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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213화 (213/250)

[213화] 11장-양심

"뭐, 뭐에요! 왜 갑자기 사람 입을 막고 끌고 오.."

"제가 전에 검후한테 그 사실 밝히면 안된다고 말 했어요 안 했어요?!"

"...어.."

그랬었나?

여소천이 나를 방 안으로 끌고 온 뒤 입을 풀어주자 바로 항의하려고 열렸던 내 입은 다시 다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검후님한테만큼은 절대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빙의자라는 걸 밝히지 말라고.

"사람이 말을 했으면 좀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하마터면 방금 큰일 날뻔 했잖아요?!"

"아니 그거 밝히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건 당신이 저 여자 상태를 몰라서 하는 말이죠! 자칫 잘못 건드리면 주화입마까지 올 수 있는 역린이라니까요!"

...그 정도야?

이상한 부분에서 아는 게 많은 여소천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이건 말하지 않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사실 나보다 검후님을 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니까 나보다 검후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을 거고.

"...근데 그러면 그쪽은 제 단전을 부순 범인이 검후님의 제자인 걸 알고 있던 거 아니에요?"

"그, 그건.."

"왜 말 안 해줬어요?!"

"애,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이것도 맞는 말이었다.

딱히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던 것 같긴 하다.

"다, 당신이 정말 궁금해 했었으면 제가 말해줬겠죠! 근데 솔직히 그렇게 궁금해 했던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런 건 검후가 당신에게 직접 이야기해줘야지 제가 선수 쳐버리면 검후는 뭐가 돼요!"

"...사사건건 맞는 말만 하시는데 한대만 때려봐도 돼요?"

"호신강기를 맨손으로 칠 자신이 있다면요?"

"쳇."

내 손만 다칠테니 그냥 참기로 했다.

"아무튼 그 사실은 검후님에게 밝히면 안된다고 하면.. 좀 찝찝한 해결책밖에 없긴 한데.."

"뭐.. 세상엔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현재로서 가장 무난한 해결법은 그거 뿐이에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결국 상황이 이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척 하면서 검후님을 용서해주는 것.

내가 검후님이 잘못을 저지른 본인이 아닌 이상 찝찝한 결말이긴 하지만 당장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정 마음에 걸리면 그냥 정말 기억상실이라고 생각하시던가요."

"아니 그래도 영혼이 바뀐 거랑 기억상실은 다르죠."

"아니면 어차피 당신이 지금 그 몸으로 산 세월이 전 주인보다 훨씬 기니까 아예 본인 몸으로 생각해도 좋고요."

"...후우."

사실 내 몸으로 느껴지는 건 맞긴 하다.

지구에서의 기억이 없으니 나한테 남아있는 제대로 된 기억은 이 몸에 들어온 이후의 기억 뿐이니 그냥 이 몸을 내 몸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밖에.

...뭐 따지고 보면 완전히 남의 일도 아니고 결국 단전이 깨진 몸으로 살아온 건 나니까 나한테도 그녀들을 용서하고 말고의 권리는 어느 정도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제 천기를 읽는 능력이 천지신명님이 준거라는 데 맞아요?"

스승님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라 여소천에게 다시 물어보자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당연한 걸 물어보시네요. 그분의 은혜인 게 당연한 건데."

"전 제가 노력해서 얻은 줄 알고 있었거든요."

"노력이고 자시고 그분의 마음에 안 들면 100년을 노력해도 안되는 거에요. 당신만큼 자유롭게 천기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시대를 넘어서 지난 세월을 뒤져봐도 없었다고요."

"음.."

아무래도 스승님의 말을 사실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대답이 제대로 돌아온 걸 보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세상에 던져 놓은 건 맞았지만 그래도 나름 신경 써주고 있었구나.

"...진작에 신경 써주고 있다고 말을 해줬으면 제가 원망을 조금 덜 하지 않았을까요?"

"시, 시끄러워요! 인간 주제에 신의 의사를 파악하려 들지 마세요!"

"자기도 인간이면서."

"아, 아무튼! 너무 둘을 오래두는 것도 그러니까 슬슬 돌아가서 뭐라도 말이라도 해주세요. 그리고 당신이랑 연락 중인 하얀 마녀에 대해서 할 말이 있으니까 나중에 잠깐 제 방으로 오시고요."

성녀님한테 할 말이 있다라.

혹시 내가 계약한 걸 알아챘나 싶어 식겁했지만 다행히 그런 눈치는 아니라 얌전히 입을 다물고 검후님과 제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둘은 여소천과 내가 없는 사이 따로 대화 같은 것도 나누지 않았는지 우리가 떠나기 전이랑 거의 그대로인 상태로 머물고 있었다.

검후님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이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걱정되는지 그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느껴졌고

제자 쪽은.. 이미 초연한 상태처럼 보였다.

아까 순순히 죽어도 좋다고 했던 걸 보면 삶에 의욕 자체가 남아있지 않은 모양.

"음.. 그러니까 우선 정리를 해볼게요."

나는 일단 이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검후님과 그 제자의 상황을 정리했다.

"검후님은 검후님의 제자가 옛날의 저한테 평생 남을 상처를 줬는데 검후님은 그런 저를 돌봐주지도 못하고 계속 방치해둔 게 미안한거죠?"

