 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마.. 천마신교에서 우리 북해빙궁으로 사람을 보낸 일은 적어도 지난 백 년 동안은 없는 걸로 아는데. 그것도 교주께서 직접 오는 것은 아예 처음인 것 같고."
그런 천마신교의 교주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그다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반말은 천마가 먼저 했고 아무리 천마라도 혼자서 빙궁에 온 이상 함부로 행동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기세를 밀리지 않으려는 것도 있었다.
마교가 빙궁을 찾아올 이유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교류가 필요하거나 아니면 마교가 호시탐탐 노리는 중원정복에 함께하자는 동맹 제의 빼면 딱히 뭐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사절이나 장로 수준도 아니고 교주가 직접 찾아왔다?
이건 뭐 후자밖에 더 있겠는가.
'딱히 중원에 원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가능성과 보상이 충분하다면 못할 것도 없지.'
그들이라고 언제까지 이 농사짓기도 힘든 척박한 땅에서 생활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적응했다고 해도 이 땅이 생명들이 살기 좋은 땅인 것은 절대 아니었고 결국 추운 날씨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이들은 지금도 계속 존재한다.
중원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면 절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마교라도 홀로 중원을 정복하긴 힘들겠지. 이번 천마는 지난 수백 년 동안 깨달은 게 있나 보군. 아무렴.'
곧 이어질 천마의 제안을 먼저 상상하면서 보상으로 뭘 요구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천마의 입이 열리자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남편감을 찾으러 왔네."
"...?"
"긴 백발에 훤칠한 키. 그리고 미남이라는데 빙궁의 특징 아닌가?"
"..."
순간 이게 무슨 소린가 반문할 뻔 했지만 그녀 또한 머리 회전은 빨랐기에 빠르게 천마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천마의 취향이 저런 특징을 가진 남성이라는 건가?'
그래서 그런 남자들을 찾아서 남편감으로 삼으려고 빙궁으로 온 거고?
'허.'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누굴 중매쟁이취급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쁜 건 둘째 치더라도 실제로 빙궁에 미남미녀들이 많은 건 사실이었고 실제로 그 외모를 이용해 고수들과 연을 만들어두는 건 옛날부터 이어진 빙궁의 세력 확장 방식 중 하나였으니
만약 천마의 남편을 빙궁 출신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면?
'확실히 큰 기회군.'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이 정도면 기분이 나쁜 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정도.
하긴. 20년 전에 혈교의 습격을 막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지금도 나이가 상당할 텐데 아무리 반로환동을 했더라도 그런 노괴에게 장가를 올 남자는 흔치 않겠지.
어쩌면 원래 있었는데 죽었을지도 모르고.
생긴 것부터 딱 남편을 잡아먹을 것처럼 생긴 상 아닌가?
혼자서 버티기 외로우니까 굳이 빙궁까지 와서 남편을 찾는 것일 수도 있다.
"일단 엄선해서 준비해보도록 하지. 조금 시간이 걸릴 수 있는데 괜찮겠나?"
"그러면 그동안 마실 술을 준비해줬으면 좋겠는데."
"...알겠네. 말해두지."
남편감을 찾으러 왔다면서도 바로 직전까지 술이나 밝히는 여자라니.
그녀의 안에서 천마에 대한 인식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입어 두게나."
"...이건 뭔가?"
"내 겉옷이네. 그대가 옷을 어떻게 입던 상관없지만 내가 보기에 불편해서 말이야."
"...흠."
천마는 그녀의 말을 듣고 본인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건네준 겉옷을 껴입었다.
아마 본인의 옷차림에 대해 자각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제 정말 갔다 오지. 뭐 더 필요한 거 없나?"
"옷이 흉부쪽에서 조금 답답한데 더 큰 옷은 없나?"
-빠직
"없는 걸로 알겠네."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시비를 거는 모습에 문을 닫고 방에서 나왔다.
정말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였지만 크게 봤을 때 장차 빙궁에 큰 이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궁주로서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그런 기회를 그칠 수는 없는 노릇.
'아들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들이라도 있었다면 제대로 결혼동맹이라도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노괴한테 아들을 팔아넘기는 꼴이 되겠지만 뭐 세력을 위해 개인이 그 정도 희생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어쨌든 생긴 건 빙궁 여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매력 있는 여자고 남자가 그런 여자한테 장가를 보내준다면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일단 그래도 최대한 직위가 있는 쪽에서 골라봐야겠군.'
천마가 말한 특징은 빙궁에선 지나가는 아무 남자나 붙잡아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조건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 내주면서 생색을 낼 수 있게 직위가 있는 쪽에서 골라보는 게 좋겠지.
기왕이면 젊은 남자가 좋을 거고.
'..혼수를 달라고 하면 줄 지가 궁금하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마가 요구한 남편감을 찾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