"...내가 제자 교육을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니 당연하지. 특히 무인의 단전을 부순다는 건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 심한 짓이네. 단순히 평생 남을 상처를 준 수준이 아니라."

'그걸 무인이라고 해도 되려나..'

그때 내.. 아니 이 몸의 경지가 삼류는 됐으려나?

삼류도 무공을 익히기만 했다고 다 삼류인게 아니다.

무공을 이용해서 뭘 할 수 있어야 그래도 삼류라고 할 수 있지 내가 내 몸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데 어렸던 시절인 것 까지 생각하면 삼류도 안됐을 터.

진짜 무인들의 단전을 부수는 건 확실히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 잔인한 짓이겠지만 그 시절의 이 몸의 단전에게 그 정도 까지의 가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굉장히 위험한 일인 건 맞았고 나도 스승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을 정도로 치명상인 건 맞았지만..

뭐 이미 지나간 일인데다가 검후님의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검후님의 제자가 저지른 일이지.

심지어 그일 때문에 스스로 제자의 목까지 베었다고 하셨으니 검후님이 이 이상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이제야 그동안 검후님이 나를 묘하게 불편해 하는 기색이 있던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냥 올곧은 성격에 연애에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 줄 알았는데 설마 그 정체가 죄책감이었을 줄이야.

"...지금 뭐라.."

"어차피 기억도 못하는 일이고 지금은 다 낫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죄책감 느끼실 필요 없어요. 앞으로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사이인데 그런 거 가지고 계속 불편해 하시면 어쩌려고 그래요."

"하, 하지만 내가 제자 교육을 잘못해서.."

"제자 교육은 잘 하신 거 같은데요."

-힐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검후님의 제자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단전을 부쉈을 때보다 훨씬 어린 14살 때부터 저렇게 성격이 고지식한 걸 보면 검후님이 딱히 제자 교육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 심경의 변화가 있었겠지.

"그리고 검후님 제자가 제 단전을 부쉈을 때가 다 큰 성인이었을텐데 검후님이 책임질 필요는 없죠. 미성년자라면 몰라 성인이면 자기가 저지른 일은 자기가 책임져야지 부모나 스승한테 떠넘겨서야 되겠어요?"

"...스승이 제자의 잘못을 책임지는 건 나이를 먹어도 당연한.."

"아 쫌 그런 고지식한 생각 좀 버리라니까요. 이렇게 세대 차이가 나가지고 한 지붕 아래에서 살 수 있겠어요?"

"세, 세대 차.."

"검후님도 저랑 여행 다닐 때 꽤 많이 도와줬고 목숨도 여러 번 구해 줬잖아요? 그걸로 갚은 걸로 쳐요. 아니면 이제 와서 제가 싫어져서 그래요? 이참에 혼약 파기하려고?"

"아, 아닐세!"

-덥석!

내 말에 검후님이 다급하게 내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오, 오해네! 나, 난.. 내가 그대를 속인 것 때문에 내게 혐오감을 느낄 까봐.. 그대가 원한다면 혼약을 파기해도 좋다는 거지 내가 그대가 싫어졌다는 건 절대 아니네! 이, 이제 와서 그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

"그래요. 그거면 된 거에요."

-쪽

나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온 검후님을 향해 까치발을 내밀고 입을 맞췄다.

"어, 어어.."

"사람이 좀 이기적으로 살 줄도 알아야지. 고지식한 건 알겠는데 계속 그렇게 이타적으로. 자기 생각은 안하고 남 생각만 하면서 살면 병들어요. 정신병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죠? 검후님이야 건강해서 육체적인 병은 안 걸리겠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게 마음의 병이거든요?"

"아, 알고 있네만.."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그래요!"

"미, 미안하네!"

"말로만 미안하면 다에요! 앞으로 고칠 거에요 안 고칠 거에요!"

"고, 고쳐보도록 노력하겠네!"

"노력하는 게 아니라 고쳐요!"

"고치겠네!"

"그래. 그래야 좀 사람 다운 삶이지."

검후님 본인이야 나한테 미움 받기 싫어서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숨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이타적인 사람이다.

사람이 좀 이기적으로 살아야지.

"자.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으면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거 하나만 말해봐요."

"여, 여기서 말인가?"

"왜요. 고치겠다더니 거짓말이었어요?"

"아, 아니.. 그래도 대놓고 밝히기엔 좀 부끄럽지 않은가.."

"뭐가 부끄러워요! 사람이 좀 욕망에 솔직할 줄도 알아야지! 빨리 말해요!"

"으읏..."

그 고지식한 사람이 제일 하고 싶은 게 뭘까.

돈을 펑펑 쓰고 놀러 다니는 걸 수도 있고 술과 고기를 배 터지게 먹고 싶은 걸 수도 있고 수련은 내팽겨치고 그냥 누워있는 걸 수도 있다.

사실 이쯤 되면 나도 궁금했다.

과연 검후님의 욕망은..

"그, 그대와 교접을 하고 싶네!"

...뭘..

"..."

"예, 예전에 했던 것처럼 쓰러져있는 그대의 다리를 붙잡고 깊이.."

"거, 검후.. 거기까지만 말해요. 옆에 당신 제자도 있어요."

"...핫!"

"..."

나는 조용히 말없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 그냥 내가 만악의 근원이 맞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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